성북아리

* 성북아리는 성북 + 아리아리를 합친 말입니다.
아리아리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자, 그래도 없으면 길을 만들자”라는 우리말입니다.

성북아리

[5호 - 서로인터뷰] 우선권이 부여된 부러운 우회전을 거부하는 삶을 위하여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2-05-10 조회수 :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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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아리’는 장애인운동 활동가 두 사람이 서로를 인터뷰하는 ‘서로인터뷰’ 꼭지를 마련했습니다. ‘서로인터뷰’는 일방적인 인터뷰가 아닌 상대방의 인터뷰어가 되어 서로 생각을 나누는 꼭지입니다. 다섯 번째로 박정숙 활동가(사단법인 노란들판)와 이승헌 활동가(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아래 장추련)가 만났습니다. (편집자 주)




▶ 서로인터뷰를 진행하는 정숙님(오른쪽)과 승헌님(왼쪽)


♣ 이승헌(아래 헌) : 정숙님 아들 가람님이 장추련 시각장애인 활동가 근로지원인 일을 하시잖아요. 제가 본 가람님은 무척 생각이 깊고 나이보다 조숙하거든요. 그런데 정숙님은 평소에 무척 밝고 일하실 때 화도 많이 내시던데 가람이는 아빠를 닮았나요?


♠ 박정숙(아래 숙) : 아빠 많이 닮았어요, 가람이가 초등학교 때 내가 좀 늦게 들어가면 계속 전화해요. “엄마 어디야. 언제 들어와. 위험하니까 빨리 들어와” 우리 남편도 나한테 그렇게 안 하는데 가람이가 그렇게 잘 챙기고 세심했어요. 우리 아이들한테 미안한 게 유치원, 초등학교 다닐 때 부모가 가야 하는 날 제가 간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상처받을까. 대부분 아빠가 갔죠. 그래도 같은 동네 애들은 내가 장애인인 거 알잖아요. 학교에서 놀렸대요. “니네 엄마 병신이지?” 가람이가 또 불같은 게 있거든요. 막 싸우고 그런 건 아닌데 울고불고했죠.


♣ 헌 : 정숙님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약간 눈치 보거나 그러셨나요?


숙 : 저는 ‘굳세어라 금순아’였어요. 사실 엄마 얼굴을 몰라요. 저를 키워준 사람은 우리 아버지의 누나였어요. 아버지 형제분들 모두 이북이 고향이에요. 내가 아기 때 아버지가 이혼하셨고 엄마 없이 고모 손에 양육되면서 차별을 많이 받았어요.


♣ 헌 : 어렸을 땐 걸어 다녔어요?


♠ 숙 : 조금 걸었어요. 오래 걷는 건 아니지만 지금보다 잘 걸었어요. 제가 집에 잘 붙어 있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우리 고모는 나한테 몸도 성치 않은 게 빨빨거리고 돌아다닌다고 만날 잔소리했어요. 서울 보광동에 살았는데 거기 예전에 태평극장이 있었어요. 보광동에 미군들이 많이 살았거든요. 이태원 옆 동네죠. 제가 처음 다닌 학교가 보광국민학교였어요. 거기는 미군들이 많고 미군 바가 많아서 밤에 진짜 재미있어요. 


♣ 헌 : 뭐가 재밌어요? 밤에 무섭지.


숙 : 아니에요. 밤에 막 휘영청 번쩍번쩍했죠. 물론 범죄도 있었겠죠. 나는 어려서 몰랐고 다리를 절면서도 집에 안 있으려고 빨빨거리고 돌아다녔어요.


♣ 헌 : 그러면 더 혼났겠네요. 


♠ 숙 : 밤늦게 들어와서 고모한테 많이 맞았어요. 고모가 미워할 짓만 제가 골라서 했죠. 그때는 내가 이렇게라도 해서 매 맞는 게 고모의 관심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나 봐요. 제가 가만히 있으면 한 번도 내 이름을 안 불러줘요. 내가 말썽을 피우면 관심을 보이는데 그게 욕하고 때리는 거죠. 옛날 집에는 안방에 다락 같은 게 있었어요. 손님이 오면 거기 올라가라고 막 밀어서 올려요. 거기 미군 부대에서 나온 물건도 많고 먹을 게 많았어요. 그걸 먹고 놀다가 그냥 잠들어요. 손님이 가고 식구들 밥 먹을 땐 나를 불러야 하잖아요. 그런데 안 깨워요. 거기서 자고 다음 날 일어나죠. 자다가 깨서 막 울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리 고모도 혼자 아들 키우며 편물 하면서 먹고사셨는데 화풀이할 누군가가 나였던 것 같아요.


▶ 정숙님


♣ 헌 : 아버지랑 같이 산 게 아니셨군요.


♠ 숙 : 아버지는 강원도 묵호에 계셨고 나는 서울에 있었죠. 동네에 보광교회라고 있었어요. 사촌이 그 교회 유치원을 다녔는데 교회 안에 목사님 사택이 있어요. 내가 놀러 가면 목사님이 나를 목말 태우고 창문 너머로 유치원에서 애들 노는 걸 보여줘요. 그 장면을 평생 못 잊어요. 


♣ 헌 : 일부러 그러셨구나.


♠ 숙 : 그 목사님이 나를 굉장히 예뻐해 주셨어요. 고모네 집에 초등학교 5학년 말까지 있었어요. 


♣ 헌 : 그럼 이후엔 어디에서 살았어요?


♠ 숙 : 아버지가 강원도에 따로 사시다가 내가 4학년 때 재혼하시고 내 동생이 생겼죠. 6학년 때 강원도로 데리고 갔는데 눈도 많이 오고 엄청 추운 곳이에요. 그런데 저는 좀 태생적으로 명랑해서 서울에서 하던 짓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엄마에 대한 환상 같은 게 있었거든요. 내 친구들 엄마 보면 너무 좋아 보이잖아요. 


♣ 헌 : 에이 겉보기에 좋지요. 


♠ 숙 : 애들한테 다 잘하는 거 보고 나도 엄마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살아 보니까 콩쥐팥쥐 엄마였어요. 내 동생이 나랑 11살 차이가 나요. 그땐 4살쯤 된 아기였죠. 아침에 일어나면 동생 머리맡에 빵이 딱 한 개 있어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내가 먹어요. 예전에 절 키우던 고모는 먹을 거 갖고 차별 안 했거든요.


♣ 헌 : 그래서 빵을 계속 먹었어요?


♠ 숙 : 먹었죠. 그리고 뒈지게 처맞았어요. 네 거 아닌데 왜 먹냐고. 2년 정도 같이 살았는데 진짜 제가 평생 맞은 것보다 더 맞은 거 같아요. 옛날에 쇠로 만든 연탄집게가 있었는데 그걸로 맞아서 살이 찢어진 적도 있어요.


♣ 헌 : 진짜요?


♠ 숙 : 아버지가 대한석탄공사 영업소에 다니셨는데 격일로 집에 오고 어떤 때는 서울 출장 가요. 셋만 있는 날이면 난리 나죠. 아버지가 오셔서 ‘손 왜 그래?’ 물어보시면 넘어져서 다쳤다고 해요. 그러면 또 아버지한테 욕 바가지로 먹고 조심조심 다니라고 해요. 그럼 나는 ‘아버지! 조심해서 다녀도 전 넘어져요!’라고 대답했죠.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아버지가 왜 모를까? 넘어져서 다친 상처랑 맞아서 다친 상처는 다르잖아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아버지한테 말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헌 : 슬픈 이야기네요. 


♠ 숙 : 한번은 동생을 내가 밀었나 때렸나 그랬을 거예요. 어머니가 내 머리채를 잡고 동네 한 바퀴 돌았어요. 사람들이 다 욕했죠. 처음에는 소리 지르다가 나중에는 소리도 안 질렀어요. 아버지가 다니시던 성당 마당에 잔디밭이 있었어요. 거기 가서 혼자 많이 울었어요. 스무 살 때쯤 그 당시 일들을 아버지께 이야기했더니 전혀 모르시더라고요. 내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너를 친엄마 찾아서 보내줄 걸 내가 괜히 결혼했나 보다’ 하시더라고요. 


♣ 헌 : 완전 암흑기였네요.


♠ 숙 : 그 암흑기에도 굴하지 않고 이 명랑함을 잃지 않았죠. 하하 


♣ 헌 : 그럼 경기도 문산 쪽으로는 언제 온 거예요?


♠ 숙 : 묵호여중에 잠시 다니다가 아버지가 퇴직하시고 어머니 친정인 경북 울진으로 갔어요. 울진에서 누에 농장인가 했거든요. 중2까지 울진여중에 다녔어요. 그런데 사업이 잘 안되니 문산으로 온 거죠. 문산에 큰아버지 댁이 있었어요. 지금은 망했지만 큰 집이 당시엔 갑부였어요. 큰아버지가 오라고 했어요. 중2까지 다니다가 문산여중으로 전학 준비를 다 마쳤는데 아버지가 입학을 안 시켰어요. 그때 집 상황이 굉장히 안 좋았거든요. 


♣ 헌 : 큰아버지가 부자였다면서요. 


♠ 숙 : 그런데 생활비만 조금씩 줬지 크게 도와주진 않았나 봐요. 그때 우리집 진짜 패가망신한 것처럼 가난했어요. 그때 중학교 중퇴하고 이후론 학교에 못 갔죠. 문산에 살면서 둘째 동생이 태어났어요. 여동생이었는데 아기가 채 100일이 안 되었을 때 엄마가 가출해버렸어요. 그나마 집에 있던 돈을 다 가지고 갔어요. 아기 분윳값도 없을 정도로 굉장히 위기였죠. 그 여동생을 제가 키웠어요. 겨울에 벼를 다 벤 논에 물을 약간 넣어서 얼려요. 스텐 대야에 아기 기저귀를 넣고 새끼줄로 묶어서 웅덩이까지 끌고 가서 빨았어요. 사실 나는 약간 오기 같은 게 있어요. 아무도 안 보면 기어 다니면서 다 해요. 그런데 누가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해요. 누가 보고 있으면 창피한 거죠. 그때 우리가 산골 외딴집에 살았거든요. 거기서 일 년 조금 더 있다가 가출했어요. 17살에.


♣ 헌 : 새엄마 가출하고 나서 2년 정도 열심히 여동생 키웠는데 왜 가출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 숙 : 그건 아니에요. 가출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데요. 아버지가 왜정시대와 6.25를 거친 분이에요. 일제 강점기 때 학생 신분으로 일본 순사한테 잡혀가 고문당해서 한쪽 귀가 잘 안 들리셨어요. 그런 상태로 6.25 때 참전 용사이셨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약간 편집증 같은 게 있었나 봐요. 그때 우리 집에 농약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아버지가 조그만 밥상에다가 농약 한 병을 올려놓고 ‘너 나랑 죽자’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죽기 싫다고 했죠.


♣ 헌 : 아버지가 왜 그러신 거예요?


♠ 숙 : 본인이 살기 싫었던 거지요. 그런데 나랑 같이 죽지 않으면 죽을 수가 없었나 봐요. 다른 자식들은 어떻게 살겠지만 정숙이는 아니다 싶었던 거죠. 


♣ 헌 : 지금도 끊임없이 발생하는 발달장애인 가족과 당사자의 죽음이 떠오르네요. 


♠ 숙 : 아버지가 ‘이거 먹으면 너랑 나랑 내일은 편해질 거다’ 하시길래 ‘아버지, 죽기 싫은데 내일 생각해 봐요. 나 지금 졸려 죽겠어. 일단 자야겠다.’ 그러면서 그냥 잤어요. 매일 새벽에 아버지가 불 때고 밥해 먹을 나무를 하러 가거든요. 다음 날 새벽 아버지가 나무하러 간 사이에 무서워서 도망쳤어요. 그때 목발이 있었어요. 우리 집이 문산 당동리인데 문산 시내까지 나오려면 산을 하나 넘어야 해요. 한도 끝도 없이 걸어야 했어요. 혹시 아버지가 따라올까 봐 진짜 얼마나 빨리 걸었는지 몰라요. 문산 시내까지 왔는데 돈이 하나도 없잖아요. 큰 집이 시내에서 철물점을 해서 거기로 갔어요. 아침부터 웬일이냐고, 여긴 어떻게 왔냐고 하시더라고요. 아버지가 보냈다고 했어요. 그리고 큰아버지가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금고에서 1천 원을 꺼냈어요. 


♣ 헌 : 그 당시 천 원이면 지금 얼마나 되죠? 


♠ 숙 : 문산에서 서울 가는 기차 요금이 300원인가 했어요. 문산역 가서 차표 사고 돈이 많이 남았어요. 그걸 가지고 서울역에 왔어요. 서울역에서 빙글빙글 돌아다니다가 밤이 됐는데 갈 데가 없잖아요. 옛날엔 무작정 상경하는 이들이 많았고 서울역에 파출소 같은 게 있었어요. 들은 게 있다고 거기로 갔어요. 순경 아저씨가 일단 자라고 해서 거기서 하룻밤 있었어요. 그다음 날 기술 배울 수 있는 곳에 보내 달라고 했죠. 그때부터 이제 나의 서울 생활이 시작됐어요. 나를 부녀보호소로 보내더라고요.


♣ 헌 : 거기 감옥 같은 곳인가요?


숙 : 맞아요. 여자들 꽤 많았는데 진짜 무서운 언니들 많아요.


♣ 헌 : 그땐 목발 짚었나요?


♠ 숙 : 그때는 목발 아니고 그냥 절었어요. 목발은 서울행 기차 타면서 버렸어요. 목발 짚고 기차를 못 타겠더라고요. 평소에 목발 짚던 사람도 아니었고 다리에 힘이 좀 있어서 잘 걸었죠. 


♣ 헌 : 그 보호소라는 곳에 진짜 무서운 일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 숙 : 거기서 한 일주일 있었는데 언니들한테 많이 맞았죠. 왜 집 나왔냐고 묻는데 아버지한테 보낼까 봐 대답을 안 했어요. 대답 안 한다고 또 맞았죠. 부녀보호소에서 일주일 지나면 다른 곳으로 넘어가요. 일주일 뒤 은혜원이라는 곳으로 갔어요.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 18살이 되면 나와야 하거든요. 은혜원은 그 중간 기착점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기술을 배워서 취업하는 거죠. 


♣ 헌 : 한국 사회 초기 사회복지 서비스를 거치신 분이네요.


♠ 숙 : 은혜원 사감 선생님이 보호소에 와서 저를 보더니 데려가겠대요. 그곳에 갔는데 나만 장애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고아원에서 나온 청소년들이었어요. 거기서 십자수를 배웠는데 진짜 잘했어요. 은혜원에서 양재학원을 다녔어요.


♣ 헌 : 그래도 좀 자유롭게 해주었네요?


♠ 숙 : 은혜원 같은 곳은 원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서 사회에 내보내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기술을 배우게 했죠. 나는 노라노 양재학원을 1년 반쯤 다니면서 계속 옷을 만들었어요.


♣ 헌 : 지금도 여러 가지 잘 만드시고 부품 사서 구슬도 만들고 하시잖아요.


♠ 숙 : 저는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해요. 노라노 양재학원 수료하고 첫 번째 의상실 취업하러 갔다가 소금을 맞았어요. 양재협회 소장님하고 같이 갔는데 의상실 여자가 펄펄 뛰면서 여자에다가 안경 썼지, 장애인이지, 재수 옴 붙었다면서 굵은 소금 한 바가지를 뿌리더라고요. 그때 나는 그게 차별인지도 몰랐어요. 그냥 에이씨하면서 툭툭 털고 은혜원으로 다시 왔죠.


♣ 헌 : 그 당시 의상실 인력 구조는 어떻게 돼요?


♠ 숙 : 시다, 심부름, 미싱사가 있어요.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거죠. 의상실에서 옷을 만들어 팔잖아요. 나는 시다부터 시작했죠. 꼬마 심부름은 못 하지만, 손바느질하는 것부터 시작했죠. 여기서 제 이야기는 잠깐 멈추고 이제 승헌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고향이 어디예요?


♣ 헌 :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고향은 보통 어릴 적 자란 곳이라고 하잖아요. 경남 의령군 낙서면 내제리입니다.


♠ 숙 : 어린 시절은 행복했어요?


♣ 헌 : 우리 세대 어린 시절이 정숙님 세대처럼 암흑기는 아니었지만,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죠. 제가 3녀 1남 집안의 아들이거든요. 남존여비 사상이 경남은 더 심해요. 아들에게는 뭐든지 다 해주고 딸은 돈 버는 쪽으로만 생각하는 분위기였죠. 정숙님이 거의 후남이라면 난 귀남이로 산 거죠.


♠ 숙 : 귀남이로 살면서 마음이 어땠어요. 여동생과 누나랑 같이 살면서.


♣ 헌 : 아버지가 술 좋아하시고 스트레스를 집에서 풀다 보니 매일 저녁 집안이 시끌시끌했어요. 그때는 가출하고 싶었는데 정숙님 같은 용기는 절대 없었어요. 저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고 학교 다니면서 친구들 많이 사귀면서 컸어요. 


▶ 승헌님


♠ 숙 : 사춘기는 어떻게 보냈어요?


♣ 헌 : 사춘기도 평범하게 보낸 것 같아요. 누구나 한두 가지 집안 문제 있고 공부는 잘 안되고 그렇다고 아주 못된 그룹에 빠지지 않고 그냥 친구들끼리 좀 재밌는 것도 하고 그렇게 무사히 지냈어요. 우리 땐 ‘일진’도 없었어요. 애들끼리 싸우기는 해도 같은 반 친구들이 괴롭히진 않았거든요. 


♠ 숙 : 아버지 때문에 집안이 시끌시끌할 때 엄마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어요? 


♣ 헌 : 당시엔 아무 생각 없었죠. 다 커서야 엄마가 안쓰러웠었어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지금 딸들은 다 아빠 편이고 나만 엄마 편이에요. 지금도 누나들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자식들 성인이 될 때까지 아버지가 거의 가산을 탕진하고 연대보증 서서 없는 돈까지 다 날리고 이런 와중에 어머니가 장사하셨죠. 아버지는 놀고 어머니가 우리 업고 담배 가게부터 시작해서 진짜 엄청나게 고생하셨어요. 딸들은 그런 엄마를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이상하게 아빠를 더 안타까워해요. 오히려 제가 아빠보다 엄마를 정말 챙겨요. 하루에 한 번씩 꼭 전화해드리고 엄마가 무슨 일 있으면 무조건 제가 가죠. 전 누나들 생각이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워요. 


♠ 숙 : 난 왜 그런지 알아요. 남자는 끈 떨어지면 진짜 불쌍해 보이거든요. 그래서 딸들이 불쌍하게 여길 수도 있어요. 그런데 승헌님은 그런 집안에서 자란 것치고는 티가 전혀 안 나요. 마음속에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헌 : 우리 아버지가 아주 강골이에요, 미군 부대에서 포사격했던 분이고 훈장도 많이 받았어요. 한 대 맞으면 죽어요. 진짜. 저 고등학교 때 엄마 그만 때리라고 맞서다가 몇 대 맞고 쫓겨날 뻔했죠. 대들지 않으면 안 때리거든요. 그런데 제가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니 술 드시면 계속 잔소리하니까 그게 진짜 싫었죠.


♠ 숙 : 그래도 아버지가 대학교까지 보냈네요? 


♣ 헌 : 아들이니까 대학에 가야 한다는 거였죠. 큰누나가 대학 가려고 했는데 아빠가 절대 돈 안 준다고 해서 본인이 벌어서 갔어요. 작은누나는 아예 못 갔고, 여동생은 4명 중에 공부를 제일 잘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학에 보냈죠.


♠ 숙 : 그러면 승헌님은 사춘기 때 마음의 상처나 방황 같은 건 없었나요? 


♣ 헌 : 있었지만 뭔가 하고 싶어도 용기도 없고 무서움이 많았죠. 가출하고 싶다가도 밤이 되면 무서워서 들어왔어요.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 30년 넘게 살았거든요. 지금은 법적으로 5층 이상인데 그 당시에는 3층도 아파트였어요. 거기 옥상에서 뛰어내릴까도 많이 생각했죠. 고등학교 때 몇 번 올라갔는데 너무 무서워 내려왔죠. 하하.





♠ 숙 : 용기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 헌 : 그 시기엔 저뿐만 아니라 누구든 어려움에 맞닥뜨리면 죽을까 말까 고민했을 거예요. 그래도 미련이 있고 또 무서우니까 그런 선택을 못 하는 거죠. 


♠ 숙 : 대학교 생활은 어땠어요? 


♣ 헌 : 대학교 가서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를 알았죠. 완전 다른 삶을 보게 된 거예요. 대학의 자유로움, 내가 뭘 하든 아무도 터치하지 않아요. 물론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암흑이지만 다시 학교에 오면 공부든, 데모든, 친구들과 술 마시든, 모든 게 새로운 세계였어요. 누구나 나를 존중해주는 거예요.


♠ 숙 : 신세계가 열렸네. 참 좋았겠어요.


♣ 헌 : 그때부터 우울한 마음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 숙 : 지금 혼자 살잖아요. 언제부터 혼자 산 거예요. 


♣ 헌 : 너무 자유롭고 좋으니까 대학교 다닐 때 집에 거의 안 들어갔죠. 집에 가면 만날 엄마 아빠 싸우죠. 아빠 술 드시면 새벽까지 잔소리하시는데 온 동네에 다 들리거든요. 창피해서 절대 집에 안 가고 매일 학생회실이나 동아리방에서 잤어요. 돈 필요하면 낮에 잠깐 어머니가 혼자 하시던 식당에 들렀죠. 그 당시 연대에 다니는 친구가 있었어요. 사회 활동하던 친구였는데 제가 눈물까지 흘리면서 너희 집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죠. 그 친구가 방 두 개짜리 집에서 살았는데 방 하나를 저한테 줬어요. 그 집에서 4~5년 살았죠. 지금은 잘 연락이 안 되는데 그 친구가 정말 고맙죠. 그 후로 어머니가 돈 열심히 버셔서 신림동에 전세로 원룸을 하나 얻어주셨어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경비업 시작하시고 여동생이 사는 분당 쪽에 아파트를 하나 사게 된 거예요. 여동생이 애들 키우기 힘드니까 부모님이 그리로 이사 가신 거죠. 그러면서 원래 살던 집이 빈 거예요. 그 아파트에서 나 혼자 산 지가 벌써 10년쯤 되었네요.


♠ 숙 : 어려서부터 살던 집이 승헌님 집이 되었네요?


♣ 헌 : 그렇죠. 오랫동안 어머니가 정말 고생하셨어요. 지금은 아버지가 경비업으로 자리 잡으셨지만, 그전까지는 혼자 식당일 하시고 구로공단에 다니시고 골프장에서도 일하다가 공 맞아서 병원에도 가셨죠. 


♠ 숙 : 엄마 많이 챙겨주세요. 대학 다니면서 첫 데모에 나간 건 어떤 집회였어요?


♣ 헌 : 5.18 광주민중항쟁 관련 집회였어요. 94년부터 전두환 노태우 학살자 처벌 운동이 벌어지고 95년에 막바지였거든요. 그때 종로통 점거하고 누웠다가 백골단 뜨고 최루탄 날아오면 도망갔죠. 데모 나가면 참 무서웠는데 그래도 좋았어요. 선배들도 저를 잘 챙겨주고요.




♠ 숙 : 저도 그 광경 아주 많이 봤어요. 내가 87년도에 남편 만나서 살던 곳이 지금 방송대 건너편 연건동 골목 안이었거든요. 그때도 데모 무척 많이 했어요. 집까지 최루탄이 막 날아왔죠. 우리 집이 막다른 골목이었는데 학생들이 막 뛰어와요. 그러면 얼른 대문 열어줬어요.


♣ 헌 : 야, 좋은 분이었네요.


♠ 숙 : 치약 발라주고 그랬어요. 곧이어 경찰들이 대문을 두드리기는 하는데 집에는 못 들어오더라고요. 몇 년을 그랬어요.


♣ 헌 : 저는 그런 사람이 제일 좋더라.


♠ 숙 : 저도 연동야학 다녔던 옛날 가락이 있어서 나름 운동권이었거든요. 그러면 승헌님은 대학 다닐 때 계속 데모꾼으로 살았어요?


♣ 헌 : 처음에는 그냥 멋모르고 한 거죠. 그러다가 나중엔 신념, 의리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지금 돌이켜보면 뭔가 확고한 신념이라기보다는 내가 운동해서 한국사회를 바꾸고 우매한 사람들을 깨우치겠다는 소영웅주의에 좀 물들어 있지 않았나 생각도 해요. 


♠ 숙 : 졸업하고 추모연대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추모연대는 어떤 단체고, 어떻게 일하게 됐어요?


♣ 헌 : 추모연대는 열사를 추모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예요. 정숙님이 알만한 소속단체로는 박종철기념사업회, 전태일기념사업회 이런 단위가 모인 연대체죠. 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도 소속단체죠.


♠ 숙 : 저는 지금까지 장애인 쪽에만 추모사업회가 있는 줄 알았어요.


♣ 헌 : 노동, 학생, 통일, 장애 등 부문별로 다 소속되어 있어요. 추모연대 활동하면서 장애인 단체랑 연계를 처음 맺었죠. 그때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와 장애해방열사_단도 알게 됐죠. 추모연대에서 약 10년 정도 활동했어요. 


♠ 숙 : 추모연대 활동은 재미있었어요? 


♣ 헌 : 추모연대 들어가자마자 3일 뒤에 허세욱이라는 택시 노동자가 자유무역협정(FTA) 반대를 외치면서 하얏트호텔 앞에서 분신했어요. 소식을 듣고 바로 의장님이랑 그곳에 갔었죠. 추모연대 활동하면서 분신하고 자결하는 걸 자주 봤어요. 그 현장에 갈 때마다 엄청 무서웠죠. 이게 제가 학생 때 했던 운동하고는 또 다른 거예요. 여기서 제가 많이 배우겠다 싶어서 열심히 했는데 무서운 건 매번 마찬가지였어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동지가 분신하셨을 때와 서울역 고가 위에서 한 시민이 분신하셨을 때 그 시신 봤는데 꿈에도 잊히지 않았어요.


♠ 숙 : 그런 죽음을 10년 동안 보신 거예요? 


♣ 헌 : 그렇죠. 추모사업 일이니까요.


♠ 숙 : 무서워서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겠네요?


♣ 헌 : 오히려 이게 운동이구나 싶었죠. 그전까지는 연대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저는 운동을 뭔가 지원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연대 투쟁 현장에 가면 뭔가 힘을 주고 발언하고 앞에 가서 의쌰의쌰 싸우곤 했었죠. 그런데 추모연대 활동하면서 나 스스로 운동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생존이나 이런 운동을 지원한 거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 사람이 죽고 사는 현장에 있다 보니까 아주 다른 거예요.


♠ 숙 : 추모연대 활동하면서 진짜 운동권이 되셨네요.


♣ 헌 : 대학 2년 후배가 시각장애인이었어요. 지금은 전맹인데 그 당시에는 전맹이 아니었거든요. 당시 그 후배와 같이 학생 운동했지만, 편의 지원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문서를 확대해주지도 않았고, 그 친구가 밤에는 거의 못 보는데 대부분 새벽에 회의하면서도 전혀 배려하지 않았죠. 그 후배는 그냥 그렇게 사는 놈이고 우리는 ‘장애’라는 걸 전혀 몰랐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그 친구랑 대화하다 알게 됐죠. “형, 우리는 운동을 도와준 거지 연대한 건 아닌 것 같아”. “왜?” “장애인인지 몰랐다가 내가 실제 장애인의 삶을 살아 보니까 이것이 나의 삶이었는데 그동안 나는 나의 삶을 부정하면서 뭔가 운동을 지원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실제 내가 먹고사는 문제, 난 전맹이고 안마를 해야 돈 버니까 이런 거 하는 거 보면서 진짜 연대가 뭔지를 느꼈다”라고 하더라고요. 그 이야기 들으면서 ‘맞다, 내가 그동안 학생운동 이런 거 다 헛살았구나’ 이런 생각을 추모연대 활동하면서 깨달았어요. 그래서 전 학생운동할 때가 가장 부끄럽기도 해요.


♠ 숙 : 추모연대에서 10년 동안 활동하면서 제일 의미 있었던 일은 뭐예요?


♣ 헌 : 보통은 ‘추모’한다는 게 어떤 분이 돌아가시면 잠깐 기억하고 추모제 지내고 곧 잊히잖아요. 제가 일할 당시에 여러 추모·기념 사업회가 있었는데 단어 그대로 기념사업 정도만 하고 있었어요. 제가 추모연대 활동을 시작했을 때 김명운이라는 분이 의장을 맡고 계셨는데 이분이 구로동맹파업 출신이었어요. 그분이 이 조직을 투쟁 조직으로 바꾸려고 하셨죠. 투쟁으로 기억해야 한다면서요. 제가 얼떨결에 활동을 시작한 뒤 분신 투쟁 현장에 가서 연대 발언도 하고 같이 농성도 했죠. 쌍용차 동지들 무기한 단식 농성한다기에 같이 가고, 기륭전자 투쟁하니까 농성 지원도 했죠. 그러면서 ‘투쟁으로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야 한다’는 걸 배웠죠. 그러면서 깜짝 놀란 거죠. 그 당시까지 추모연대는 말 그대로 지지하고 후원하는 단체였는데 의장님이랑 같이 활동하면서 투쟁에 앞장서는 단체로 바뀐 거예요.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우려도 했어요. ‘왜 추모연대가 앞장서? 쟤네들은 뒤에만 있어야지’ 이런 말들이요. 


♠ 숙 : 그쪽도 그런 갈등이 있었군요.


♣ 헌 :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라고 열사 유족들이 모인 단체가 있어요. 이한열 열사 배은심 어머님, 전태일 열사 이소선 어머님, 박종철 열사 박정기 아버님 그리고 용산참사 열사 유가족, 이런 분들이 있는 조직이죠. 이분들께 같이 투쟁 현장에 가자고 제안했죠. 한 달에 한 번 전국의 농성장에 무조건 가는데 우리만 가지 않고 열사 유족과 같이 갔죠. 우리는 밥을 짓고 국을 끓여서 농성장에 가요. 투쟁하는 동지들과 밥 한 끼 먹으며 유가협 어머님, 아버님들이 그동안 어떻게 버텼는지를 이야기해주시죠. 투쟁 현장 노동자들은 그 신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고 고맙다고 말씀하세요. 그러면 열사 부모님들도 더 힘을 받아서 또 다른 투쟁 현장에 갔죠.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한 날’(고함)이라고 의장님과 약 5년 정도 했거든요. 이게 진정한 연대라는 걸 그때 깨우쳤죠. 그때가 가장 멋있게 활동하던 시기였어요. 


♠ 숙 : 추모연대 활동하다가 힘들 때도 있지 않았어요? 


♣ 헌 : 활동하면서 겁날 때도 많았죠. 가장 겁났을 때가 삼성전자서비스노조 최종범 열사 투쟁할 때였어요. 최종범 열사가 32살에 애 아빠이었는데 그 당시 서비스업 노동자들 환경이 거의 개차반이었죠. 그런데 노조를 만들고 투쟁하니 엄청난 압박과 파괴 공작이 심하잖아요. 결국 열사가 정동진에 가서 자결해요. 그러면서 투쟁이 불붙었죠. 그때 같이 농성했는데 너무 무섭고 그래도 투쟁하고 무섭고 투쟁하고를 반복했죠. 또 그 당시에 추모연대 내부적으로도 어떤 의견에 또 다른 의견이 있고 저도 뭔가 쳇바퀴 도는 삶에 젖어 들기도 했고요. 계속 여러 의견이 갈리면서 엄청 힘들었어요. 10년이면 많이 했다고 위안하며 활동을 정리하게 되었어요. 


♠ 숙 : 많이 힘드셨겠네요. 그러면 어떤 계기로 장판에 오게 된 거예요?

 

♣ 헌 : 추모연대 정리하고 몇 군데 활동을 고민하고 있는데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에서 일하던 선배가 제안하셨어요. 그리고 당시 박김영희 대표님은 장애해방열사_단 대표로 추모연대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셨기에 이미 잘 알고 있는 분이셨고요. 김성연 사무국장한테 연락이 와서 면접 보고 활동하게 되었어요. 


♠ 숙 : 장추련 활동한 지는 몇 년째죠?


♣ 헌 : 올해로 만 5년 됐습니다.


♠ 숙 : 아직 10년 되려면 멀었네요. 하하


♣ 헌 : 전 처음 장판 활동을 시작할 때 5년 정도 활동하고 그다음엔 장애인운동의 허리라고 생각하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고 싶었어요. 아까 정숙님 신림동 의상실 취업하려다 소금 맞은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이후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 숙 : 그 당시 의상실은 거의 다 시골에서 올라온 애들이 시다부터 시작해서 미싱사가 되는 과정을 겪기 때문에 집이 있어요. 잘 곳이 있는 거지요. 나는 난곡동에 있는 의상실에 취업했어요.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있었지만, 이 집에서 나를 채용해 줘서 어떻게든지 거기 붙어 있어야 했어요. 첫 월급이 5만 원이었어요. 


♣ 헌 : 몇 년도인데요?


♠ 숙 : 1980년이나 81년쯤일 거예요. 거기서 일하는 방식이 어떤 때는 밤 11시쯤 옷을 맞추러 와서는 내일 아침까지 해달래요. 그럼 밤 꼴딱 새는 거죠. 그렇게 일주일에 한 세 번은 밤새고 다음 날 저녁까지 일하곤 했어요.





♣ 헌 : 빡세네요.


♠ 숙 : 다리미질하다 보면 다림질 판이 이렇게 올라와요. 그런데 판이 올라온 게 아니라 내가 졸다가 머리를 판에 박은 거죠. 그런 경험 많았어요. 잠자리도 편하지 않아서 가게 소파나 가게 위에 원단 같은 거 넣어놓으려고 다락 같이 매어 놓은 데서 잤어요. 그러다가 쥐한테 엄지발가락을 물려 자다 깨서 울고 그랬죠. 1층이 의상실인데 지하가 술집이라 밤에 가게 문을 두들기면 엄청 무서웠어요. 일하는 애들이 다 여자애들이고 20살 미만이라 남자 사장님이 일주일에 한 번씩 교육했어요. ‘남자는 나만 믿어라, 누구도 믿지 마라’ 이런 식의 성교육 같은 걸 했죠. 


♣ 헌 : 어쨌든 남자는 믿지 말라는 교육이네요. 


♠ 숙 : 그 사장 남동생이 대학까지 나왔는데 학교 못 나왔다고 툭 하면 나를 무시해요. ‘너 이런 말 알아? 내가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데’ 이러면서 진짜 많이 무시했어요. 제가 또 그런 거는 못 참거든요. 그래서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찾기 시작했어요. 


♣ 헌 : 야간학교요?


♠ 숙 : 네. 그때는 인터넷이 없던 시대예요. 그래서 신문도 찾아보고 물어 물어서 종로구 연동교회에 야학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스무 살에 연동야학을 무작정 찾아갔죠. 그 당시 연동야학은 교수진이 좋았어요. 다 교인이면서 대학생들이고 무엇보다 건물도 좋고 학교 환경이 좋았어요. 그땐 학생도 많고 정규과정을 했어요. 중학교 1년 6개월, 고등학교 1년 6개월 과정을 정규 교사들이 와서 가르쳤어요. 


♣ 헌 : 정숙님은 당시 중학교 중퇴였죠?


♠ 숙 : 네. 그런데 저는 책을 많이 읽었어요. 장애가 있는데 뭐 물어볼 때 대답도 못 하면 얼마나 나를 더 무시하겠나 싶어서요. 아무튼 연동야학에 다니기 시작했고 교회에도 나갔죠. 그런데 그러려면 직장을 그만둬야 했어요. 


♣ 헌 : 밤에 일을 못 하니까요?


♠ 숙 : 밤에 일도 못 하고 신림동에서 혜화동까지 다니기가 힘들었죠. 83년 3월에 야학에 입학한 뒤 공장에 들어갔어요. 성수동에 있는 공장인데 거기 진짜 무서운 동네였어요. 길거리에 나가면 작업복 입은 남자들밖에 없어요. 그때는 제가 목발을 짚었는데 길이 질퍽질퍽해서 걷기도 힘들었어요. 너트 조립 공장이었는데 제가 손으로 하는 거는 잘했거든요. 조립은 진짜 잘했는데 조립 끝나면 들고 옮겨야 해요. 조립할 부품도 내가 가져다가 놓아야 하고요. 사장님이 어떤 남자 사원을 하나 붙여줘서 나르는 것만 해주라고 했죠. 나는 다른 사람보다 좀 빨리하니까 많은 양을 했어요. 


♣ 헌 : 역시 손재주는 있으셨구나.


♠ 숙 : 저녁 6시에 야학을 시작하니까 5시 반에 끝내고 나와요, 연동야학은 수업이 많아서 밤 10시 반에 끝나요. 다시 기숙사로 들어가면 거의 자정이에요. 성수동에서 한 달 정도 있었는데 남자가 여자 기숙사를 들락날락하는 거예요. 같이 있던 언니들한테 남자가 왜 막 들어오냐고 했더니 ‘원래 그래. 괜찮아’ 이래요. 난 너무 무섭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나 혼자 있는데 남자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막 소리소리 질렀죠. 그랬더니 ‘너 그러다 맞는다’ 그래요. 그래서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냐고 막 소리 지르니까 그 사람이 나갔어요. 그리고 공장 그만뒀어요. 이 일을 교회에 와서 목사님한테 얘기했더니 압구정동 한양아파트에 사는 어느 장로님을 소개해줬어요. 제가 그때 처음으로 아파트에 살아봤죠. 


♣ 헌 : 그런 과정을 겪으며 교회에 대한 선망이 생기셨겠네요. 


♠ 숙 : 그 집 권사님 여성분하고 저랑 엄마 맺어주는 거를 해줬어요. 그 집에 가서 먹고 자면서 남대문시장에서 새벽 장사를 했어요. 새벽 3시쯤 시장에 가서 아침 장사하고 저녁 5시까지 있다가 연동야학에 가서 공부하고 압구정동 집으로 가곤 했죠. 그때는 내가 버스를 타고 다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어떻게 버스 타고 다녔는지 모르겠어요. 몇 년을 그렇게 일했죠. 그런데 버스 타고 다니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 후로 중화동에 있는 청바지 만드는 공장에도 잠깐 다녔는데 월급을 거의 택시비로 다 써버리니 안 되겠다 싶어서 그만뒀어요. 연동교회에 신협이 있어요. 교인들은 연대보증으로 대출받을 수가 있어요. 거기에서 1천만 원 대출받아서 충신동에 방을 얻었어요. 연동교회 바로 건너편에 방을 하나 얻었어요. 


♣ 헌 : 와, 최초로 집을 쟁취하셨구나. 그때 남편은 뭐 했어요?


♠ 숙 : 남편은 아직 못 만났죠. 거기 살면서 옷 만드는 회사에 취직했어요. 미싱사까지 5명이 팀을 짜서 들어가는 회사 샘플실에 들어갔어요. 그 당시 연동야학 다니면서 노동법을 배웠어요. 운동권 대학생들이 교사니까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술도 많이 먹고 해방신학 이런 책으로 공부도 하고 마르크스주의도 공부했죠.


♣ 헌 : 운동권이셨네요?


♠ 숙 : 동대문에 있는 공장에 들어갔는데 사장이 고대 경제학과 출신이었어요. 한참 다니다가 내가 남들보다 월급을 반만 받는다는 걸 나중에 알았죠. 그때 내가 하는 일은 손바느질 ‘마도매’라 그래요. 미싱에서 막 쏟아져 나온 옷을 마무리하는 거죠. 밑장 꿰매고, 속 꿰매고, 옷마다 방법이 다르거든요. 나는 의상실 일부터 배웠기 때문에 어떤 옷이 와도 다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손이 빠르니까 다른 사람보다 장수를 많이 뽑는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회사 특징이 각자 받는 월급이 얼마인지 모르는 거였죠. 어느 날 다른 사람 이야기를 옆에서 듣게 되었어요. ‘어? 나는 쟤들보다 반밖에 못 받네?’ 사장실에 쳐들어갔죠. ‘노동법에 이렇게 나와 있다. 내가 더 일을 잘하는데 걷지 못한다는 이유로 월급을 반만 받는 건 부당하다. 시정해달라, 안 그러면 나 그만두겠다’ 그랬어요. 사장이 어이가 없었나 봐요.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왔어?’ 이래요. 그래서 나 사장님 보러왔다고 했죠. 결과적으론 월급을 그냥 올려줄 수는 없고 부서를 샘플실로 옮겼어요. 샘플실은 굉장히 꼼꼼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샘플실은 사장님이 근무시간을 조정해 줄 수가 없고 미싱사가 오야봉이에요. 그런데 미싱사가 근무시간 조정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야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 헌 : 돈 벌어야 해서 공부를 그만두셨구나.


♠ 숙 : 거기 한 1년 다니면서 방송통신대 가려고 혼자 검정고시 야학 다니며 다섯 과목인가 합격했어요. 그 시기에 친구 소개로 남편이 있는 회사로 가게 된 거죠. 미도파백화점에 납품하는 블라우스 생산 공장이었어요. 거기서 내가 했던 일은 검품이었죠. 제품이 나오면 마지막에 치수 재고 실밥 다 뜯고 잘못된 거 있으면 다시 반품시키는 일이에요. 그렇게 완제품을 만들어서 새벽에 나가는 거예요. 매일 밤 12시까지 일했어요. 낮에는 조금 한가한데 오후 5시께 옷이 쏟아져 나오면 아주 바빠지죠. 그런데 그 회사가 우리 남편의 육촌 형님이 사장이었어요. 우리 남편은 시골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됐죠. 


♣ 헌 : 어? 낙하산이네요? 


♠ 숙 : 네. 낙하산 탄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었어요. 거기 들어갔는데 언니들이 내가 만약에 저기 김 선생한테 말을 걸어서 김 선생이 대답하면 돈을 주겠다는 거예요.


♣ 헌 : 지금 남편분이 당시 김 선생이었군요?


♠ 숙 : ‘근데 저 사람 벙어리다’ 막 이래요. 무슨 소린가 했더니 내가 들어갔을 때까지 김 선생 목소리를 들어본 사람이 없었어요. 말을 안 해서. 그래서 나보고 막 그렇게 놀린 거였어요. 그래서 내가 가서 막 찝쩍거렸죠. 하하


♣ 헌 : 어떻게 찝쩍댔는데요?


♠ 숙 : 내가 옆에 가서 ‘김 아저씨~ 왜 말 안 해? 김 아저씨 말 못 한다매~~’ 막 그랬어요. 내가 그때 키가 150cm에 허리가 23인치였어요. 나중에 우리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키도 조그만 게 너무 말라서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하고 건들건들하면서 아주 눈빛만 살아서 당당하게 얘기를 하니까 깜짝 놀랐대요. 뭐 이런 게 다 있나 했대요. 그 남자는 충남 공주에서 올라와서 여자 한 번 사귀어보지도 않았고요. 


♣ 헌 : 낯부끄러워서 사람들과 얘기도 못 나눴군요.


♠ 숙 : 그런 착한 사람을 제가 망쳐놨죠. 그렇게 87년도에 만나서 88년도에 딸을 낳았죠. 


♣ 헌 : 만나자마자 사고 치신 거예요?


♠ 숙 : 한 1년 동안 사귄 거나 마찬가지죠. 밤 12시 반쯤 일 끝나면 택시도 잘 안 잡혀요. 그런데 창신동에서 충신동 집까지 오려면 이대병원 쪽 언덕이 있어요. 택시도 안 잡히니까 거의 한 달 동안 매일 나를 업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정들었죠. 업혀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어요. 


♣ 헌 : 아니 업고 왔는데 왜 애가 생기냐고요. 하하


♠ 숙 : 그때 내가 연동교회에 열심히 다닐 때였는데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다니던 언니가 있었어요. 그 언니랑 내기했어요. 그 언니도 그 사람이 너무 착하니까 교회에 다니게 하고 싶어 했거든요. 여의도 순복음교회냐 연동교회냐로 둘이 내기했어요. 저 진짜 열심히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 사람을 우리 교회로 데려가면 저한테 배필을 주신 걸로 알겠습니다.’ 둘이 열심히 기도했는데 이 사람이 연동교회로 왔어요. 


♣ 헌 : 약간 시혜와 동정적이네요. 


♠ 숙 : 저는 그 당시 혼자 몸도 건사하기 힘든데 장애인 둘이서 살기는 힘드니까 결혼은 비장애인하고 하거나 아니면 혼자 살겠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이 젊었을 때 좀 예뻤거든요. 제가 비장애인 남자를 데려가니 교회에 난리가 났어요. ‘결혼할 사람이야? 애인이야?’ ‘아니에요. 전도에요 전도!’이랬는데 사고를 친 거죠. 사고를 왜 쳤냐? 정이 드니까요. 이 사람이 무척 착한 사람이니까 내 얘기를 많이 들어주며 애인이 된 거죠. 그런데 시댁에서 반대할 게 확실하니 허락받으려면 같이 살아야 하는 거죠. 


♣ 헌 : 그래서 같이 살게 된 거예요?


♠ 숙 : 우리 자취방에서 동거를 시작했죠. 그러면서 딸을 임신했는데 시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전화가 왔어요. 남편이 고향엘 갔는데 3일이 지나도 안 와요. 그땐 핸드폰도 없으니 남편한데 연락해볼 방법도 없었어요. 알고 보니 시아버지가 아픈 게 아니었어요. 남편이 선보는 자리였고 그때가 마침 농번기라 농사일을 며칠 해주고 온 거였어요. 선본 아가씨는 미용실인가 하는 여자였는데 남편이 솔직히 얘기했대요. 서울에 아내가 있다고요. 


♣ 헌 : 와 멋쟁이시네요.


♠ 숙 : 우린 결혼식은 못 했고 친구들 몇 명하고 목사님 앞에서 언약식만 했어요. 목사님이 부모님이 없이 결혼식을 올리는 건 나중에 상처가 된다고 하셨어요. 혼인신고만 했죠. 그런데 이 사실을 형수가 알게 됐죠. 시골에서 남편 여동생하고 시아버지께서 봉투를 들고 오셨어요. 


♣ 헌 : 돈 봉투요?


♠ 숙 : 그때 우리 딸 임신 8개월이었는데 산부인과에 가재요. 내가 그건 살인이라고 했더니 아버님이 산부인과에 알아봤대요. 그래서 아들 데리고 가시라고 했어요. 그리고 남편 회사에 전화했어요. 빨리 오라고.


♣ 헌 : 아들이 몇 째예요?

 

♠ 숙 : 장남이에요. 외아들. 저도 남편이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했는데 단호하게 아버지께 가시라고 하더라고요. 아버님이 ‘내가 이대로 가면 너랑 인연 끊는다, 호적에서 판다’고 하시니까 파래요. 아버님하고 시누이가 ‘우리 착한 아들이 저런 적이 없는데’ 막 이러더라고요. 


♣ 헌 : 영화 찍었네요. 


♠ 숙 : 그 당시 자취하다가 둘이 합치면서 대학로로 이사 왔던 때죠. 방송대 건너편 단칸방에서 시작했어요. 연탄 때고 석유곤로 때며 살았어요. 아버님 가고 얼마 있다가 딸을 낳았어요. 그때 정말 돈이 없었는데 응암동인가에 도티병원이라고 있었어요. 거기는 공짜였는데 무조건 제왕절개였죠. 제가 다니던 고대병원 산부인과 선생님이 내가 태생적으로 한쪽 골반이 작아서 자연 분만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했어요. 출산하려고 도티병원에 가는데 언덕이 엄청 가팔라요. 배가 엄청나게 나왔는데 택시비가 없으니까 남편이 그 언덕을 업고 올라갔다니까요. 내 배가 이렇게 눌린 채로. 


♣ 헌 : 이렇게 뒤로 업었어야지요.


♠ 숙 : 제왕절개로 딸을 낳았어요. 병원 들어갈 때 보니까 헌금함이 있어요. 돈이 없어서 막 기도했죠. 그땐 진짜 간절했어요. 그런데 다음 날 목사님이 와서 돈 봉투를 딱 주시는 거예요. 50만 원. 이렇게 멀리 와서 아기 낳았냐고 하면서요. 그거 다 헌금함에 넣고 왔어요. 


♣ 헌 : 진짜요? 그 당시면 꽤 큰돈일 텐데.


♠ 숙 : 그러니까요. 그래서 지금도 돈을 안 모으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신기한 게 남편하고 생각이 똑같아요. 이건 내 돈 아니다. 이거 하나님이 주신 돈이니까 여기 주고 가자. 


♣ 헌 : 캬~


♠ 숙 : 아기 낳고 대출받아서 방 옮기고 다 갚으면 또 대출받아서 방 옮기고 그랬죠. 남편이 잠깐 공장도 했었어요. 내가 그 공장에서 일했죠. 아들 가람이가 안 생겼으면 공장을 계속했을 거예요. 근데 가람이가 생기면서 내가 일을 못 하니까 한 사람 월급 주기가 힘들잖아요. 새로 사람을 고용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공장 문 닫고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 헌 : 어떤 일이요?


♠ 숙 : 재단사요. 여기 대학로에 정착하고 살면서 계속 일했어요. 내가 일 안 하면 못 사는 성격이에요. 봉제 일 하다가 다리가 너무 아파 미싱일을 하는데, 다리를 한쪽만 사용하니까 그것도 못 하겠더라고요. 아무튼 결혼 이후 제 삶은 평탄했어요. 단, 아이들 문제에서만 내가 조금 주눅이 들었죠. 교회 갈 때면 남편이 제 옷 다 다려서 입혀주고 애들 옷도 전부 다려서 깨끗이 입혀요. 왜 그렇게까지 힘들게 하냐고, 그냥 아무거나 입고 가자고 하면 안 된대요. 장애인 엄마 둬서 애들이 저렇게 지저분하다는 소리 들으면 안 된다며 팬티까지 다 새로 입혔어요. 딸 낳고 시댁에서 저를 며느리로 인정했거든요. 시아버지가 명절에 오는 저를 위해 식탁을 샀어요. 그런데 시어머니는 식탁 놔두고 밥상을 꼭 안방에다 차려요. 제가 한 10년 동안 시댁만 다녀오면 앓아누웠어요. 그래서 딱 10년 지난 다음부터 안 간다고 선언했죠.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아버지 돌아가시고 새어머니랑은 왕래가 거의 없죠. 


♣ 헌 : 분위기를 조금 바꿔 볼게요. 2003년에 월간문학21에 시 부문으로 등단하셨네요? 글쓰기는 언제부터 관심이 있으셨나요? 


♠ 숙 : 초등학교 때부터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내가 묵호동호국민학교로 전학 갔거든요. 거기 글짓기반이 있었는데 따로 훈련 시켜서 강원도대회에 나가요. 그 대회에 나가서 장려상 받았어요. ‘장독대’라는 시로요. 


♣ 헌 : 아까 들어보니 2, 30대가 파란만장했는데 이때도 글쓰기는 계속하신 거예요?


♠ 숙 : 그럼요.


♣ 헌 : 교회와 야학 다니기도 바쁘셨을 텐데.


♠ 숙 : 야학 다니면서도 글 계속 썼어요. 가출하고 이후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이야기를 ‘빛과 소금’이라는 곳에 써서 원고료도 받았어요. ‘샘터’라는 책에도 제 글 많이 실렸고요. 


♣ 헌 : 아, 시만 쓴 게 아니었군요?


♠ 숙 : 산문도 썼어요. 한겨레신문 시민 참여 시에도 제 시 실렸고요. 


♣ 헌 : 필명 ‘정천’(靜天)은 무슨 뜻이에요?


♠ 숙 : 가람이가 지어준 거예요. 제가 등단하면서 가람이한테 ‘엄마 필명 한문으로 하나 멋있게 만들어줘’ 했더니 ‘정천’이라고 지어줬어요. 그때 초등학생 가람이가 한참 한문에 빠져서 9급 시험에 합격하고 8급 보고 그랬을 때예요. 정천은 ‘고요한 하늘’이라는 뜻이죠.


♣ 헌 : 정숙님이 고요하지는 않은데....

 

♠ 숙 : 하하. 그래서 나의 필명은 고요한 하늘이에요.


♣ 헌 : 아들의 바람이 있었던 거군요. 하하 


♠ 숙 : 그 뜻이 너무 좋더라고요. 저는 밤에 글을 많이 썼는데 몇 년 쓰다가 그만뒀어요. 제가 밤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새벽 3시, 4시까지 쓰니까 남편이 글쓰기는 취미로 하래요. 밤에 쓰지 말라고. 그런데 낮에는 잘 못 써요. 낮에는 한 꼭지 생각만 했다가 밤에 그걸 정리해서 쓰죠. 그걸 또 고치고 고치고 하면서 한 달에 열 편 이상씩은 썼거든요. 낮에는 일해야 하니 쓸 시간도 없어요. 그러니까 밤에 잠도 못 자고 쓰는 건데 남편 보기에 좀 그랬나 봐요. 집은 좁은데 밤에 불 켜놓고 컴퓨터 켜놓고 앉아 있으니까요. 그런데 취미생활로 쓰라는 남편 말에 열이 확 받더라고요. ‘글 쓰는 게 피를 말리는 작업인데 이걸 취미로 쓰라고? 우씨 안 한다 안 해’하면서 그때부터 안 쓰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자다가 어떤 한 구절이 딱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서 머리맡에 놔둔 종이에 쓰고 자요. 불 켜는 거 남편이 싫어하니까 깜깜한 데서 그냥 막 써요. 아침에 일어나서 그걸 정리해서 한 줄을 딱 뽑아놓죠. 그리고는 며칠 생각해서 한 번에 쫙 써버려요. 그런데 잘 쓰는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그 당시의 내 느낌, 내 생각을 쓰는 건데 잘 쓰든 못 쓰든 그냥 쓰는 거예요.

 

♣ 헌 : 결혼도 하고 글도 쓰면서 안정적으로 생활하시다가 갑자기 왜 2013년에 노들야학에 입학하신 거예요?

 

♠ 숙 : 제가 시 문단 쪽에 들어와서 보니까 문인들 학력이 어마어마해요. 저만 국졸이에요. 방송통신대 다니려다가 남편 만나면서 때려치웠죠. 시인들 모임 동인에 가면 술 먹고 밤에 늦게까지 이야기 나누곤 했어요. 문학회에도 들어가 있었죠. 그런데 그런 모임에 나가면 저는 누구 라인이 없는 거예요. 


♣ 헌 : 아, 그쪽 계통도 라인이 있어요?


♠ 숙 : 출신 학교도 없지, 선배도 없지, 아무것도 없이 어디서 뜬금없이 이상한 애가 쑥 들어와서 글 쓴다고 그러니까요. 그 동인에서 만난 어떤 사람이 나한테 솟대문학이라는 곳에 가보래요. 나는 그때까지 장애인 문학 같은 건 전혀 몰랐거든요. 내가 속으로 ‘장애인이니까 장애인들끼리 하는 데로 가서 놀라는 거야?’ 생각하며 열 받았죠. 그래서 ‘제 글이 마음에 안 드세요?’ 물었더니 글은 잘 쓰는데 더 잘 쓰기 위해 거기서 같이 어울려보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그래도 시집도 낸 사람이었거든요. 알았다고 하고 그다음부터 그 모임에 안 나갔어요. 그 당시에 제 글을 봐주는 분이 계셨어요. 글도 잘 쓰시고 명성도 꽤 있는 분인데 지금도 저를 격려해주시죠. 그분은 내 학력이나 장애 같은 거 문제 삼지 않더라고요. 국문학과 나왔다고 글 잘 쓰는 거 아니라며 시 공부는 대학 가서 하는 거 아니라고 이야기해주셨죠. 저한테 제대로 가르침을 주셨어요. 


♣ 헌 : 좋은 선생님이셨네요. 


♠ 숙 : 그분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서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그 당시 제가 다녔던 연동야학이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인터넷으로 장애인 야학을 찾아봤지요. 그때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길만 건너면 노들야학이더라고요. 사실 제가 옛날에도 검색해봤었는데 그때는 정립회관에 있었어요. 너무 멀어서 다닐 수가 없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너무 아쉬워요. 그때 갔었어야 했어요. 그때 갔으면 이 장애인운동의 역사에 저도 함께했을 거잖아요. 그랬으면 얼마나 행복했겠어요.


♣ 헌 : 아, 진짜 아쉬우신가 봐요? 


♠ 숙 : 2013년에 노들야학에 입학했는데 사실 11년도에도 6개월 동안 특활반에 잠깐 다녔었거든요. 그때 조사랑 선생님하고 상담했었나 봐요. 2년 만에 전화해서 ‘검정고시 시험 보고 싶은데 거기서 공부하면 돼요?’했더니 ‘어머 정숙 언니세요?’ 이러는 거예요. 기분이 무척 좋더라고요. 무조건 오래요. 그래서 정식으로 입학했죠. 처음 노들에 왔을 때 깜짝 놀랐어요. 전동휠체어를 처음 봤거든요. 


♣ 헌 : 아, 그땐 스쿠터 안 타고 다니셨어요?


♠ 숙 : 걸어 다니다가 발가락 다쳐서 수동휠체어 탔었죠. 노들야학에 다니면서 ‘버스를 타자’ 영상을 보고 펑펑 울었어요. 2001년 오이도역 사고 난 다음에 장애인들이 지하철 선로에 내려가서 데모하는 걸 밤 9시 뉴스에선가 봤거든요. 그 당시에 남편이랑 그 장면 보면서 ‘장애인들이 저길 왜 내려가. 저거 누가 시켰을 거야. 돈 주고’ 이렇게 얘기했어요. 불순 세력이 시켰을 거라고. 근데 영화에서 그 장면을 보고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노들야학에 다니면서 박경석 전 교장선생님 수업을 들었거든요. 그때 제가 그 얘기를 했다니까요. 버스를 타자 보면서 울었다고. 지금도 보면 눈물이 나요. 그러면서 내가 좀 더 빨리 장애인운동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죠. 

 

♣ 헌 : 정말 아쉬우신가 보군요.


♠ 숙 :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내가 학생운동 하는 사람들한테 끼어서 눈치 보고 동정받아 가면서 운동하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장애인운동을 그때부터 했으면 비굴하지 않고 얼마나 떳떳하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저한테 이렇게 대하는 건 차별이고 동정이고 시혜라는 걸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돌이켜보면 지금도 교회에서는 저를 구제의 대상으로 봐요. 그리고 어떤 때는 진짜 구제받고 싶어서 제가 더 불쌍하게 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구제의 대상으로 나를 바라보는 교인들의 ‘내가 너를 도와준다’라는 ‘만족감’이 얼마나 혐오고 차별이었는지를 여기 와서 배운 거죠. 그전까지는 교회에 안 가면 큰일 나는 줄 알았죠. 교회가 나의 생명이라고 여겼죠. 저는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라 교회에 의지한 거였어요. 그러다가 노들야학에 오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렸고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거죠. 그래서 노들에 오면서부터 저는 이제 한 살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활동한 지 10년도 안 되었으니 아직 멀었어요. 저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라도 운동권 선배들이 무척 존경스러워요. 


♣ 헌 : 많은 깨달음이 있으셨구나.


♠ 숙 : 승헌님은 장추련에서 5년을 활동했는데 어느 때 가장 보람이 있었나요. 그리고 장추련 활동을 언제까지 하고 싶은지도 얘기해 주세요.


♣ 헌 : 장추련 활동은 무척 재미있고 긍지 있죠. 실제 장애인 당사자 또는 정책 제도 개선에 도움이 되니까요. 좋았던 기억이 무척 많은데 어떤 때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거나 안 될 때도 있어요. 정말 뭔가 뜻깊고 긍지가 있으면 막 힘이 솟다가도 어떤 상담에서 감정이 훼손되거나 잘 안됐을 때는 정말 기운이 처지죠. 또 장추련에는 늘 활동가가 부족해요. 이 문제는 예산 부족으로 연결되는데 내부에서 문제 제기하고 반문도 해보지만, 답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돈이 있으면 다 해결될까 이런 생각도 들고요. 원래 들어올 때 목표는 3년이었고 지금 5년째니까 이제는 장애인 당사자를 더 가까운 곳에서 지원하는 자립생활센터 현장에서 장추련에서 배웠던 걸 보람 있게 쓰고 싶어요. 좀 더 세밀하게 배우고도 싶고요.

 



♠ 숙 : 지금 우리나라에는 국가가 운영하는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있잖아요. 장추련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뭐라고 생각해요? 


♣ 헌 : 장추련의 전신인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가 현재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모태인 장애인이동권연대를 비롯해 수많은 다른 장애인단체들이 모여서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만들었고 그 의미와 성과는 엄청나죠. 어쨌든 장애인 당사자를 지원하는 현장 권리 운동 조직으로 남고자 했던 목표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활동해왔죠.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만들었던 성과들이 많이 법제화했는데 이제 그 성과를 좀 더 전진시켜야죠. 반문해보면 제도권 안에 체제내화하면서 우리가 늘 공무원 조직 보면서 얘기했지만, 장애인의 삶에 대한 지원이나 권리 업무가 좀 더 성숙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렇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장추련이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봐요. 또 서로가 거울이 될 수 있기에 장추련 또한 권익옹호기관을 비판하거나 비난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조직의 역할을 강화하는 역할도 해야 하죠. 그 과정에서 전장연 같은 조직들이 함께 힘을 모아주었기에 여기까지 온 거고요. 그런데 운동의 대의적 측면과 큰 성과에 비해 그 조직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고민이 많죠.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활동 5년이면 터닝포인트를 찾고 싶은데 이 역할 또한 여기서 멈추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고민이 많은 거죠. 또 장기적인 조직 전망도 더 좋은 환경에서 해나갔으면 좋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고, 우리 운동판의 요구는 항상 점점 더 커지고 있고, 이런 부분들이 늘 고민이 됩니다. 


♠ 숙 : 말씀하신 부분은 많은 단체가 고민하는 지점인 듯해요. 


♣ 헌 : 네, 맞아요. 정숙님은 최근에 사무실 옮기셨잖아요. 옮긴 곳은 마음에 들어요?


♠ 숙 : 언제나 이사하면 힘이 들죠. 환경은 마음에 드는데 아직 공사가 덜 끝나서 화장실을 5층으로 계속 다녀야 하는 것도 조금 힘들고요. 그래도 뭐 장소가 중요하진 않아요. 언제나 마음가짐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 헌 : 저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고 해서 그다음에 의미 있는 발언을 할 줄 알았어요. 윤석열 당선인이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했는데.... 하하 


♠ 숙 : 장소가 어디든 나는 노들법인에서 장애인 활동지원사 양성 교육기관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자긍심이 있고 인정받고 싶어요. 노들 교육은 다른 교육기관하고는 달리 거의 현장 활동가들이 강사잖아요. 교육받은 사람들도 그걸 느끼죠. 그래서 우리는 거의 90%가 소개예요. 전화 오면 여기서 배우신 분이 소개해줘서 신청했대요. 어머니가 배우고 아들을 보낸다든가 남편을 보내요. 사는 곳에서 여기가 좀 멀다고 말씀드려도 여기가 좋다면서 다니고 싶대요. 우리가 활동지원사 양성 교육을 하지만 철저하게 현장의 소리를 들려주거든요. 장애인운동이 어떻게 일어났고 진행해왔는지를 다 알려주죠. 어떤 분들은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왜 이렇게 많은지 궁금했는데 장애인들이 데모해서 생겼다는 걸 처음 알았대요.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수료생들이 많이 줄었지만, 그전에는 일 년에 약 2~3천 명씩 거의 총 만 명이 넘었죠.


♣ 헌 : 노들교육기관에서만요?


♠ 숙 : 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교육받으시는 분들 나이대가, 생각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60대 이후 분들이 약 80% 이상이거든요. 이분들이 교육받고 나서 자기가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다시 보게 됐고, 이제 장애인분들 데모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고 말씀하세요. 그분들이 다 장애인인권 교육받고 가는 거잖아요. 사람은 망각의 동물인데 5일 동안 장애인 인권과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듣고 동영상을 계속 보거든요. 그리고 그 동영상에 나온 사람이 강의하고요. 그래서 저는 전 국민 개조에 노들 활동지원사 교육이 일조한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 헌 : 정숙님의 삶과 제 삶이 약 15년의 차이가 있잖아요. 오늘 서로 인터뷰하면서 장애인 당사자의 삶과 옆에서 보거나 지원했던 삶으로서의 차이점이 있었는데 마지막에 이어지는 지점이 하나 생겼네요. 제가 장추련 활동을 그만둔 뒤 꼭 해보고 싶었던 게 활동지원사 코디네이터 일이었거든요. 


♠ 숙 : 아, 그렇군요. 왜 코디 일을 하고 싶으세요? 


♣ 헌 : 왜냐하면 활동지원사가 제대로 지원한다면 어떤 장애인 당사자 한 사람의 삶에 큰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장애인 당사자의 권리를 올곧게 세워내는 조력자 역할로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와 더불어 활동지원사 또한 한 사람의 노동자거든요. 그래서 이 노동의 권리와 이용인의 권리가 서로 윈윈할 방법을 항상 고민해요. 지금은 양쪽의 권리를 이야기하면 상충하거든요. 때때로 서로를 비난하기도 하죠. 뭔가 장애인 단체를 자본화 취급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구조가 있거든요. 방금 정숙님이 말씀하셨듯이 교육기관이 장애 인식 개선 운동의 역할을 하고 또 교육받은 활동지원사가 지원을 통해 장애인 당사자의 권리를 세워내는 것에 대한 사명이나 직업적 윤리 의식을 높여낸다면 저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 숙 : 중요한 지점이네요. 그런데 일하다 보면 제가 조금 불친절하다는 말도 들어요.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니까 활동지원사 일을 단지 돈벌이로만 생각하고 오는 사람이 보여요. 


♣ 헌 : 당연히 그럴 수도 있죠. 직업이니까요. 


♠ 숙 : 네. 직업으로만 생각하고 오시는 것도 충분히 인정해요. 그런데 돈벌이로만 생각하시는 분들은 공부에 임하는 태도가 딱 보여요. 시간만 때우고 가려는 모습이요. 반면에 무척 진지한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위안 삼죠. 


♣ 헌 : 요즘 힘들거나 고민거리는 어떤 점인가요? 


♠ 숙 : 나이 듦에 관한 거예요. 더 열심히 일하고 싶은데 나이 먹으니까 기억도 깜빡깜빡하고 기력도 달리고 지병도 좀 심해지는 것 같아요. 


♣ 헌 : 지병이 있으세요?


♠ 숙 : 당뇨랑 고혈압이 있어요. 오늘도 병원에 갔다 왔는데 너무 피곤하면 약도 더 늘어나요. 제가 63살인데 70살까지만 일하고 싶어요. 그런데 할 수 있을까 고민이 있어요. 몸이 아프니까 일하다 실수할까 봐 또 고민이 되죠. 요즘에는 교육기관 교육생이 적어서 걱정돼요. 승헌님의 요즘 고민은 뭐예요?


♣ 헌 : 장추련에서 활동가를 뽑는데 마땅한 지원자가 없어서 고민이죠. 


♠ 숙 : 아 그래요? 왜요?


♣ 헌 : 장추련 활동이 너무 빡세다고 소문났나 봐요. 

 

♠ 숙 : 활동비를 많이 주세요. 하하 


♣ 헌 : 활동비를 많이 주면 그나마 낫겠다 싶은데 활동비도 제일 적게 주는 편이죠. 그게 고민이에요. 그럼 정숙님은 요즘에 힘이 되는 일은 어떤 건가요? 




 

♠ 숙 : 저는 요즘에 노들에 신입 활동가들 많이 들어와서 좋아요. 저는 노들에 희망이 있거든요. 제2의 인생에 대한 희망이 노들이에요. 노들이 오랫동안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승헌님이 힘이 되는 따뜻한 말 한마디 남겨주세요. 


♣ 헌 : 전태일 열사가 남긴 말 중에 제가 깊이 새기는 부분이 있어요. ‘우선권이 부여된 부러운 우회전을 거부한다’는 말인데요. 사회나 가정 등 내가 속한 네트워크 안에서 살다 보면 순간순간 요구받거나 보이게 되는 모습들이 있거든요. 여러 접점면들이 많죠. 이전까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만 고민했었는데 결론적으로 내가 왜 살고 있나를 항상 질문해봅니다. 그러면서 아직은 부족해서 멋들어지게 명확히 내 삶에 답하지는 못하지만 ‘우선권이 부여된 부러운 우회전은 거부할 거고 현재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 거야’라고 스스로 외치고 다닙니다. 우리 모두 지금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랄게요. 투쟁!


♠ 숙 : 네, 힘내서 함께 투쟁합시다. 긴 인터뷰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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