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 성북아리는 성북 + 아리아리를 합친 말입니다.
아리아리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자, 그래도 없으면 길을 만들자”라는 우리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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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 성북아리로 기억하는 장애해방열사 ⓸] 최옥란, 이현준 열사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2-09-30 조회수 : 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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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아리로 기억하는 장애해방열사 ⓸] 


최옥란 열사 (1966~2002) 

[중증 뇌병변장애. 2002. 3. 26. 사망 당시 36세. 벽제중앙추모공원]


28만원으로 한 달을 살 수 있는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신자유주의와 정리해고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악용되고 있다.

■ 장애인운동에 헌신하다 심장마비로 사망


-. 동지의 삶 

최옥란 열사는 이 땅에서 장애인, 여성, 빈민이라는 차별의 계급 구조에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중증 뇌병변장애인이었던 열사는 터무니없는 수급비 때문에 생존 자체를 위협받자 생존권을 스스로 쟁취하려고 노점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허술한 법적 허점과 목디스크 치료 등을 위해 의료보호 대상자가 되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노점을 포기하고 수급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1인당 월 소득이 33만원이 넘으면 수급권자가 될 수 없었고 수급권이 통합급여로 이뤄져 의료보호 또한 받을 수 없었다. 


열사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투쟁으로 돌파하고자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요구하며 명동성당 앞에서 노숙투쟁을 진행했다. 정부가 당시 열사에게 지급한 돈은 생계급여(26만원)와 장애인수당(4만5천원)을 합해 30만5천원에 불과했다.(’02년 기준) 당시 열사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금액은 68만원 정도였다. 따라서 열사가 생존하기에 수급비는 턱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오히려 정부에서 받는 금액 이상 빚을 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열사는 이같이 전혀 현실에 맞지 않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항의하기 위해 정부에서 지급한 월 생계급여 26만원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되돌려 주기도 했다. 또한 “현재의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최저생계비 산출방식이 개인별, 가구별 특수성을 무시하고 행정편의적이고 일률적으로 이뤄졌다”며 “가구유형과 특성을 고려한 산정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항의했다. 열사는 “현행 최저생계비에 기초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헌법상의 행복추구권과 평등권을, 그리고 최저생계 보장이라는 법의 취지에 위배된다”라며 헌법소원을 내기도 했다. 


또한 이혼 뒤 아들의 양육권 문제도 이어졌다. 아들에 대한 양육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통장에 어느 정도의 돈을 넣어두어야 한다는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통장에 7백만원 가량의 돈을 모았으나 오히려 이 돈 때문에 일정한 소득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수급권자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았다. 열사에게 양육과 수급권 중 한 가지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뇌병변 중증장애여성의 몸으로 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정열적으로 투쟁해왔던 동지였지만, 가난으로 모성권마저 포기해야 하는 현실은 힘겨웠다. 열사는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도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해 서울역 선로 점거 투쟁에 나서 15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장애인으로, 여성으로, 수급권자로 그리고 실업자로 살아야 했던 열사는 어떠한 호소에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 아이의 양육권과 쥐꼬리만 한 수급권을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 사이에서 괴로워하다 극약을 마시고 병원에서 치료 중 끝내 심장마비로 운명했다.


-. 역사적 의의 

열사의 삶과 투쟁은 소위 국민의정부의 폭력성과 민중의 빈곤문제에 대한 무지를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최옥란 열사의 명동성당 앞 국민기초생활보장법 투쟁은 열사의 죽음 이후 ‘기본생활권쟁취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현실화를 위한 연석회의’로 재구성되어 투쟁을 지속했으며, 2004년 ‘빈곤문제해결을 위한 사회연대’로 전환된 뒤 현재 ‘빈곤철폐를 위한 사회연대’로 바꾸어 활발한 반빈곤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중심으로 한 진보 장애인운동계는 2005년부터 최옥란 열사의 삶과 투쟁을 기리며 열사의 기일인 3월 26일에 ‘전국장애인대회’ 및 ‘장애해방열사 희생자 합동추모제’를 열어 그해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을 선포하고 5월 1일까지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이현준 열사 (1965~2005)

[중증 근이영양증. 2005. 3. 16. 사망 당시 40세. 강화도 황청포구]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 내 말을 들어! 



■ 장애인운동에 헌신하다 잠자던 중 호흡곤란으로 사망  


-. 동지의 삶

열사는 평소 몸에서 근육의 힘이 점점 약해지는 근이영양증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사망 당시 직접적 사인은 가래가 기도를 막아 생긴 호흡곤란이었다. 열사는 수면 중 몸을 뒤척여주는 고가의 의료장비를 자비로 구매해 사용했다. 그러나 당시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세심한 가래를 계속 빼주고 지켜줄 활동보조인이 없었다. 이따금 일하던 단체의 지원이나 자비로 활동보조인을 구하기도 했지만, 당시 사회적 지원체계는 크게 부족했다. 


열사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근육장애가 더욱 심해져 90년대 초반부터 집안에서만 생활했다. 책 읽기와 글쓰기는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당시 피시통신이 보급되면서 열사는 ‘장애인복지통신-나누리’ 동호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열사는 중증장애인의 관점에서 시혜와 동정을 거부하는 글을 올리고 토론하며 올바른 인식과 정부 정책의 방향 전환을 요구했다. 당시 열사가 활동하던 동호회는 1년이 채 되지 않아 800여명이 넘는 회원이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장애인문학지 ‘솟대문학’에 ‘셰익스피어 속에 나타난 장애인관’이란 글이 평론분문에 당선되고, 다양한 언론매체 기고 활동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왜곡된 편견과 차별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열사가 살아생전 원했던 삶은 중중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이었다. 자유롭게 버스를 타고, 거리를 거닐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삶이었다. 그러나 속도와 자본만이 최우선 가치가 되어버린, 모순으로 점철된 한국 사회에서 중증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몸이 아무리 아프고 힘겨워도 스스로 나서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평소 차별받는 당사자가 무엇이 차별이고 편견인지 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 한 그 무엇도 저절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외친 열사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투쟁 등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열사는 활동지원서비스가 제도화되지 않은 당시 자립생활에 도전해 홀로 살다가 호흡곤란 등의 증세로 사망했다. 


-. 역사적 의의 

열사는 장애인, 특히 근육장애인들의 열악한 삶을 글로 풀어내 대중에게 알려냈으며, 객원기자와 사진작가 모임 등에서 활동하는 등 장애인 문화예술 활동을 다양하게 펼쳤다. 특히 열사는 활동보조제도화 투쟁, 장애인차별금지법 투쟁, 탈시설 자립생활 투쟁 등 중증장애인들의 권리 확보 투쟁에도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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