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 성북아리는 성북 + 아리아리를 합친 말입니다.
아리아리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자, 그래도 없으면 길을 만들자”라는 우리말입니다.

성북아리

[6호 - 성북아리로 기억하는 장애해방열사 ⓷] 박흥수, 정태수 열사
작성자 : 관리자(admin) 작성일 : 2022-06-29 조회수 : 903
파일첨부 :

[성북아리로 기억하는 장애해방열사 ⓷] 


박흥수 열사 (1958~2001) 

[중증 지체장애. 2001. 7. 23. 사망 당시 43세. 용미리제2추모공원]


지식인이 혁명을 시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혁명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민중이다. 

못 배운 당신들, 당신들이 바로 혁명의 주체다.



■ 장애인운동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 동지의 삶 

열사는 1958년 5월 15일 영등포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장애를 입었다. 열사는 장애인운동의 태동기인 80년대 후반부터 여러 투쟁의 현장에서 장애인의 권익과 생존권 쟁취를 위해 헌신했다. 1986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직업훈련과정 수료생 모임인 ‘싹틈동문회’에서 활동을 시작해 89년 3대 회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장애인운동에 투신했다. 


특히 열사는 88년 당시 서울복지관 직업훈련생이던 정태수 열사와 박경석 전장연 대표를 활동가로 이끌어 이후 장애인운동의 큰 축을 담당하게 했다. 또한 88년 신망애재활원 건립반대 사건 투쟁을 거치며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같은 해 서울장애자올림픽 개최 반대 조직위 점거 투쟁과 1989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점거 단식 농성을 진행했다. 열사는 1990년 한국사회 최초의 ‘시설 비리 투쟁’인 정립회관 민주화 투쟁에도 함께했다. 또한 열사는 1990년대 초반 장애인 노동권 쟁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경기도 하남시에서 구두를 생산하는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열사는 1993년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서울지부장을 맡아 조직을 이끌었으며, 1995년 장애인노점상 최정환 열사 분신 투쟁, 이덕인 열사 의문사 투쟁 과정에서 영안실에 상주하며 대정부 투쟁을 이끌었다. 또한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청계천 노점 확보 투쟁 등에 함께하며 활동가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열사는 장애인 노동권 확보를 위해 1999년 장애인실업자연대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열사는 수년간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2001년 7월 23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 역사적 의의 

열사는 1980년대 후반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 투쟁을 시작으로 1999년 장애인실업자연대 위원장으로 역임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장애인의 취업과 고용 문제의 개선을 통한 생존권 보장의 문제, 즉 장애인의 노동권 문제를 사회적으로 알려냈다. 또한 최정환, 이덕인 열사 투쟁 등 장애인 노점상 투쟁을 통해 생존권을 짓밟는 정권에 단호하게 맞섰다. 특히 지속적으로 장애인운동의 주체들을 조직화함으로 장애인운동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태수 열사 (1967~2002)

[중증 지체장애. 2002. 3. 3. 사망 당시 35세.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살아남은 자, 조직하라!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로 세워야 한다. 



■ 장애인운동에 헌신하다 과로사  


-. 동지의 삶

정태수 열사는 1967년 12월 제주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소아마비로 목발을 짚는 양하지 장애인이 된다. 1988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전산과를 수료한 열사는 복지관 직업훈련원 수료생들의 모임인 ‘싹틈’ 동문회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1989년 싹틈은 이전 수료생들을 대상으로 취업률 등을 조사해 소식지에 실었으나, 복지관 측은 이직률 등을 문제 삼아 동문회 사무실에서 소식지를 전부 빼앗아간다. 이에 분노한 열사는 장애인을 대상화하고 비민주적 운영을 일삼는 복지관 측에 맞서 삭발 투쟁 등 15일 동안 동료들과 함께 농성을 이어간다. 열사가 제도권에 대항해 장애인운동의 길을 내디딘 첫 투쟁이었다. 결국 복지관 측은 소식지를 전부 되돌려 주고 싹틈동문회에 사과하게 된다.

  그해 열사는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과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 등 양대 법안 쟁취 단식투쟁에 돌입한다. 당시 공화당사에서 청년 장애인활동가들과 함께한 단식농성은 12일간 계속되었다. 이 투쟁으로 양대 법안은 제·개정된다. 열사는 1990년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장청) 조직부 일을 시작으로 전국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 주비위원, 정립회관 비리척결 점거농성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1993년 장청이 장애인한가족협회와 통합한 뒤 열사는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전장협) 조직국장을 맡는다. 이후 노점단속에 항의해 서초구청에서 분신한 최정환 열사 투쟁을 이끌고, 전장협과 전국노점상연합이 구성한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조직국장을 맡아 장애인 생존권 투쟁에 심혈을 기울인다. 열사는 1995년 인천 아암도 노점 투쟁 중 구속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석방 이후에도 열사는 아암도에서 의문사한 이덕인 열사 투쟁을 주도하며 민중 생존권을 짓밟는 정권에 항거하는 투쟁을 전개한다.


  1996년 열사는 장애인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노동을 통한 사회참여’라고 보고, 한 달여에 걸친 지방 순회에 나선다. 제주도를 시작으로 당시 전장협의 전국 10여개 지부를 돌며 진행된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는 그해 4월 20일 민주노총 등 노동사회단체들과 공동 개최한 ‘장애인 노동권리 확보를 위한 제1회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로 총화된다. 이후 수년간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는 매년 4월 20일에 개최되었다.

  이후 전장협과 통합한 서울장애인연맹에서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던 열사는 장애인 문제의 이론적 토대 강화와 청년장애인 활동가 양성 등을 목표로 ‘1회 장애인청년학교’에 심혈을 기울인다. 열사는 2002년 3월 초 장애인청년학교 수료식을 겸한 모꼬지 뒤풀이 도중 과로에 의한 심근경색 등의 증세로 숨을 거두었다.

  

-. 역사적 의의 

열사는 살아생전 활동가 조직화와 장애인 노동권 쟁취에 매진했다. 열사는 사회적 차별로 인해 파생되는 다양한 장애의 문제를 노동을 통한 사회참여로 총화하려 노력했다. 이에 장애인 당사자가 더는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생산의 주체로서 세워야 한다며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 등 장애인 노동권 쟁취를 위해 헌신했다. 또한 장애인청년학교를 통해 청년 장애인, 비장애인 활동가를 양성함으로써 장애인운동의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이전글 [6호 - 연재] 사진으로 보는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②
다음글 [6호 - 탈자,날자] 다양한 경험도 하고 사회복지 공부도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