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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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 기고] 비장애인 중심의 노동은 없다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1-03-25 조회수 : 2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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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애인 중심의 노동은 없다

: 자본주의적 노동을 넘어선 새로운 노동 개념 정립을 위하여


정창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동권위원회 간사)




흔히 ‘비장애 중심주의’로 번역되는 에이블리즘(ableism)은 ‘~를 할 수 있는 몸’과 ‘~를 할 수 없는 몸’을 구별한다. 혹은 능력 수준에 따라 몸들을 등급화한다. 장애학 연구자 김도현의 말처럼 에이블리즘은 본질적으로 능력주의이다. 그렇다면 어떤 ‘능력’일까? 오늘날에는 다양한 능력들이 에이블리즘과 맞물려 논의되고 있지만, 사실 ‘장애인’이라는 용어는 적어도 기원적으로는 ‘생산성 없는 몸’을 솎아내기 위해 규정되었다. 자본이 고용하여 이윤을 창출하는 데 써먹을 만한 몸을 갖추었는지, 다시 말해 임금노동의 형태로 착취당할 노동력을 갖추었는지 아닌지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분할선인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스스로 벌어 먹고살 수 없는 이들이 쉽게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되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이 노동 영역뿐 아니라, 생활 영역 전반에서 장애인 차별을 양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 고 김재순 장애인 노동자 49재를 맞아 이삼헌 무용가가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추모공연을 하는 모습. 비마이너 이가연


그런데 나는 최근 장애인운동계가 구호로 흔히 사용해온 ‘비장애인 중심의 노동 환경 철폐’라는 말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수많은 비장애인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일터에 매일같이 출근한다. 고작 일하다 다치지 않게, 죽지 않게 해달라는 요구 하나를 관철하기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해야 한다. 온종일 일해도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처참한 수준이고, 그 비루한 생활을 안정적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소박한 욕구조차도 사치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운이 좋아 월급 좀 많이 받으면 뭐하나. 하루 8시간만 일해도 되면 뭐하나. 그가 생산한 가치 중 상당수 역시 자본에 빼앗겨버리는 것을.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과연 노동 환경의 ‘중심’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노동 영역에서 장애인-비장애인 간에는 분명한 차별이 있다. 장애인 고용률은 비장애인 고용률보다 압도적으로 낮고, 고용된 장애인이라 할지라도 불안정한 일자리, 저임금 일자리에 고용된 경우가 태반이다. <최저임금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장애인 노동자가 약 1만 명에 달하고, 비교적 질 좋은 일자리에서 일하는 장애인이라 할지라도 노동 과정에서 온갖 차별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생산 현장이 ‘비장애인 중심’으로 구성된 건 아니다. 지금의 노동 환경은 ‘능력 있는’ 비장애인들이 효율적으로 착취당하기 좋은 조건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에이블리즘이 가득한 현실은 장애인, 비장애인이라는 두 범주 사람들 간 차별에 대한 피상적 인식만으로 규명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능력에 따라 나누고, 끊임없이 차별을 재생산하는 ‘주범’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즉 인간을 자신의 쓸모에 따라 ‘능력 있는 자’와 ‘능력 없는 자’로 분할하는 자본을, 그리고 그 분할에 따라 능력 있는 자의 노동력은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착취하고, 능력 없는 자의 신체는 사회 바깥으로 내몰아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는 어딘가에 가두어 버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겨냥해야 한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존 장애인 노동에 대한 접근들은 대부분 현 생산 체계에 부적합한 노동력을 노동 시장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노동력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해왔다. 이러한 장애인 노동에 대한 접근들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의도가 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장애인의 ‘현 상태’를 ‘생산성 없는 신체’로 낙인찍는다. 이러한 사고에서는 누군가를 ‘불구화’하는 사회적 조건을 결코 염두에 두지 않으며, 그가 ‘생산성 있는 신체’로 거듭날 가능성에만 강조점을 찍을 뿐이다. 에이블리즘으로 가득 찬 세계 자체를, 자본이 생산과정 전체를 통제하고 있는 이 체제 자체를 변혁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은 채, ‘장애인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그저 에이블리즘에, 그러므로 곧 자본의 지배 논리에 순응해 온 것이다.

                                     

                               ▶ 2017년 장애인고용공단 점거 농성 장면 전장연


한편, 이마저도 성과는 좋지 못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할 수 있는 신체’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장애인 중에서도 경증장애인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재활에 실패한 이들 혹은 재활조차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는 일자리가 부여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손쉽게 시혜성으로 여겨지곤 한다. 실제로 민간 시장으로의 진입을 목표로 한다는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의 노동 혹은 각종 공공일자리에서 수행되는 노동의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건 이미 널리 인정되고 있으며(어떤 이들은 그래서 ‘있으나 마나 한 일자리’라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이 노동자들은 좀처럼 ‘노동자다운 노동자’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그 평가 기준이 매우 자의적일 수밖에 없는 ‘작업능력평가’를 통해 장애인들 상당수가 최저임금 적용에서 제외되는 것 역시 바로 이러한 사고와 긴밀히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기존 민간 노동 시장으로의 진입’, 그리고 이와 긴밀히 연관된 장애인 의무고용률 준수 투쟁이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며, 분명 현재의 장애인운동계는 이를 실질화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시도들은 특히 경증장애인들이나, 실제로 비장애인 노동자들과 ‘동일 노동’(그런 게 정말로 있다면)을 하건만 임금이나 인사상에서 각종 차별을 받는 이들의 삶을 충분히 낫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장애인-비장애인 간 통합적 생산 현장이 구성되고, 기업들이 의무고용률을 지키기만 한다면, 과연 노동에서의 차별이 사라질 것인가? 자본 중심의 생산성 기준을 체득한 공정성과 능력주의의 이데올로기, 그러므로 에이블리즘과 긴밀히 맞닿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노동자 대중들의 사고 전반을 이미 잠식해버린 이 시대에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그리고 더 핵심적이고 결정적으로 ‘착취당할 수 없었던 자’를 ‘착취당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어떻게 장애해방의 길, 노동해방의 길이라 할 수 있을까? 


분명히 말하건대, 에이블리즘에 대한 ‘근본적’ 저항은 결코 장애인-비장애인이 동일하게 ‘억압’받을 수 있는 조건을 구성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에이블리즘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은 곧 지금의 생산 양식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며, 이윤 창출을 위해 생산과정을 통제하는 자본의 권력을 민중의 수중으로 탈취해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노동 개념을 지양하고, 새로운 노동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각종 실험에 나서야 한다.

                             

               ▶ 지난해 8월 노들장애인야학 개교기념식에서 서울시 권리중심형 공공일자리 노동자인 ‘노들테크노전사’들이 공연하고 있다. 정택용, 비마이너


2020년 7월 1일, 진보 장애인운동계의 오랜 투쟁 성과로 서울시에서 ‘권리중심 맞춤형 공공일자리’가 시행되었다. 이 일자리는 여태껏 한 번도 임금노동을 경험하지 못한, 즉 이 사회에서 흔히 생산성이 가장 떨어진다고 평가하는 중증장애인을 최우선으로 고용한다. 또한 이 일자리는 애초부터 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하는 생산 활동을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 일자리 노동자들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UN CRPD) 내용의 실질화 및 각종 장애인 차별 철폐를 위해 노동한다. 이는 자본의 이윤 창출과 무관한 공공적 가치생산활동 혹은 ‘권리생산노동’이라 할 수 있다.


나 역시 이 일자리가 자본주의적 노동 개념을 바꿔내는 완벽한 대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애인 노동권 향상을 위해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기존의 노동 개념 자체가, 혹은 ‘능력-무능력’의 틀을 양산하는 현재의 노동 조건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 결코 아니었음을 전 사회에 폭로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노동자 개개인의 몸이 자본이 요구하는 노동력 상품으로 거듭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또한 자본 중심의 노동 환경을 장애인 노동자 자신들이 더불어 노동할 수 있도록 바꿀 것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 이 일자리는 민간시장으로의 이전을 위한 역량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공공적 가치 생산과 사회 변혁을 위한 중증장애인 노동자 당사자의 역량을 키워나간다.


진보 장애인운동에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새로운 노동의 상상을 실체화해서 하나하나 실천해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계를 ‘파괴’하더라도 이윤을 창출하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생산적’이라고 불리는 이 모순적 경제시스템을 멈춰 세우기 위해, 임금노동의 착취 형태를 끝장내고 인민 자신들이 생산과정에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부터 새로운 노동의 형태를 끊임없이 창발해 가야 한다. 


비장애인 중심의 노동은 없다. 오로지 자본 중심의 노동이 있을 뿐이다. 장애해방, 노동해방의 길은 비장애인 중심의 노동 환경 철폐를 넘어 자본주의적 노동 개념 자체를 근본부터 변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단숨에 그것을 성취하기가 힘들다면, 부족한 상상들부터 차근차근 실천해 가면서. 그리고 그 실험들에 대한 우리의 끝없는 논쟁 속에서 지속해서 그 내용을 변화 발전해내는 혁명의 꿈을 실천해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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