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 성북아리는 성북 + 아리아리를 합친 말입니다.
아리아리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자, 그래도 없으면 길을 만들자”라는 우리말입니다.

성북아리

[6호 - 서로인터뷰] 어떤 활동이든 재미있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하죠.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2-07-29 조회수 :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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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활동이든 재미있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하죠. 


 『성북아리』는 장애인운동 활동가 두 사람이 서로를 인터뷰하는 ‘서로인터뷰’ 꼭지를 마련했습니다. ‘서로인터뷰’는 일방적인 인터뷰가 아닌 상대방의 인터뷰어가 되어 서로 생각을 나누는 꼭지입니다. 여섯 번째로 배재현 활동가(노원중증장애인독립생활센터)와 민아영 활동가(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가 만났습니다. (편집자 주)




▶ 서로인터뷰를 진행하는 아영님(왼쪽)과 재현님(오른쪽)


♣ 민아영(아래 영) : 만나서 반가워요. 지하철이 아니라 이렇게 지붕이 있는 공간에서 만나니 참 좋네요.


♠ 배재현(아래 현) : 난 매일 기어가고 아영님은 영상을 찍는 관계로만 봤는데 이렇게 보니 참 반갑습니다. 하하 

 

♣ 영 : 저는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장애인운동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아영입니다.

 

♠ 현 : 저는 노원중증장애인독립생활센터에서 활동가이자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재현입니다.


♣ 영 : 재현님은 서울장차연 대의원으로 활동하신 지 오래되셨죠?

 

♠ 현 : 네, 어느덧 6년째네요. 내년까지만 할까 생각 중입니다. 


♣ 영 : 저는 영화를 찍는 활동을 해서 자주 인터뷰해요. 제가 자주 하는 질문 중에 본인이 ‘장애가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된 때가 언제였는지 묻거든요. 재현님은 혹시 기억나세요?

 

♠ 현 : 저는 태어난 지 100일 지나고 황달이 심하게 와서 그 증세로 사시도 오고 수술도 두 번 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뇌성마비 때문이었대요. 어렸을 때는 목발을 짚었고 지금은 전동휠체어를 타죠.


♣ 영 : 그 이야기는 부모님께 들은 거잖아요. 재현님이 스스로 남과 좀 다르다고 느꼈던 시기 말이에요. 내가 장애인 당사자분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집 밖에 나가본 적이 없어서 본인의 장애조차 알지 못하다가 집 밖으로 나갔더니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은 다 두 발로 걷고 있어서 그때 뭔가 다른 세상에 혼자 나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 현 : 저는 엄마한테 업혀서 삼육재활원에 처음 갔어요. 거기서 장애인들을 처음 봤죠. 어렸을 때는 업혀서 유치원 다녔어요. 사실 어렸을 때 거의 업혀 다녔던 것 빼고는 기억이 별로 안 나요. 부모님이 슈퍼마켓을 하셨는데 아빠가 배달 가실 때 오토바이 앞에 나를 태우고 다녔던 거 정도 기억나요.


♣ 영 : 유치원 때는 걸어 다녔었어요?


♠ 현 : 대부분 업혀 다녔지요. 삼육재활원 들어가면 치료 과정이 있어요. 오전에는 학교 다니고 오후에 ‘피티’라고 다리 치료, ‘오티’라고 손 치료를 받았죠. 처음에는 휠체어 타다가 담당 치료사가 목발을 짚어보자고 제안해서 그때부터 목발을 짚기 시작했어요.


♣ 영 : 삼육재활원 기숙사에 들어갈 때 기억나요?


♠ 현 : 1987년이었어요. 들어간 첫날 밤에 엄마가 ‘안녕’하고 가셨어요. 그런데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 아빠한테 가겠다고 친구들한테 ‘안녕’ 그러고는 램프를 기어갔어요. 8살쯤이었는데 혼자 엄마한테 갈 수 있을 줄 알았나 봐요. 담당치료사 선생님이 오셔서 나를 말렸어요. 바지가 지저분해지는데도 막 기어갔죠. 선생님들도 말리다가 화가 나니까 ‘그래 가라’ 그러더라고요. 결과는 빤히 알면서도. 



▶재현님.


♣ 영 : 결국 어떻게 됐어요?


♠ 현 : 선생님들이 말리고 달래주고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니까 서서히 적응되더라고요. 


♣ 영 : 삼육재활학교에서 뭘 배웠어요?  


♠ 현 : 지금 일반 학교에서 배우는 초등학교 과정 똑같아요. 


♣ 영 : 삼육재활원 밖으로 나가기도 하나요? 


♠ 현 : 소풍날에요. 그리고 삼육재활원이 제7일안식교단에서 운영하는데 토요일에 대학생 누나, 형들이 와서 예배 보고 맛있는 거 먹어요. 가끔 삼육대학교에 데려가 구경도 시켜 줬어요.


♣ 영 : 친구들하고는 친하게 지냈나요? 

 

♠ 현 : 네, 친구들과 함께 학교 다니고 치료도 받고, 물론 툭탁툭탁 싸우기도 했고요. 당시 삼육에 기숙사가 있고 형들이 다니는 직업훈련원도 있었어요. 주말에 형들이 와서 테니스공과 나무 막대기로 야구도 하고 나름 재밌게 지냈어요. 


♣ 영 : 삼육에서는 언제 나왔어요?

 

♠ 현 :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녔는데 일반학교로 전학 가래요. 우리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에 갔는데 입학을 거부당했어요. 교감선생님이 앉아서 얘기할 때는 오케이 오케이 해요. 그러더니 목발 짚은 나에게 난간을 잡고 계단을 올라가 보래요. 올라갔죠. 그런데 교감이 하는 말이 애들 막 뛰고 그러는데 방해되니까 안 된대요. 입학 거부당하고 1년 꿇었어요.


♣ 영 : 재현님 마음이 많이 안 좋으셨겠어요. 그럼 1년 동안 뭐 했어요?


♠ 현 : 진짜 하는 거 없이 그냥 집에만 있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우리 아버지가 내 이야길 듣고 그 학교를 뒤집어 놓은 거예요. 교장, 교감한테 가서 네가 교육자냐, 왜 거부하냐고 따졌대요. 이듬해 내 동생이 다니던 학교에 다니게 되었어요. 원래는 6학년에 들어가야 하는데 5학년을 한 번 더 다녔어요. 내가 5학년, 여동생이 6학년이었죠.


♣ 영 : 여동생이 가방 들어줬어요?

 

♠ 현 : 아니요. 어머니가 나 때문에 운전을 배우셔서 통학시켜주셨어요. 


♣ 영 : 여동생과 약간 서먹했겠어요. 학교에서 아는 척했어요? 

 

♠ 현 : 물론이죠.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장애인 형제자매들은 다른 방에 들어가 있기도 하잖아요? 우리 집은 그런 거 없었어요. 내가 중학교 1학년일 때 여동생이 중2였는데 동생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곤 해서 내 얼굴을 알고 있거든요. 학교에서 동생 친구들이 ‘안녕하세요’ 인사해요. 그러면 어떤 애들은 ‘2학년이 1학년한테 인사하네’ 하고 수군대죠.


♣ 영 : 특수학교에서 일반 학교로 전학 간 건데 적응은 잘하셨나요?

 

♠ 현 : 점점 말이 없어졌어요. 우리 반 친구들이 인사해도 말 한마디 안 했어요. 전학 가면 앞에 나가서 인사하잖아요. 지금 내 성격 같으면 막 들이댔을 텐데 그땐 고개 푹 숙이고 말도 못 하고 들어왔어요. 나이를 떠나서 비장애인 친구들하고 같이 공부한다는 게 그때 나한테는 굉장히 어려웠고 이상하게 말을 붙이기가 힘들더라고요.


♣ 영 : 그 학교에는 재현님 말고 장애학생은 없었어요?


♠ 현 : 내 기억으로는 없었어요.


♣ 영 : 너무 환경이 확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긴 했겠네요.


♠ 현 : 반마다 한두 명씩 나를 놀리는 애들도 있었죠. 냄새난다고 하기도 하고 별의별 시비를 다 걸어요. 너무 괴로우면 엄마한테 얘기하죠. 지금 투쟁하는 거로는 그때 나도 막 대응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전혀 못 했어요. 

 

♣ 영 : 투쟁하는 사람들도 개인적으로 대응하기는 쉽지 않죠. 그 시기 재현님 너무 외로웠을 것 같아요. 


♠ 현 : 외로웠죠. 그런데 친구 중에서 잘해주는 친구도 있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키 순서대로 자리를 배치하잖아요. 그런데 내 순서가 오면 담임 선생님이 ‘재현이하고 앉을 사람 손 들어보세요’ 해요. 한두 명씩은 있었죠. 그땐 그게 좋은 배려인 줄 알았어요. 반에서 떠도는 나에게 친구를 붙여주었으니까요. 그런데 커서 생각해보니까 선생님이 그때 나에게 한 번이라도 물어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 영 : 선생님이 물어봤다면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요?

 

♠ 현 : 하지 말라고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땐 사실 그럴 용기도 없었어요. 사람하고 관계 맺기가 힘든 시기였죠. 특수학교 다니다가 일반 학교 다니는 게, 마치 큰 벽 같았어요. 

 

♣ 영 : 사실 5학년 6학년쯤 되면 자기들끼리 무리 지어 다닐 때긴 하지요. 중학교 때도 비슷했나요?


♠ 현 : 네. 계속 잘 어울리지 못하고 뭔가 주변인처럼 배회했어요. 예전에 페이스북에 쓴 적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진짜 무 존재한 사람처럼 지냈다고 봐도 무방해요.


♣ 영 : 고등학교는 어디 다녔어요?


♠ 현 :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또 일반학교에 가야 하나 고민했어요. 그런데 아는 형이 당시 안산에 있는 명혜학교에 다녔는데 입학생을 모집한다고 하더라고요. 면담하고 합격해서 기숙사로 들어갔죠. 

 

♣ 영 : 삼육재활학교에서 이제 다시 명혜학교로.

 

♠ 현 : 거기서 장애학생들을 다시 만났는데 거기서도 입학하고 처음 한두 달은 거의 겉돌았죠. 알고 보니 저랑 몇 사람 빼고는 중학교 때부터 함께 지내며 올라온 애들이었어요. 한두 달 정도 겉돌다가 여러 과정을 거쳐서 친해지게 됐어요. 

 

♣ 영 : 학창 시절 친구 중에 지금도 연락하는 친구 있어요?

 

♠ 현 : 학교 동기들은 거의 없어요. 명혜학교가 명휘원이라는 시설에 속해있는데 학교 말고도 직업훈련원과 자립작업장이 있거든요. 명휘원 출신 선배들은 지금도 몇 명 자주 보죠. 한자협 최강민 형, 성북센터 이원교 소장 등이요. 


♣ 영 : 세상 참 좁네요.

 

♠ 현 : 당시 강민이 형은 매일 1층에서 보치아 연습했어요. 학생이 교실에 있는 게 아니라 1층 복도에 딱 자리 잡고 있었어요. 그때 ‘저 형은 뭐길래 매일 공만 던져’라고 생각했는데 장애인운동판에 와서 만났네요. 

 

♣ 영 : 장판에 명휘원, 삼육 출신 꽤 많겠네요.


♠ 현 : 많아요. 그런데 삼육하고 주몽(재활원) 출신들은 명혜학교 안 쳐줘요. 자기네들끼리 라이벌 의식을 느껴요.


♣ 영 : 왜 그러는 거예요?


♠ 현 : 그런 게 있어요. 허허.


♣ 영 : 그래서 고등학교 과정은 재미있게 보냈어요?


♠ 현 : 별로 재미있지는 않았어요. 어느 날 선배가 밥 잘 먹고 들어와선 나한테 싸가지 없다며 뺨을 빡빡빡 세 대 때리는 거예요.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막 폭력을 행사했죠. 그리고 티브이를 9시 뉴스하고 스포츠뉴스 딱 두 가지만 보게 해요. 시험 기간엔 시험공부하는 학생들만 사발면을 먹게 해줘요. 그러면 공부한다는 핑계 대고 먹는 거죠. 한 번은 친구하고 몰래 라면 먹다가 사감한테 걸렸는데 ‘너희들 내일 죽을 줄 알아’ 그러더라고요. 천주교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시설인데 강제로 미사를 봐야 하는 것도 싫었어요. 거기 음식점이 하나 있었는데 밥 먹기 전에 떡볶이 사 먹다가 교장 수녀한테 걸렸는데 막 뭐라고 하는 거예요. 삼육에서는 어려서 몰랐다 치고 명혜학교는 이런 일들이 나한테는 좀 안 좋은 기억이죠.

 

♣ 영 : 재현님은 사춘기가 언제 왔어요?

 

♠ 현 : 제 생각에 스무 살쯤인 것 같아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진학 전 스무 살 때 오뚜기캠프라는 걸 갔어요. 

 

♣ 영 : 오뚜기캠프가 뭐예요?

 

♠ 현 : 한국뇌성마비복지관에서 뇌성마비인들 대상으로 여는 캠프예요. 성인기나 청소년기 장애인들이 참가하는데 자원봉사하는 대학생들도 와요. 그때 내 나이 또래 비장애인들을 처음 봤어요. 사춘기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때 2박 3일 캠프 끝나고 갑자기 ‘내 나이 또래들은 자유롭게 대학도 다니고 술도 마시는데 나는 재가장애인처럼 집에만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영 :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가 없었군요. 

 

♠ 현 : 그러니까 일정 기간 어떤 활동이 끝나면 그냥 또 집에 있는 거죠. 그런데 내 또래들은 공부하든 뭘 하든 활동적인 모습을 보면서 너무 부러웠어요. 오뚜기캠프에서 제일 놀라웠던 게 또래들이 자유롭게 맥주 마시는 모습이었어요. 그 당시 호프집 가보는 게 꿈이었거든요. 그때 나보다 한 살 많은 누나도 있었고 나보다 어린애들도 있었는데 내 눈에는 자꾸 그런 자유로운 모습이 보인 거죠. 그래서 캠프 갔다 집에 와서 식구들에게 막 성질부리고 틱틱거렸어요. 

 

♣ 영 : 호프집에 갈 시도는 안 해봤어요? 


♠ 현 : 시도해 볼 생각도 못 했죠. 스무 살은 됐지만, 고등학교 졸업한 지가 얼마 안 돼서 그런 걸 몰랐죠.


♣ 영 : 그렇게 지내다가 대학교에 진학했나요? 


♠ 현 : 네. 장애인 특례 입학 제도가 있는 대구대에 가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너무 멀다고 못 가게 했어요. 내가 받은 점수로는 특례 입학으로 갈 수 있었는데 못 가게 하셔서 무척 아쉬웠죠. 사실 삼육이나 명혜학교나 다 기숙사여서 멀다는 게 큰 이유가 될 수 없었는데 내가 용기가 없었나 봐요. 그런데 그때 한국재활복지대학이 생겼어요. 그래서 어찌어찌해서 들어갔어요.



▶ 아영님


♠ 현 : 제 이야기는 잠시 중단하고 아영님 이야기도 들어볼게요. 고향이 어디세요?


♣ 영 : 대구요.


♠ 현 : 대구라고는 안 느껴지는데요. 완전 서울 사람 같아요. 형제자매는요?

 

♣ 영 : 언니랑 저 둘이에요. 


♠ 현 : 어렸을 적 이야기 좀 해주세요. 

 

♣ 영 : 그냥 평탄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선생님이셨어요. 어릴 적 기억은 별로 많지 않아요. 어머니는 전업주부셨고 언니랑 8살 차이 나는 막둥이였어요.

 

♠ 현 : 8살 차이면 진짜 예뻤겠네요. 사랑을 독차지했겠는데요? 

 

♣ 영 : 언니는 아빠를 무척 엄한 사람으로 기억한대요. 진짜 무서운 경상도 남자 같은 느낌이었다는데 저한테는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에요. 제가 막 울면 아빠가 머리띠 쓰고 귀여운 표정으로 장난도 많이 치시고 그랬어요. 

 

♠ 현 : 막내딸이니까 다 예뻐 보이셨구나.

 

♣ 영 : 저는 아빠가 참 교육자이셨다고 생각해요. 배울 점이 많은 분이었죠. 한 번도 저를 체벌한 적이 없었어요. 

 

♠ 현 : 진짜요?

 

♣ 영 : 네. 한 번도 때린 적이 없고 머리도 아빠가 다 묶어줬어요. 또 좀 신기했던 게 ‘딸이니까, 여자니까 이렇게 해’ 이런 게 전혀 없는 집안이었어요. 우리가 하고 싶은 것 다 하게 했죠.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에 가고 싶어서 피피티를 만들었었어요. 


♠ 현 : 5학년이요? 

 

♣ 영 : 우리 때는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컴퓨터를 배웠거든요. 5학년 때 강동원 생일 파티에 가고 싶었어요. 장소는 성균관대였죠. 내가 KTX 몇 시 차를 타고 가면 서울역에 몇 시에 도착하는데 요금은 얼마고, 서울역에서 성균관대 가려면 혜화역으로 가야 하고 그럼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이런 걸 다 피피티로 만들어서 부모님께 보여드렸죠. 그걸 보고 허락해주셨어요. 물론 서울 살던 이모가 마중 나왔지만, 그래도 KTX는 혼자 탔죠. 

 

♠ 현 : 초등학교 5학년이 대단했네요.


♣ 영 : 강동원 생일잔치에 가려면 지금처럼 티켓팅이 아니고 팬카페 계좌 입금 순으로 좌석을 배정받아요. 빨리 입금해야 좋은 자리를 잡죠. 은행이 오전 9시에 여는데 8시 50분쯤에 가 있다가 은행원 언니한테 고사리 손을 내밀고 제가 강동원 생일 파티 좋은 자리를 받아야 하니 빨리 넣어 달라고 했어요. 팬카페에 찾아보니 ATM 기계는 늦는다고 하더라고요. 은행 언니가 걱정하지 말래요. 제가 세 번째로 입금했죠.


♠ 현 : 하하. 강동원하고 결혼은 못 했죠? 

 

♣ 영 :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매년 여름방학, 겨울방학 때 우리 집 여행계획도 나에게 짜라고 했어요. 가고 싶은 곳을 이야기해주시면 내가 다 짰죠. 그때는 내비게이션이 없었으니까요.


♠ 현 : 어린 시절에 혹시 장애인 친구는 있었나요? 


♣ 영 : 친구는 아니었는데, 같은 반에 장애 학생이 있었죠. 초등학교 5학년 때 한 명이 자폐였는데 같은 아파트에 살았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많이 했어요. 자해도 하고. 남자아이였는데 그런 돌발행동이 있다 보니까 애들이 건들지 못했죠. 그 친구가 좀 기억에 남아요. 나는 자폐는 다 무언가 집중하고 뭔가 특출한 재능이 있는 아스퍼거증후군인 줄 알았거든요. 그 친구는 차 배기통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면 무슨 차 기종인지 다 맞혔어요. 무척 신기했죠. 그런데 6학년 때 죽었어요. 혈우병이 있었는데 부모님 안 계실 때 넘어져서 피가 멈추지 않았대요. 영구차가 학교를 한 바퀴 돌더라고요. 반 친구들도 그런 죽음을 본 건 처음이니까 좀 충격적이었나 봐요. 그 친구 책상 위에다가 포스트잇으로 마지막 편지를 남겼던 기억이 나네요. 


♠ 현 : 그 시절에 장애인 관련 시설은 알았나요?


♣ 영 : 고등학교 때 가봤어요. 대구에 애망원이라는 시설이 있어요. 노인 요양시설과 학령기 이전 장애아동 거주시설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봉사 시간 채워야 하니 선생님이 항상 애들을 모아서 그곳에 갔어요. 사실 장애가 있든 없든 아기들 무척 예쁘잖아요. 장애아동들하고 막 놀고 밥 먹이고 계곡에 놀러 가고 그랬어요. 너무 예뻐서 사진 찍으려 하면 절대 찍지 말라고 했던 게 기억나요. 거기서 대청소하고 케이크를 우유에 말아서 먹이고 그랬어요. 


♠ 현 : 케이크를 우유에 말아요?

 

♣ 영 : 네. 아이들이 잘 못 넘긴다고요. 미역국 같은 종류도 밥을 다 말아서 먹였어요. 그때는 내가 진짜 착한 줄 알았잖아요.

 


▶ 서로 마주 보며 웃고 있는 아영님(왼쪽)과 재현님(오른쪽)


♠ 현 : 중고등학교 때 강동원 말고 다른 고민은 없었나요? 

 

♣ 영 : 공부를 진짜 잘하고 싶었어요. 부모님의 저에 대한 기대도 있었고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는 친구하고 대화도 잘 안 하고 거의 공부만 했어요.

 

♠ 현 : 그래서 벗어났어요? 


♣ 영 : 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합격했어요. 좋은 대학교 나와서 돈을 많을 벌고 싶었거든요. 자본주의에 입각한 인물이었죠. 하하.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전국에서 공부로 날고 기는 애들이 많이 왔더라고요. 

 

♠ 현 : 한가락 하는 애들이 다 왔군요? 그런데 그런 특이한 학과를 어떻게 생각했어요?

 

♣ 영 : 원래는 서울시립대에 가고 싶었어요. 조경학과에 가서 도시 설계 같은 걸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당시 박원순 시장이 갑자기 반값 등록금 정책을 발표하면서 서울시립대가 너무 뜬 거예요.


♠ 현 : 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 영 : 드디어 집을 떠나 기숙사에 들어갔어요. 정말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게 목표였고 내 주변 애들은 이미 대학교에 들어오면서부터 학점관리, 토익준비 그런 스펙 관리를 다 했어요. 들어가자마자 엘지(LG)에서 대학생들 모아서 워크숍하고 무조건 스펙 쌓고, 방학하면 오픽이나 토익 매일 공부해서 점수 높이고.... 도서관에 자리가 없어서 공부를 못 할 정도였죠. 

 

♠ 현 : 학생들 대부분이 그랬는데 아영님은 그렇지 않았다는 거죠?


♣ 영 : 아뇨. 나도 똑같이 했어요. 그런데 2014년에 큰 사건이 있었어요. 세월호요.


♠ 현 : 아, 세월호 때 대학생이었군요?


♣ 영 : 네. 12학번이니까요. 3학년이었는데 그때 약간 세상에 환멸을 느꼈던 것 같아요. 1, 2학년을 지나오면서 ‘이걸로는 못 먹고 살겠다’라는 생각에 행정학과로 옮겼죠. 이공계 공부하던 애가 갑자기 인문학 문과 가서 헤매던 와중에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죠. 진짜 말도 안 되는 세상에 내가 살고 있고, 지금까지 공부한 것도 다 의미가 없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교환 학생 신청해서 그해 8월에 인도네시아로 갔어요.


♠ 현 : 당시 세월호 침몰은 많은 사람에게 큰 충격이었죠. 

 

♣ 영 : 학내 분위기도 그랬고 학생들도 충격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았어요. 이듬해 제가 다시 한국에 돌아왔는데 세월호 추모 집회가 많이 열렸어요. 우리 학교에도 대자보가 엄청 많이 걸렸어요. 그래서 세월호 집회에 나가보려고 했는데 한 번도 집회에 나가본 적이 없어서 좀 무서웠죠. 그래도 그냥 가봤어요. 혼자서.

 

♠ 현 : 혼자서요?


♣ 영 : 네. 뒤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사람들이 손피켓이랑 촛불이랑 나눠주더라고요. 그걸 어색하게 들고서 있는데 깃발들이 무척 많더라고요. 자세히 보니 대학교 깃발들도 많더라고요. 


♠ 현 : 세월호 집회에는 자주 갔어요?


♣ 영 : 혼자서 몇 번 갔어요. 조금 친한 환경공학과 교수님이 있었거든요. 벚꽃 날릴 때쯤 교수님이 어디 가냐고 물으시면 광화문 간다고 말씀드려요. 그러면 ‘집회 가는구나? 다치지 말고 오렴’ 했던 기억이 나네요.


♠ 현 : 그런 과정에서 장판은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 영 : 교양 수업 중에 어떤 선생님 수업을 듣고 난 뒤 그 선생님 책들을 진짜 좋아하게 됐어요. 선생님 책 내용 중에 ‘고통이 얼마나 우리 삶에 중요한가’라는 에피소드에 노들야학 이야기가 나왔어요. 노들야학에 돌침대가 있었잖아요. 그 돌침대에서 교장샘이 자다가 화상 입고 욕창 생긴 이야기였어요.


♠ 현 : 그럼 노들야학을 책으로 알게 된 거네요?


♣ 영 : 그렇죠. 사실 교장샘이 누군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강동원을 정말 사랑했던 것처럼 저는 덕질이 시작되면 그걸 계속 파거든요. 그러다 고병권샘도 알게 됐고 ‘수유 너머’라는 모임도 알게 됐죠. 고병권샘 책 중 ‘철학자와 하녀’라는 책에 노들야학 이야기가 또 등장했어요. 모꼬지에서 처음 별을 본 이야기였는데 장애에 관한 내용이라기보다는 약간 인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내용이 무척 재밌었어요. 그래서 노들야학 홈페이지에 자원활동을 신청했죠. 


▶ 아영님


♠ 현 : 아, 자원활동 신청해서 장판에 들어오게 된 거네요. 나는 아영님을 서울장차연 활동가로 처음 봤는데 노들야학 인연으로 장판에 들어온 이야기는 오늘 처음 듣네요. 어쨌든 세월호 사건을 거쳐 노들야학까지 오는 과정이 이전 대학교까지 삶의 방향과 완전 다른 결이었잖아요. 처음에 그 ‘투쟁’이라는 것이 아영님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는지 궁금해요. 


♣ 영 : 그냥 약간 멋있었어요. 제가 중학교 때 한미 FTA가 있었고 광우병 사태가 터지며 전국적으로 시위를 했어요. 대구에서는 청소년들이 집회에 많이 나갔어요. 내 나이 또래 애들이 집회에 나가서 막 피 흘리면서 싸우는 모습을 보니까 뭔가 이게 진짜 문제고 내 나이에도 저렇게 사회 문제에 대해 말해야 하는 거구나 생각했었죠. 또 대구 지하철 참사도 있었고요. 


♠ 현 :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있었네요. 


♣ 영 : 내 삶에서 그런 기점들을 지나면서도 나는 한 번도 내 목소리를 내본 적이 없었던 거죠. 세월호 참사를 지나면서도 난 돈을 많이 버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런 상황을 내가 맞닥뜨리지 않으려면 돈 많이 벌고 잘 나가야 내가 탈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 현 : 극과 극이네요. 그런 삶을 살다가 이렇게 장판에 몸을 담다니요. 사실 여러 시민 사회 인권 단체 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투쟁하는 곳이 장판이잖아요. 


♣ 영 : 그런 줄 몰랐죠. 하하


♠ 현 : 그리고 가장 투쟁의 핵심에 있는 교장샘의 활동지원사를 하고 또 투쟁의 핵심인 노들야학에서 활동하고요. 


♣ 영 : 멋있었어요. 처음 노들야학에 왔을 때 그냥 사람들이 너무 재밌고, 일단 웃기잖아요. 친하게 지내던 활동가들이랑 정말 재밌게 지냈어요. 술도 많이 마셨고요. 그리고 큰 해방감을 느꼈어요. 그때 처음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 현 : 어떤 느낌인지 알겠어요.


♣ 영 : 그전에는 학점 뜰 때 되면 엄청 긴장하죠. 기대한 A+가 나올 것인가, 장학금은 탈 수 있을까, 그리고 학점관리도 잘해야 하고요. 그런데 노들야학에 오니까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렇다고 노들이 마냥 처음부터 쉬웠던 건 아니었어요. 처음 한두 달은 밥을 거의 못 먹었죠. 너무 어색하더라고요. 장애인하고 어떻게 만나야 할지 몰라서요. 


♠ 현 : 지금 아영님을 봐서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요? 바로 교사를 시작했어요?


♣ 영 : 자원활동 신청했는데 신입 교사로 받았어요. 나는 자원활동하러 오면 다 교사를 하는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때 교사가 부족했다고 하더라고요. 



▶ 재현님


♣ 영 : 제 이야기는 여기서 잠깐 멈추고 다시 재현님 대학 생활로 넘어가죠. 재활복지대에서 어떤 과를 전공했어요?


♠ 현 : 저는 재활복지학과를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점수가 안 돼서 광고홍보학과에 갔어요. 초기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요. 너무 어려워서 많이 헤매다가 막판에 조금 적응했죠. 과를 옮길까도 고민했는데 차츰 적응하면서 동기들하고 같이 도우며 공부했어요. 지금 우리 단체들 행사 홍보 웹자보 같은 것들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다 잊어버렸어요. 


♣ 영 : 졸업은 몇 년도에 했어요? 


♠ 현 : 2005년에요. 그리고 또 1~2년을 집에서 놀았죠. 다시 암흑기였어요. 그러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방송 모니터링을 알게 됐어요. 그 당시에는 뉴스, 드라마, 영화 등을 보고 장애인 차별 사례들을 찾아내 토론하고 보고서로 쓰는 일이었어요. 예를 들어 예전 스타킹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지체장애인이 나오면 강호동이 무릎 꿇고 시선을 맞추는 장면이 나와요. 그런 장면을 모니터링하고 함께 이야기 나눠요. 정답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틀린 답이나 다른 시선이라도 토론하고 보고서에 썼어요. 그 일 하면서 방송통신위원회를 통해 처음으로 활동비 10만 원을 받았어요. 모니터링 사업 말고도 장애우대학도 다니고 장끼충전도 참여했어요. 


♣ 영 : 장끼충전은 뭐예요?


♠ 현 : 2박 3일 놀러 가서 과제 같은 걸 하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장애우대학과 장끼충전에 가서 김광이, 임소연, 박옥순 누나를 처음 만났죠. 오영철 새벽지기센터 소장도, 김태훈 형도 다 거기서 봤어요. 


♣ 영 : 그곳 출신들이 지금 대학로에 많이 있네요.


♠ 현 : 그 활동가들이 우리 쪽에 많이 와 있어서 나도 나중에 좀 놀랐죠. 그러다가 서울DPI에서 진행하는 장애인청년학교를 알게 됐죠. 내가 7기로 들어갔는데 프로그램이 재미있더라고요. 조별 토론하고 그 내용을 대자보에 붙여서 대표로 설명도 했어요. 두 달 동안 진행하고 마지막에 모꼬지 가서 시상식도 했는데 거기서 내가 최우수상(MVP)을 받았어요. 


♣ 영 : 오호~


♠ 현 : 청년학교 수료하고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한번 활동해보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2008년 9월에 강북구에 있는 센터에서 활동을 시작했죠. 


♣ 영 : 재현님은 장판 얘기 시작하니까 눈빛과 표정이 달라지네요. 하하


♠ 현 : 센터 들어가서 처음에는 동료상담을 같이 진행하고 몇 가지 사업도 담당했죠. 사업 끝나면 쉬고요. 자조모임 파트를 내가 맡았어요. 한번은 한국DPI, 연합회 회원들하고 21일 일정으로 국토대장정을 다녀왔어요. 전동휠체어 타고 한 구간을 이동하면 해당 지역 DPI 지부에서 숙소와 밥을 제공했죠. 20일 넘게 고생하고 출근했는데 당시 내가 다녔던 센터 부소장이 ‘너 놀 때 다른 사람들 일했어’ 이러더라고요.


♣ 영 : 국토대장정 갔다 온 걸 놀았다고 말해요?


♠ 현 : 부소장이 다녀오라고 해서 간 건데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쌍욕을 하더라고요. 사람들 다 있는 데서요.


♣ 영 : 완전히 하대했네요?


♠ 현 : 4년 넘게 일했는데 그런 대접 받고서 그만뒀어요. 


♣ 영 : 사실상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거고 어쨌든 우여곡절이 많았네요. 그렇게 당하고 나면 장판이나 자립생활센터 일을 더는 못할 것 같은데요.


♠ 현 : 네. 그런데 사실 갈 데가 없었죠. 그리고 센터 일을 내가 꼭 하고 싶었거든요.


♣ 영 : 그러다가 어떻게 협의회 쪽과 인연이 닿은 거예요?


♠ 현 : 그 당시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고 송국현 동지, 김주영 동지가 화재로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오고 그랬어요. 특히 주영이하고는 이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어요. 79년생들 장애, 비장애 친구들이 몇 명 있어서 같이 여행도 갔었죠. 한 번은 김정 활동가 집에서 모여서 술 한잔하고 저는 일정이 있어서 먼저 나왔는데 이튿날 사고가 났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 영 : 김주영 동지 돌아가시기 전날 같이 술을 마신 거예요?


♠ 현 : 그러니까 금요일에 먹었죠. 그리고 이틀쯤 뒤에 주영이하고 같이 여행 갔던 친구들이 모여서 한양대병원 장례식장에 조문 갔어요. 장례식장에서 밤새는데 그때 전장연, 협의회 활동가들이 막 울고 있더라고요. 주영이를 학교 졸업하고 못 보다가 다시 연락이 닿아서 더 친해지려고 하는 시기에 갑자기 일이 터진 거죠. 아무튼 송국현 동지와 주영이 장례 치르면서 만난 동지들을 보면서 나도 협의회 센터에서 한번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죠. 지금 노원센터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임형찬 형을 당시 인터넷 ‘행복카페’라는 곳을 통해 알고 있었거든요. 형찬 형이 노원센터에서 일한다고 해서 그냥 찾아갔어요.


♣ 영 : 노원센터로요?


♠ 현 : 네. 아는 형이니까요. 노원센터에 가서 처음에는 보치아 모임도 하고 집회에도 따라다니곤 했어요. 그러다가 고용노동부에서 하는 6개월짜리 인턴제도로 활동을 시작했죠. 노원센터 한 선배 활동가가 허리 수술로 활동을 정리하면서 2016년도부터 사업팀으로 옮겨 지금까지 왔어요. 


♣ 영 : 활동하면서 개별 IL센터 말고 서울장차연 같은 중앙 활동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요?


♠ 현 : 내가 특출나게 활동을 잘해서가 아니라 내 활동 스타일이 센터에 맞는지 아니면 중앙 활동에 맞는지 초반에 많이 고민했고 지금도 간혹 고민하죠.



▶ 서로 마주보며 인터뷰를 하고 있는 재현님(왼쪽)과 아영님(오른쪽)


♣ 영 : 예를 들어 센터 활동에서 이러이러하게 활동하고 싶은데 못해서 아쉽거나 부족함을 느낄 때 중앙 활동에 대한 갈증이 있는 건가요?


♠ 현 : 1박 2일 집중집회를 하거나, 장추련이 차별 상담 전화를 운영하거나 하는 것 등에 나는 우리 센터가 함께 만들어가면서 일하고 싶은 거죠. 그런데 중앙에서 제안이 오면 내가 중앙 일만 열심히 하고 센터 일은 좀 등한시한다는 오해를 받다 보니까 그런 게 항상 머릿속에 있었죠. 중앙에서 일하는 중증장애인 활동가들을 봤을 때 만약에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일하면서 깨달을 것 같아요. 내가 지금 일하는 활동공간에서 진짜 열심히 맡은 사업을 진행하고 성과 낸 것도 많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 영 : 그런 부분을 존중받지 못하는 부분이 있군요.


♠ 현 : 네. 그런데 나는 센터 일을 등한시하거나 못한다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 영 : 자신의 역할은 다하고 중앙에서 제안받은 활동을 한다는 거죠?

 

♠ 현 : 그렇죠. 이미 할 거 다 하고서 다른 역할도 하는 거죠.


♣ 영 : 그래도 센터에 눈치 보일 수도 있는데 재현님은 왜 중앙 투쟁이나 기자회견 등에 꼭 나오는 거예요?


♠ 현 : 당연히 나가야죠.


♣ 영 : 왜요?


♠ 현 : 그냥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내가 보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 영 : 재현님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본인이 계속 마음이 쓰인다는 의미인가요?


▶ 재현님

♠ 현 : 나 말고도 많은 동지가 있지만, 내가 힘을 보태야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빨리 이룰 수 있으니까요. 나는 그거 하나예요. 


♣ 영 : 진짜 오직 사명감 하나로 움직이는 거예요?

♠ 현 : 네, 그런 사명감이 있어요.


♣ 영 : 진짜요? 전장연이나 진보 운동이 다 망해도 재현님은 깃발 들고 있을 사람이네요. 


♠ 현 : 네. 그냥 마음이 그래요.


♣ 영 :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세요. 


♠ 현 : 장판에 들어와서 초기 연합회 센터에서 일할 때 내 활동에 대해 많이 무시당했던 부분들이 있었죠. 그러다가 협의회에 와서 투쟁 현장을 다니다 보니까 그 현장이 너무 좋고 따뜻함이 느껴졌어요. 내가 꼭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죠. 또 서울장차연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장판 말고도 홈리스, 성소수자 등 다양한 집회나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어요. 농성장 땜빵도 어떤 관점으로는 그냥 맹목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현장에 꼭 필요하면 내가 가서 힘 보태는 게 좋아요. 최근엔 지하철 역사 삭발식에 자주 갔는데 거기 가면 자주 울어요. 내가 울음이 많기도 하지만, 매일 봐도 매번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뭐 꼭 모범적으로 보이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내가 필요하다고 요청이 오면 그냥 내 마음이 그렇게 가요. 


♣ 영 : 재현님이 받았던 외로움 같은 걸 다른 사람이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간가요?


♠ 현 : 그렇죠. 그런데 최근에 이런 고민도 들어요. 예를 들어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동료상담가와 권익옹호 활동가가 있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각 센터가 사업화되면서 ‘지도점검’ 들어오고 ‘평가’ 들어오면 관련 계획서나 일지를 잘 쓰는 사람은 인정받는데 권익옹호 활동가로 열심히 투쟁하는 사람은 덜 인정받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부분이 무척 아쉽죠.


♣ 영 : 네. 투쟁 잘하는 활동가들도 센터 내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현 : 나뿐만 아니라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중증장애인 활동가들이 많을 거예요. 아무튼 그런 농성장이나 현장 투쟁이 진짜 소중하고 소중하니까 꼭 가야 하고, 그 자리를 함께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 현 : 내 이야기는 잠시 멈추고 다시 아영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아까 노들야학에 오게 된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그래서 노들 활동은 재미있었나요? 


▶ 아영님



♣ 영 : 진짜 재미있었어요. 예전 민구 형 말이 아주 정확해요. 노들야학에 와서 야금야금 맛을 알아가는데 너무 맛있다고 했거든요. 노들야학이라는 공간이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세상의 틀과 완전히 다르고 생각하지 못한 영역의 많은 것을 고민하게 했어요. 이전 삶에서 주변으로부터 받은 것은 힘들고 스트레스받는 긴장감이었거든요. 예를 들면 시험 잘 봐야 하고, 점수 잘 받아야 하고, 돈 많이 벌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노들의 긴장감은 전혀 스트레스가 아닌 거였어요. 아주 기분 좋은 긴장감이라고 할까요? 대학 3학년 때 자원활동으로 들어가서 교사를 했고 상근자도 아닌데 거의 매일 노들에 갔어요. 교사회의도 거의 참여하고, 그린라이트도 나가고 그랬죠. 


♠ 현 : 지금도 그 기분 좋은 긴장감이 여전하신가요? 


♣ 영 : 지금은 약간 직업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많이 사랑해요. 아무튼 노들의 맛을 보니까 정말 그 맛을 더 느껴보고 싶어서 상근을 결심했죠. 노들이라는 공간은 나한테 이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은 삶이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하게 한 곳이에요. 사회가 요구하는 경쟁을 해봤자 쓸데없다는 걸 처음 알게 됐죠. 다른 어떤 고민이나 갈등도 경험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을 수 있다’라는 경험을 노들에서 하게 됐죠. 그래서 너무 좋았고, 제안하는 일들을 덥석덥석 받았죠. 


♠ 현 : 노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시네요. 서울장차연 활동은 어떻게 시작한 거예요?


♣ 영 : 노들 교사로 활동하면서 비마이너에서 4개월간 인턴 기자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가 다시 복학해서 졸업 준비하는데 방학 때 서울장차연 명절 특판 사업 담당을 제안받았죠.


♠ 현 : 재정 사업이요?


♣ 영 : 네. 그 당시 최저임금보다 더 많은 활동비를 준다기에 냉큼 한다고 했죠. 전장연 사무실에서 일하는데 정말 다양한 전화가 걸려 왔어요. 내가 비마이너 활동 경력이 있어서 여러 사안에 잘 대처하니 사람들 눈에 띄었나 봐요. 당시 서울장차연 양유진 활동가가 같이 일하자고 계속 꼬셨어요. 당시 유진, 현수, 다운 등 전장연 활동가들이 정말 재밌었어요.


♠ 현 : 대학교는 졸업하고요?


♣ 영 : 아니요. 서울장차연 활동하면서 1년 동안 학교에 다녔어요. 사무처에서 목요일 하루를 빼주고 대학 졸업하는 거 보장해 준다고 했어요. 거의 하루에 수업을 몰아서 다 들었어요.


♠ 현 : 대단하네요. 


♣ 영 : 다른 날 야간수업 듣고 해서 진짜 꾸역꾸역 졸업했어요. 농성장에서 졸업 논문 쓴 게 기억나네요  서울장차연에서 활동하는 데 일이 정말 많았죠. 그때가 박근혜 퇴진 시기였어요. 경기장차연에서 이동권 문제로 단식 투쟁할 때 경기지역 총괄도 맡고, 광화문 농성 집행부로도 활동하고, 서울지역 전체 자치구 투쟁도 했어요. 1년을 정말 정신없이 보냈어요.


♠ 현 : 1년 동안 활동한 거예요?


♣ 영 : 네. 1년이요. 활동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보가 그 많은 걸 다 경험했다고 생각해 봐요. 그때 전장연이 종로장애인복지관 옥상에서 농성했잖아요.


♠ 현 : 아, 생각나요. 


♣ 영 : 제가 그 농성장 담당이었거든요. 농성장 가는데 버스 안에서 눈물이 막 흐르는 거예요. 나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나. 계속 이렇게는 못 살겠는데 어떡하지? 이런 생각이 들었고 갑자기 무서웠어요. 이렇게 가다가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갑자기 급 현타를 맞은 거죠.


♠ 현 : 그런데 아까 노들에 와서 느꼈던 즐거운 긴장감 같은 것들을 많이 이야기했는데 서울장차연 활동하면서 그런 것들이 다 깨져나가고 변질된 건 아니잖아요? 단순히 일이 너무 많았던 거예요?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 영 : 감정적으로 벅찼던 것 같아요. 일단 일이 많았죠. 일도 많고, 뭘 생각할 시간도 없고, 그런 과정에서 나의 개인적 관계들이 다 끊어지기 시작했어요.


♠ 현 : 어떤 상태인지 대충 이해가 돼요. 



▶ 재현님(왼쪽)과 아영님(오른쪽)


♣ 영 : 그런 상황들이 서울장차연에서 활동하면서 본격화되었죠. 너무 바쁘니까 가족하고도 거의 연락 못 하죠, 친구들 다 떨어져 나갔죠. 그러니까 여기 있는 활동가들과의 관계가 아니면 난 너무 고요한 사람이 돼 버린 거예요. 이런 상황이 아주 이상하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너는 친구 아니야 하면 나는 아무런 친구도 없어요. 


♠ 현 : 참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아영님 이후에도 새 활동가들이 많이 들어왔잖아요. 끊임없이 활동가들이 바뀌면서 자기를 소진하고 다시 또 들어오곤 하죠. 당시 아영님 경험을 잘 이야기하면 지금 중앙 활동가들도 좀 더 잘 조절하면서 활동하는 데 도움이 되겠네요.


♣ 영 : 그때 나는 사실상 그만큼 버틸 끈기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나는 대중조직이라는 노들야학에 자원활동으로 들어갔고 그 활동이 길었던 것도 아니고 아주 깊숙이 관여하면서 상근활동을 오래 한 것도 아닌 채로 바로 중앙조직으로 간 거잖아요. 조직도, 기획도, 투쟁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중앙활동을 시작하니 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몰랐던 거죠.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지금의 내가 됐다고 생각해요.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그만뒀을 것 같아요.


♠ 현 : 그러다가 어떻게 노들 법인에서 일하게 된 거예요? 


♣ 영  교장 선생님이 연락했어요. 처음에 회계로 들어갔어요. 2017년부터 약 2년 동안 일했죠.


♠ 현  사무국장 하다가 왜 갑자기 영화를 찍고 싶어졌어요.


♣ 영 : 노들에 있다 보면 시트콤 같은 잔재미들이 진짜 많거든요. 그런데 내부 사람만 재미있고 또 노들이라는 공간에서 드러나는 사람만 드러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잘 안 드러나죠. 그게 좀 아쉬웠어요. 그러던 중에 전장연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영상 미디어 교육을 하더라고요. 장호경 감독이 3일 동안 진행했어요. 영상 찍는 방법과 편집 등을 배웠죠. 교육을 마치고 영상을 찍기 시작했는데 무척 재밌더라고요. 야학 수업시간에 노들 학생들하고 영상을 찍어서 노들야학 유튜브에 많이 올렸어요. ‘후원주점에 오세요’ 같은 홍보영상이었죠. 비마이너에서 제안해 영상 기사도 만들어봤고요. 그렇게 영상을 쭉 만들다 보니 진짜 재밌더라고요. 



▶ 아영님


♠ 현 : 어떤 활동이든 재미있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하죠. 


♣ 영 : 그 과정에서 좀 더 전문적으로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현 : 지금은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에서 일하는데 여전히 바쁘고 재미있어요? 


♣ 영 : 요즘 마을 영화제와 배급사업 등을 하는데 진짜 바빠요. 마을 영화제를 거의 30개 지역 정도하고, 배급도 약 300개씩 하고 있죠. 


♠ 현 : 배급을 300개나 해요?


♣ 영 : 그러니까 영화 한 편을 300회 정도 상영하는데 이 일을 혼자서는 못하니까 나눠서 하고 있어요. 거기다가 직접 영상 제작도 하고요. 지금은 비상근으로 일해요. 


♠ 현 : 아, 비상근이에요?


♣ 영 : 영상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싶어서 올해 5월 말께 상근활동을 정리했어요.


♠ 현 :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세요?


♣ 영 : 네, 만족합니다.


♠ 현 : 아영님의 요즘 고민은 뭐예요?


♣ 영 : 없어요. 최근에 고민을 한번 싹 정리해서요. 하하. 저는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고 고민할 시간에 빨리 행동하자는 주의죠. 


♠ 현 : 요즘 영상의 핫한 소재는 뭔가요? 


♣ 영 : 지하철 투쟁이죠.


♠ 현 : 아영님의 정체성은 현재 감독인가요, 활동가인가요?


♣ 영 : 영상 활동가죠. 이제 상근은 안 하지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활동가로 있는 이유는 제가 찍을 영상이 다 장판 영상이고, 장판 영상을 잘 담고 싶기 때문이죠. 그런데 조금 헷갈릴 때도 많아요. 내일도 지하철 투쟁 짐 옮기러 아침 일찍 가야 하거든요. 하하


♠ 현 : 그럼 아영님은 감독도, 활동가도 아닌 건가요? 


♣ 영 : 둘 다인 거죠. 그렇게 투쟁용품들 다 옮기고 나면 바로 영화 찍어요. 멋지죠? 하하. 재현님은 요즘에 고민되는 점이나 힘든 점이 있나요? 


♠ 현 : 사실은 몸이 좀 많이 힘들죠. 지하철 투쟁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해 12월 13일부터 나름 꾸준하게 결합하고 있는데 고민되는 부분은 활동가들이 많이 지쳐가는데 이 투쟁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 걱정돼요. 주변 사람들이 좀 쉬라고 하는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투쟁이 있으니 무조건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이죠. 내가 광화문 농성 때부터 결합해서 나름 꾸준히 해왔던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이번 투쟁이 이전 투쟁보다 더 많은 욕을 먹어서 좀 더 지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물론 이렇게 이야기해도 한 3, 4일 쉬면 또 오체투지 하겠다고 자원하겠지만요. 



▶ 재현님


♣ 영 : 육체적인 힘듦이 더 큰가요, 아니면 빨리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게 더 큰가요? 


♠ 현 :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쉬면 될 것 같은데 빨리 끝나지 않을까 봐 걱정돼요. 기약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요. 어떤 투쟁이 마무리되면 또 다른 투쟁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아까 센터 얘기도 했지만, 비단 우리 센터뿐만 아니라 투쟁에 결합하는 활동가는 어느 곳이나 알게 모르게 정해져 있어요. 우리의 투쟁이 일부의 싸움은 아닌데 결합하는 활동가는 일부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서 그런 피로감도 있어요.


♣ 영 : 지금 재현님에게 힘이 되는 게 있다면요?


♠ 현 : 이렇게 동지들이랑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게 큰 힘이 돼요. 오늘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차별받았던 것도, 장애인운동에 대한 의지도 얘기했잖아요. 센터 가면 매일 업무 이야기하고 뭘 언제까지 하고 그런 것만 처리하면서 많이 피곤해지거든요. 그런데 지금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들어줄 동지가 있다는 게 참 좋아요. 휴식을 취해서 육체적으로 힘을 모으는 것도 좋지만, 이런 얘기 한 번씩 하면 속이 다 시원해져요. 내일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요.


♣ 영 : 끝으로 동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 현 : 모두 하나 된 마음으로 끝까지 투쟁하고 함께 갑시다. 투쟁!


♣ 영 : 네. 저도 오늘 재현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 나누고 더 자세히 알 수 있어서 좋았어요. 수고하셨습니다.


♠ 현 : 네. 수고하셨습니다. 


▶ 카메라를 바라보며 주먹인사를 나누고 있는 아영님(왼쪽) 재현님(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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