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 성북아리는 성북 + 아리아리를 합친 말입니다.
아리아리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자, 그래도 없으면 길을 만들자”라는 우리말입니다.

성북아리

[1호 - 서로인터뷰] '계몽이 아니라 전염이다'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1-04-05 조회수 : 2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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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변화시키는 일은 계몽이 아니라 전염이다’


 ‘성북아리’는 장애인운동 활동가 두 사람이 서로를 인터뷰하는 ‘서로인터뷰’ 꼭지를 마련했습니다. ‘서로인터뷰’는 일방적인 인터뷰가 아닌 상대방의 인터뷰어가 되어 서로 생각을 나누는 꼭지입니다. 첫 번째로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김수경 활동가와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안일환 활동가가 만났습니다. (편집자 주)




▶ 안일환님(왼쪽)과 김수경님.


♣︎ 안일환(아래 ♣︎ 환) : 안녕하세요. 안일환입니다. 활동한 지는 올해로 9년째네요. 의정부 세움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다가 2018년 3월부터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 김수경(아래 ♤ 경) : 저는 수경이라고 하고요.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활동한 지 3년 9개월 째네요. 4년 차라고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데 일환 님이 9년이라고 하니 아주 아득하네요. 9년 전에 나는 뭘 하고 있었지?


♣︎ 환 : 활동지원사 하고 있었다고 들었어요.


♤ 경 : 맞아요. 9년 전에는 활동지원사로 일하고 있었네요. 


♣︎ 환 : 먼저 보내주신 이력서 재밌게 봤는데 일단 메일 아이디가 chinagirl(차이나걸)로 돼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 경 : 제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면 열 번 중 여덟 번은 물어봐요. 왜 chinagirl이냐. 제가 초등학교 4~6학년을 중국에서 살다 왔어요. 한국에 와서 이메일 주소를 새롭게 만들어야 할 상황이 왔는데 뭘 해도 이메일 주소가 중복 아이디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좀 특색있는 거 없을까 하다가 chinagirl93을 해봤어요, 제가 93년생이거든요. 진짜 어딜 가도 chinagirl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제껏 모든 인터넷 사이트에 chinagirl93이라는 아이디를 쓰고 있습니다. 지금은 좀 부끄럽기도 해요. 


♣︎ 환 : 어떤 점이 부끄러워요?


♤ 경 : 약간 그냥 무난하게 skk, 수경김 이렇게 하거나 이름도 있는데, 차이나걸은 좀 웃기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하면 두 번째 질문이 나올 거 같은데, 중국어 대박 잘하겠다, 이런 질문. 그런데 제가 중국어를 못 배웠거든요. 중국어는 한국 와서 뒤늦게 배웠어요. 중국에선 외국인 학교에 다녀서 국제학교에서 영어를 썼고,

 

♣︎ 환 : 아, 그러면 영어 잘하시겠네요?


♤ 경 : 세 번째 질문이 그거에요. 그러면 영어 잘하시겠네요? 영어는 그냥 적당히 합니다. 미국에 떨궈놨을 때 죽지 않을 정도로 합니다. 


♣︎ 환 : 초등학교 때 가신 거면 부모님 일 때문에 가신 건가요?


♤ 경 : 네.


♣︎ 환 : 저는 개인적으로 외국어를 하는 사람을 보면 멋져 보여서 그러는데 혹시 중국어로 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 경 : 따자하오~~~ 워슈 한고릉............. 


♣︎ 환 : 잘하시는데요? 무슨 뜻인가요?


♤ 경 : ‘여러분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수경이고요, 29살이고 중국어를 참 좋아합니다.’ 이 정도 했어요.


♤ 경 : 일환님은 1살 때 장애를 입었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비장애인으로 산 삶의 경험이 거의 없으신 거네요. 그러면 어린 시절 장애인으로 살아가면서 독특한 경험이나 차별 경험, 이런 것들이 있나요? 




♣︎ 환 : 일단 차별적인 것이랑 독특한 경험을 나눈다면, 사실 제가 어렸을 때는 다른 장애인들이랑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없었어요. 그냥 비장애인 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이었던 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차별인지 아닌지 구분조차 못 했던 거죠. 친구들이 괴롭히면 그냥 괴롭히나보다, 놀리면 놀리나보다 이 정도였던 거죠. 그 속에는 장애 때문에 놀리는 경우도 있었고. 그런 경험들은 수두룩한데, 오히려 이런 게 조금 특이했던 것 같아요. 약간 장애인인데 비장애인 아이덴티티(정체성)를 어떻게 유지할까, 조금 아등바등했던 것 같아요. 그 속에서. 


♤ 경 : 본인이 장애인이라는 인식이 좀 있었어요?


♣︎ 환 : 너무 어릴 때부터 그래서 그런지 그런 인식 자체가 없었어요. 나는 장애인이구나, 비장애인이구나 이런 게 없고, 그냥 나는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겠네요.


♤ 경 : 나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라, 이런 인식은 있으셨지만, 장애/비장애 이런 구분이 없었을 수 있겠네요. 


♣︎ 환 : 네, 그냥 그 당시에는 장애가 걸림돌이 되었다고 느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친구들이랑 놀 때 ‘장애’라는 것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피시방에 갔을 때 주 출입구에 턱이 하나 있으면 휠체어 들고 올라가고, 계단이 있을 땐 제가 바닥에 앉으면 휠체어를 네 명이 들고 올라가고, 화장실 문제는 전동휠체어만 있으면 제가 왔다 갔다 하니까, 저는 계단에 있다가 애들이 올려놓으면 부축받아서 같이 올라가고. 이렇게만 하면 되게 아름답죠. 근데 그 과정 속에는 “야 저 새끼 버리고 가자” 계단 앞에서 장난으로 힘들어 죽겠다면서 “이거 들어줬으니 음료수 한 잔씩 쏴야지?” 이런 농담들.... 그렇다고 안 사줬다고 싸우거나 그런 건 아니고. 피시방 시간이 다 끝나가면 “이제 쟤 버리고 우리 가자” 이런 이야기들을 장난처럼 나눴죠.

 

♤ 경 : 활동지원서비스가 없던 시절 이야기네요. 걸어본 경험은 한 번도 없으신 거예요?


♣︎ 환 :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는 걸어 다녔어요. 정확히 제 기억은 아닌데, 7살까지는 못 걸었대요. 어머니 말로는 경희대병원에서 침을 맞았는데 그때부터 걸었대요.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 걸어 다닌 기억이 있어요. 비장애인이 도보로 5분이면 가는 거리를 15분 정도 어머니랑 항상 손잡고 갔던 기억이 나고, 오른발은 힘이 있는데 왼발은 상대적으로 힘이 적어요. 그래서 절뚝이면서 걸었던 것 같고, 그 시기에 ‘장애인들도 운동하면 비장애인들처럼 걸을 수 있다’ 이런 교육을 너무 많이 받은 거죠. 엄청 걸어 다녔어요. 일부러 더. 학교 끝나면 운동장 세바퀴 정도 돌고 집에 가고, 주말에 나가서도 걷고 그랬었는데.


♤ 경 : 재활을 위한 노력을....


♣︎ 환 : 맞아요. 문제는 거기서 안 좋은 자세, 무리한 운동 때문에 장애가 더 심해졌어요. 그래서 골반이 틀어지고 뼈가 빠져있고, 이렇게 되면서 6학년 때 통학을 평소처럼 해야 하는데 못 걷겠는 거예요. 그때 이후로 휠체어를 타게 됐어요.




♤ 경 : 일환님 저랑 나이가 비슷하네요. 저는 사실 어렸을 때 중증장애인을 만나본 적이 거의 없어요. 그냥 반에 지적장애인이 있으면 놀리고 왕따시키고 이런 정도를 경험했었는데, 어쨌든 중증장애인 친구들이 그해에 안 태어나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같이 학교에 다닐 수 없는 환경이었을 거고, 일환님은 저랑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중증장애인으로 지역에서 계속 살아오셨잖아요. 그냥 또 친구로 만나기도 하고, 친구들이랑 놀기도 하고, 흔히 친구들이라고 할 수 있는 툭탁거림에 장애라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애정에서 나오는 농담이기도 하고, 어쨌든 진짜 괴롭히려고 했으면 다르게 했을 텐데, 그러지는 않았던 것들이 사회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나랑 다를까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비장애인들과 얼마나 달랐을까 이런 것이 궁금했어요.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개인적인 성향도 궁금하고요. 성격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고. 사람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그래서 MBTI(성격유형 선호지표)가 혹시 뭔가요?

 

♣︎ 환 : 저는 스파크형이에요. en 뭐시기였는데, 굉장히 얌전한 사람이었어요. 사회관계를 맺는 것은 아마 남자애들하고 친해지는 거 보면 똑같은 거 같아요. 다만 조금 다른 점은 학기 초가 되면 저는 항상 불안했어요. 그리고 친했던 친구들, 부모님, 선생님 주변에서도 그런 걱정이 많았어요. 누구누구가 나를 챙겨줘야 하는데, 챙겨줘야 할 사람들이 없어진 그런 상황이 저도 불안했던 것 보면 은연중에 저도 친구들이 나를 도와줘야 한다고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그렇다 보니까 조금 더 대인 관계에서 필사적일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작년 친구가 올해 같은 반 되면 그런 것은 좀 없었고. 그 외에는 보통 남자애들 친해지는 게 같이 뛰어놀거나, 게임을 하거나 하는 거죠, 저희는 컴퓨터 세대이다 보니까 여러 가지 온라인 게임이 있었는데, 카트라이더, 서든어택 등 다양한 게임들을 섭렵했죠. 저는 현실에서 축구는 못 하지만, 축구를 굉장히 좋아해요. 그래서 축구 선수 등 축구 이야기로는 같이 어울릴 수 있던 것 같아요. 피파온라인 이런 축구게임에서는 나를 이길 사람이 없었죠, 지면 이길 때까지 했어요. 연습해서 피시방 가자 이래서, 


♤ 경 : 제가 왜 궁금하냐면 제가 사실 학창 시절 때 학교폭력을 경험했어요. 학폭 피해자였었는데, 저는 오히려 비장애인으로 살아가면서 친구를 사귄다는 게 엄청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아시겠지만 학폭의 상황이 되면 군중심리로 다음 학년도, 다다음 학년도 어려운 상황이 있어요. 그때 저에게 친구들이 ‘저 새끼 장애인 같아’라는 말을 욕으로 썼던 거에요. 그 당시에 ‘애자 같아’, ‘장애인 같아’ 이런 말들을 많이 했었고, 근데 그때 당시에는 장애인 감수성도 없었고, 내가 장애인이 아닌 걸 증명하려고 굉장히 애를 썼지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실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데 관계 맺기가 더 어려웠을 것 같다는 편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환님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굉장히 평범 그 자체의 삶을 살아오셨네요. 


♣︎ 환 : 조금 즐거운 면만 말씀드린 것도 있죠. 예를 들어서 이런 경우도 있었어요.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장애’와 관련된 표현들은 제가 학교 다녔던 시기에도 똑같았어요. 그게 욕으로 사용되고, 부정적인 말로 사용됐죠. 오히려 친구들이 제 눈치를 좀 봤어요. 친구들이랑 뭐 하다가 잘못하면 ‘너 장애인이야?’ 이런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러면 저는 쓱 한 번 쳐다보고 ‘응 나 장애인인데?’ 이러고 말았거든요. 친구도 그런 상황이 오면 당황해요. 물론 이런 것들이 상처가 되죠. 사회에서 바라보는 나는 장애인이니까. 그런데 ‘왜 이게 나쁜 의미지?’ 이런 의문이 있었고 그때 당시에는 내가 당당하지 않으면 애들이 더 괴롭힐 거로 생각했죠.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때까지 엄청난 일들도 많았어요. 친한 친구가 제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같이 욕을 했을 때 느꼈던 그 좌절감이라든지.... 한 학년을 통째로 왕따당한 적도 있어요. 왜냐면 제가 식판을 받아야 하는데 전동휠체어를 타고 식판 받기가 힘들어요. 이런 상황에서 밥을 한 끼도 못 먹었던 적도 있고요. 친했던 친구들은 다른 반에 있고, 자기들 밥 먹어야 하니까 신경을 못 쓰죠. 저는 그 반에서는 이미 ‘손 많이 가는 애’가 됐던 경험도 있어서 아예 밥을 안 먹었죠.
  이용당했던 경험도 있어요. 중학교 때 급식실이 생겼는데, 줄을 쭉 서잖아요. 선생님들이 제가 줄 서면 불편하다고 1순위로 빼주면서 ‘친구 세 명 골라라’ 하세요. 그러면 빨리 먹을 수 있잖아요. 애들이 저를 이용해서 돌아가면서 먹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이용당했던 경험도 있고.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그때 당시에는 그런 상황 때문에 장애 탓을 하진 않았어요. 어차피 저는 다른 친한 친구들이 있고, 학교 끝나면 그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았고 그러니 그냥 조용하게 공부만 하자 했던 것 같아요. 


♤ 경 : 재밌는 어린 시절을 보내셨네요.


♣︎ 환 : 사람마다 다 특별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겠죠. 지금은 말할 수 없는 특별한 시간도 있었죠. 관계를 만드는 것이 조금 더 예민했을 수도 있어요. 제 생존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수경님이 보내주신 이력을 보니까 대학 때 전공을 많이 하셨더라고요. 주전공 복수전공 부전공 등에 재활, 사회복지, 아동 학과 이렇게 있었는데 그렇게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 경 : 저는 어릴 때 꿈이 특수교사였어요. 특수교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중학교 때 시설에 자원봉사하러 갔는데 장애인들이 굉장히 불쌍한 거예요. 그래서 그때는 정말 동정과 시혜의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너무 안타까운 게 뭔가 ‘이 사람들도 교육을 잘 받으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아요. ‘이들을 잘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없었나 보다’ 이런 생각을 했었죠. 그래서 그들을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너무 되고 싶었고, 또 선생님이라는 직종이 굉장히 안정적이면서도 존경받는 직종이라는 그런 생각들이 섞이면서 난 특수교육학과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공부를 썩 잘하지는 못했는데 거기다가 수능을 대박 망했어요. 너무너무 가고 싶었던 학교에 특수교육학과가 있었는데 전혀 갈 수 없는 점수가 나왔죠. 엉엉 울면서 수능 끝나고 집에 처박혀 있었어요. 제가 갈만한 학교를 알아봤는데 그 당시에 재활학과가 교직 이수가 가능하대요. 그러면 전공과에 특수교사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입학했더니 교직 이수는 09학번으로 마감됐다는 거예요. 뜨악! 맙소사! 이렇게 된 거죠. 그래서 방법을 찾다 보니까 아동보육을 같이 하면 어린이집에서 특수아동 보육교사로 일을 할 수 있다 해서 그쪽으로 공부한 거죠.
  아동보육 수업 진짜 열심히 했어요. 복수전공만큼 수업도 다 들었어요. 마지막에 실습을 나가야 하는 시점에 저는 이미 운동권이 돼 있었지요. 제가 거의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어린이집 실습을 갔는데 어린이집의 구조와 보육교사의 노동환경 등에 굉장히 답답함이 많아서 일지에 열심히 썼어요. 그러다가 선생님들한테 혼났죠. 아이들과 교감하는 연습을 해야지 무슨 노동환경을 이야기하냐, 운동권 이야기를 여기에 쓰냐, 이런 일을 겪으면서 실습을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제가 3학년 때 재활학과에 개설됐던 장애인독립생활(IL) 수업을 들었어요. 그 수업을 들은 영향이 있었고, 그때 당시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여성주의도 굉장히 활발하게 일어나고, 또 세월호 사건도 겪고. 이런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 나는 활동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아동보육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마지막 학기에 보니까 제가 사회복지학과 수업을 되게 많이 들었더라고요. 그래서 몇 학점만 더 들으면 복수전공도 할 상황이어서, 부전공과 복수전공을 했더니 제가 졸업할 때 156학점인가 들었더라고요. 등록금 제대로 뽕 뽑았다 이런 상황이었어요.


♣︎ 환 : 저는 되게 연결이 안 되네요. ‘재활’이었다가 ‘자립생활’의 이념으로, 괴리감이 안 느껴졌나요? 3개월 실습인가 재활 관련 일도 하셨더라고요, 


♤ 경 : 제가 전공한 것은 직업재활이예요. 물리치료 이런 재활이 아니고. 교직을 이수할 시스템이 발달장애인들 중심으로 직업훈련하고 직업 연계하는 이런 전공인데 괴리감을 많이 느꼈어요. 왜냐면 저는 이미 활동지원사로 일을 하고 있었던 거죠, 그때 주변에서 활동지원사는 꿀알바라고 해서 했어요. 특별한 생각보다는 돈을 벌 수 있고 어쨌든 현장경험을 쌓아보자는 생각이었죠. 보호작업장에 가서 근로지원인으로 일했는데 정말 나라도 여기서 일하기 싫은 거예요. 대부분 덩치가 엄청 큰 남성 발달장애인들이 8시간 동안 수세미 포장하는데 공간도 겁나 좁고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런 상황 속에서 ‘이 사람들을 이렇게 붙잡아놓고 이 일을 시켜봤자 무슨 의미가 있지?’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 괴리감 속에 3학년 때 개설된 자립생활 수업을 들었죠. 장애인 자립생활 이념을 배우면서 그 괴리감에 대한 해답같이 느껴졌죠. 내가 현장에서 느꼈던 불편함과 답답함, 최선이 이것밖에 안 되나? 이런 의문 속에서 해답이 자립생활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자립생활 너무 좋아해요. 


♣︎ 환 : 저는 솔직히 쉽게 생각해서 대학생이 공부를 마치고 현장에 나왔을 때 ‘이게 아니네’ 이런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런 스토리가 있었는지 몰랐네요. 


♤ 경 : 2014년도 하반기에 자립생활 수업을 들었는데 그 전 학기에 세월호 사건이 터졌고, 여름방학에 사회복지관 실습을 갔어요. 그전까지 느꼈던 묘하게 답답한 상황들 속에 ‘이것은 정말 이상한데?’라고 생각했던 게 세월호 사건이었어요. ‘300명 이상이 배에 가라앉아 죽었는데 가만히 내버려 뒀다고? 2014년도에? 이건 세상이 잘못된 것 같아’라고 생각했죠.
  복지관에서 실습하면서 성인발달장애인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었어요. 성인발달장애인이니 다 성인인데 반말을 하는 거예요. ‘야 가서 불 꺼’ 이런 식인 거죠.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도 실습일지에 다 썼어요. ‘이것은 아닌 것 같다’라고 썼어요. 중간평가하는데 제 수퍼바이저가 “수경 씨는 너무 인권에 꽃혀 있는 것 같아요. 어디 가서 인권활동가 할 거예요?”라고 묻더라고요. 사회복지라는 것이 서비스를 잘 제공하기 위해 있는 것이니 그런 ‘인권’에 꽂혀있지 말라는 거죠. 그 실습 내내 너무 답답했어요.
  왜냐면 사회복지는 한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제공하는 서비스라고 생각했는데 인권에 너무 꽂혀있다고 이야기하니까 ‘그러면 나는 인권에 꽂혀있지 말아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었죠. 그다음 학기에 개설된 자립생활 수업을 들으면서 ‘진짜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 구조가 다 잘못된 거구나’라는 것을 해답처럼 찾아낸 거죠. 그다음 학기에 자립생활센터로 실습을 한 번 더 갔어요. 실습을 세 번 했네요. 그때 연합회쪽 센터로. 그때는 연합회니 협의회니 모르고 갔었고, 그러면서 ‘나는 정말 자립생활센터에서 일을 해야겠구나’하고 생각했었죠. 




♣︎ 환 : 저도 복수전공을 했었거든요. 저는 그때 꿈이 글 쓰는 사람이었어요. 왜냐면 글 쓰는 일은 되게 자유롭다고 생각했거든요. 친형이랑 7살 차이가 나서 이런저런 상담을 많이 했어요. 친구랑 싸웠는데 어떻게 할까 하면 형이 가서 물리쳐주기도 했죠. 나 뭐 먹고 살지 형한테 물어봤죠. 그랬더니 형이 딱 한 마디 하더라고요. “형이 나중에 당구장 차려줄게.” 그 말은 형도 저를 못 믿는다는 거잖아요. ‘내가 이 사회에서 직업을 갖고 생활할 수 없겠구나’하는 고민이 들기 시작했어요. 나 혼자 먹고살 방법이 없을까. 왜 나는 항상 가족들에게 짐이 돼야 하는 걸까.
  그런데 시 같은 것을 학교에서 수행평가로 많이 쓰잖아요. 되게 많이 칭찬받았어요.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고민인데 칭찬을 많이 받다 보니 진로를 국어국문학과로 생각하게 된 거죠. 대학 갈 때쯤 부모님하고 상담했더니 장애인들 직업과 관련된 레퍼토리를 이야기하시며 ‘공무원 해라’하시는 거예요.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데 너무 하기가 싫은 거예요.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공무원이 되면 학비를 절반 정도 감면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됐어요. 그래서 부모님과 딜을 했어요. 대학은 행정학과에 가겠다. 대신에 그다음부터는 내가 뭘 하든 상관하지 말아라. 이렇게 해서 행정학과에 갔어요.


♤ 경 : 그러다 어떻게 활동가가 됐죠?


♣︎ 환 : 그것도 되게 웃겨요. 대학교 과제 중에 구인구직 사이트에다 제 이력서를 올리는 게 있었어요. 그런데 졸업하고 나서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오늘 면접 보러 오래요. ‘제가 왜요?’ 되물었더니 장애인자립생활센터래요. 티브이에서 나오는 면접처럼 윗사람들 앞에 앉아서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원탁에 두 명이 앉아있어요. 자립생활이 뭔지 물어봐서 홈페이지에서 본 거 이야기했어요. 그러던 중에 국장이 오는 데 어디서 봤던 사람이에요.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 보장구 지원받을 때 봤던 분이 있었어요. 국장이 이런저런 것을 물어봐서 대답했죠. 그랬더니 ‘난 합격’ 이러고 나가요. 다음날부터 나오래요. 난 이번 주까지 쉬고 싶은데, 합격이라는 소리 하자마자 월급을 얼마까지 생각하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80만 원에서 120만 원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했더니 어디서 알아보고 왔냐고 물어봐서 인터넷에서 찾아봤다고 했죠. 그러니까 ‘맞다. 80만 원’이라고 해서 그때부터 활동했어요. 그전에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뭔지, 자립생활이 뭔지, 아예 몰랐어요. 


♤ 경 : 자립생활센터가 굉장히 빡센 현장 투쟁들이 있고 사회를 변화시켜야 하는 운동체라는 것을 언제쯤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 환 : 제 기억에 남는 게, 처음에는 사람들이 행진하러 간대요. 제가 22살이었거든요. ‘행진’하니까 캠페인을 생각했어요. 피켓 들고, 파란 조끼 입고 그런 것만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어요. 그런데 갑자기 경찰들 쫙 깔리고 ‘여긴 어딜까?, 난 여기 왜 있을까?, 왜 이럴까?’ 아무도 저에게 설명해주지 않았고요, 저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었고 항상 내가 피해당하는 게 더 익숙했는데 제가 차도에서 달리고 있는 거예요. 처음 활동한 센터에 비장애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어요. 휠체어를 탄 사람이 소장하고 저밖에 없었으니까. 비장애인들은 보행이 자유로우니까 보도블록을 왔다 갔다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저 혼자 신입이라는 이유로 현장을 지키고 있는 거예요. 경찰들하고 치고받고 싸우고.... 무서웠죠. 그래서 가만히 있었어요, 투쟁 현장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엄청 오래 걸렸어요. 그런 거부감이 없어지는 데까지.


♤ 경 : 어쨌든 9년을 하셨다는 것은 이 활동에 동의하신다는 것인데, 어느 특별한 순간이 기억나시나요?


♣︎ 환 : 한 사람의 삶이 변화됐을 때에요. 제가 만나던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서비스 제도가 그 사람에게 안 좋은 쪽으로 바뀌면서 그 사람의 삶 자체가 완전히 틀어 막혀 있었어요. 원래 이분이 다양한 활동을 했었는데 어떤 제도 하나로 다 막혔던 거죠. 의정부시와 관련된 건데 의정부장차연이랑 같이 시청에 항의해서 이 제도를 다시 바꾸어냈죠. 원상복구되고 다시 그분이 안정적인 삶을 지속하는 것을 경험했어요.
  그러면서 저를 되돌아봤죠. 저는 운이 되게 좋아서 뭔가 필요할 때마다 제도가 딱 생겼어요. 가령 초등학교 때는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는데 보장구를 공짜로 지원받을 수 있었고, 중고등학교 때는 등하굣길이 멀어서 힘들었는데 장애인콜택시가 생겼고, 대학교 때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저 혼자 생활하려고 했을 때 활동지원서비스가 생겼어요. 그리고 제가 직장을 다닐 때는 지하철마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됐죠. 그때는 그냥 ‘나라가 좋아서, 그냥 운이 좋아서 이렇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활동을 하게 되면서 이런 제도들은 많은 선배들 투쟁의 결과물이었고. 이동권 투쟁, 활동지원서비스 투쟁 등등 이런 투쟁들이 있었기 때문에 내 삶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죠. 이런 투쟁들이 없었다면 제 삶은 지금쯤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 경 : 자기 삶에 비추어 이게 내 문제라고 여겨지는 게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운동의 이념을 타자화시키는 순간 굉장히 이념을 패션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액세서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내 삶의 원동력이고 나의 문제로 인식하셨다니 굉장히 멋지네요.

 

♣︎ 환 : 그때부터 현장에 나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진 듯해요. 나가서 현장투쟁 자리에 함께 있으면 저와 똑같이 저보다 어린 누군가들도 제도가 개선되면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을 테니까. 뭐 그렇게 거창한 생각은 아니고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 경 : 차기 한자협 대표자로.. ㅎㅎ 


♣︎ 환 :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수경님 이력서를 보면 처음에 다형에서 시작하잖아요. 우리 센터는 다형을 운영하진 않고, 저도 경험이 없어요. 근데 제가 알기로 다형이 악명이 되게 높잖아요. 진짜 힘들다고 들었는데.... 


♤ 경 : 초기 세팅부터 했었어요.


♣︎ 환 : 근데 시기도 딱 그때고, 그때부터 1년 정도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이 힘들어서 나오신 건가요? 


♤ 경 : 아니에요. 저는 더 하고 싶은 생각은 있었어요. 물론 진짜 힘들었어요. 그때는 탈시설 활보지원 추가수당도 없었고, 정말 발달장애인분들이 신체적 장애가 거의 없으신 분들이라 90시간인가, 진짜 시간이 말도 안 되게 너무 적었어요. 그래서 1주일에 1~2번씩 그 집에서 자고 그랬었는데, 그래도 일이 힘들어서 그만둔 것은 절대 아니고 조직 내 문제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만뒀어요. 


♣︎ 환 : 그다음 활동 공간이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인 거죠? 이곳도 힘든 곳으로 알고 있는데 수경님이 활동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 동기, 이런 것들이 궁금했어요.


♤ 경 : 저는 정말 사실 여러 가지 개인적인 욕망도 있긴 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뭐든 잘하고 싶은 사람이에요. 뭔가 실패하는 걸 싫어하죠. 어릴 때 친구들이랑 보드게임 하다가 제가 질 것 같으면 엎었대요. 5살 때요. 이길 욕심도 강해서 뭔가 지는 걸 싫어하고. 내가 조금 더 빛나고 싶어 하는 욕망도 있어요. 그 욕망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인터뷰니까 멋지게 이야기해보자면 저는 장애인 자립생활운동이 너무 좋아요. 저는 진짜 너무너무 좋고 저는 이 운동을 계속하고 싶어요. 이 운동을 계속할 가장 최적의 공간이 협의회라고 생각해요. 제가 올 수 있는 가장 멋진 곳으로 온 것 같아요. 


♣︎ 환 : 그 다형을 그만두신 시점에서 그런 생각이 들어서 협의회로 오신 건가요?


♤ 경 : 조직 내 갈등으로 누군가와 고민을 나누고 싶었어요. 제가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었는데 마침 장애여성공감 숨센터에 자립생활센터 활동가들의 고민을 풀어내는 세미나가 있었어요. 우연히 제가 그것을 알게 돼서 찾아갔어요. 알고 보니까 서울시협의회랑 공동주최하는 세미나였던 거에요. 박현영 활동가가 당시 세미나에 참여했고 그날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운동을 한다는 조직에서 장애인차별만 사라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등의 고민이죠. 자세히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고요. 어쨌든 그런 고민을 들으면서 현영 활동가가 너무 공감해주었죠. 그리고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고 현영이 저를 꼬셨어요. 저도 마침 당시 일하던 센터가 제 운동의 전망으로는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협의회라는 조직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그만두고 협의회로 오게 됐어요. 현영 동지는 저에게 구원자에요. 그 상황에서 저를 구해준 사람이었어요. 


♣︎ 환 : 현영 님은 기억 못 할 테지만, 제가 2013년 처음 활동을 시작했을 때 자립생활센터도, 동료상담도 아무것도 모르는데 한 달 만에 집단동료상담 최고과정 담당자가 되었어요. 의지할 곳이 동료상담위원회밖에 없다는 생각에 전화했죠. 저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그런데 현영님이 ‘그럴 수 있죠, 당연한 거예요.’ 이러면서 특유의 북돋움으로 격려해줬어요. 얼굴도 모르는데 이분을 너무 만나고 싶은 거예요. 그때 제가 한참 첫 일터에서 혼났을 때였거든요. 까불까불하고 직장 경험도 없어서 마냥 신나고, 사람들이랑 친해지려고 이야기 많이 하려고 했죠. 윗사람들은 신입이 들어오자마자 너무 나댄다고 ‘정신 놓은 것 같다’ 이러면서 많이 혼나고 그런 시기였는데 현영님의 그런 말들이 무척 용기를 줬어요. 나도 잘할 수 있구나. 지금 못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였구나. 나중에 현영님을 만났을 때, 그때 전화 드린 일환이라고 했더니 그때 최고과정 너무 잘했다고 이야기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좋은 기억이 있고 최근에 제가 최고과정 참가자로 갔을 때도 애니어그램 하면서 많은 격려도 받았고, 그분의 멋진 에너지를 받았어요. 




♣︎ 환 : 또 궁금한 게 있어요. 언젠가 수경님, 문애린님하고 차를 같이 탄 적이 있어요. 그때 수경님이 하셨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말이 있어요. ‘장애해방 세상이 오면 나는 문애린 활동지원사만 하면서 살 거다’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 경 : 맞아요. 맞아요. 제 장래희망이에요. 


♣︎ 환 : 그 뜻이 굉장히 궁금했어요. 어떤 의미인지.


♤ 경 : 애린을 사랑하고 너무 좋아해서이기도 하고, 장애인운동 현장이 굉장히 즐겁기도 하지만 어쨌든 힘들기도 하잖아요. 되게 힘에 부치고. 고민 많이 해야 하고, 또 계속 싸워야 하고. 안되면 바위에 달걀 치듯이 만날 부서지는 상황들에서, 만약에 이렇게 싸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이 오면 나는 그냥 고민 많이 하지 않고 평화롭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활동하면서 살고 싶은 욕망인 것 같아요. 


♣︎ 환 : 그런 마음이었군요. 그런 마음인지 아니면 또 다른 운동권의 심오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어요.


♤ 경 : 그냥 장애해방 세상이면 인간해방 세상이 올 거로 생각하고, 인간해방 세상이 오면 그냥 저도 해방된 삶을 살겠죠. 이런 거예요. 나는 평생 앞으로 끊임없이 일하면서 벌어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나 자신을 먹여 살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잖아요. 저는 그것도 되게 어렵다고 생각해요. 막막하잖아요. 근데 그런 고민을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집값을 고민하고 싶지 않고, 재산을 고민하고 싶지 않고, 다음 달에 무엇을 먹고살지 고민하지 않고. 그런 인간해방, 노동해방, 장애해방이 같이 올 것이라고 믿는 거죠, 누구랑 경쟁하는 것도 너무 힘들잖아요. 누구랑 경쟁하지 않고, 더 잘나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고,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압박도 없이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을 지원하면서 함께 살고 싶다는 욕망인 것 같아요. 지금은 굉장히 급여가 낮은 직종 중에 하나지만, 정말 노동해방 그런 세상이 온다면 먹고살 걱정, 병들었을 때 걱정, 가난한 날의 걱정을 할 필요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 환 : 그날 만남이 저한테는 ‘장애해방’이라는 단어의 고민을 심어준 날이기도 했어요. 저는 미시적인 관점으로 ‘이 제도가 해결되면 이렇게 나아지겠지’하는 정도였던 거예요. 그런데 그날 대화 이후 장애해방 세상이라는 단어를 고민하게 된 것 같아요. 장애해방이란 뭘까? 저는 아직도 스스로 결론을 못 내렸어요. 그런데 혹시 수경님이 내린 장애해방 세상, 인간해방, 어느 정도는 이해했는데 짧게 정리해주실 수 있나요?


♤ 경 : 같이 맑스의 공산당선언을 읽어보면 어떨까요. 진짜 잘 쓴 글이거든요. 재밌어요. 근데 안 읽어도 되고요. 삶에서 충분히 습득하고 계시리라 믿어요. 저는 진짜 그렇다고 생각해요. 백기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너도 노동하고 나도 노동하고 모두 평등한 그런 세상을 향한, 노나메기’, 어떤 직종 간 차별도 없고 내가 하는 어떤 일로 살아가는 나의 형태로 충분히 존중받는 세상, 그리고 내가 아플 때 병원에 갈 수 있고, 배고플 때 밥 먹을 수 있고, 그런데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기에, 내가 아주 풍요롭게 관계 맺을 수 있고 평등하게 사람들과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저는 자유로운 어떤 해방세상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 중의 하나가 ‘인간해방 없이 여성해방 없고, 여성해방 없이 인간해방 없다’라는 말인데, 저는 장애해방도 똑같다고 생각하거든요. 인간해방 없이 장애해방 없고, 장애해방 없이 인간해방이 올 수 없다는 거죠. 제가 생각하는 장애해방은 이런 거로 생각해요.




♣︎ 환 : 나름대로 제 고민의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도움 주셔서 고마워요. 저는 아직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네요.


♤ 경 :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문애린이 항상 “야, 장애해방 세상은 오지 않는다” 이래요. 나의 꿈을 짓밟는 문애린.


♤ 경 : 일환님은 협의회 중앙에서 활동할 생각은 없어요? 협의회 회장이 되고 싶은 꿈은 없어요? 


♣︎ 환 : 제가요? 아니요. 제 꿈은 센터 사무국장입니다. 


♤ 경 : 사무국장이요? 왜요?


♣︎ 환 : 일단 소장은 계약직이라 싫습니다.


♤ 경 : 그럼 사무국장은 정규직이에요?


♣︎ 환 : 사무국장은 제가 잘하기만 하면 잘릴 일은 없겠죠. 활동 초기부터 혼자서 밀고 있는 꿈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하면 저는 개개인을 만나는 걸 더 선호하는 편입니다. 물론 제도적인 싸움을 동의 안 한다는 게 아니라 너무 필요한데, 저의 개인적인 성향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렇게 변해야 한다’라며 제도의 밑바탕을 만들고 싶어요. 

 

♤ 경 : 지역장애인을 더 만나고 싶다는 말씀이세요?


♣︎ 환 : 네 지역장애인을 만나고.


♤ 경 : 소장이 돼도 충분히 할 수 있잖아요? 아니면 소장을 했다가 다시 사무국장을 할 수도 있잖아요. 


♣︎ 환 : 그렇죠. 그런데 제가 남들 앞에서 특히 불특정 다수에게 발언하는 것이 성향상 많이 힘들기도 해요. 소장이 되면 그런 것도 많이 해야 하니까 사무국장까지가 딱 좋은 것 같습니다.

 

♤ 경 : 또 하나 궁금한 건 서울시협의회와 중앙협의회에서의 고민은 센터에 비장애인들이 너무 많다는 것, 너무 비장애인 중심으로 센터가 굴러가고 있다는 거죠. 사실 자립생활센터의 가장 중심이 되는 가치는 중증장애인들이 주인이 되고, 중심이 돼서 돌아가는 그런 조직이잖아요. 그런데 점점 복지관화 되면서 전문화, 서비스 분화가 돼가고 있는 시점에서 협의회에서는 굉장히 고민하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센터에서 활동하는 장애인 당사자로서 느끼는 입지가 어떠한지, 그리고 앞으로 협의회에서는 더 젊고 더 많은 활동할 가능성이 있는 일환님에게 더 많은 요구를 할 수도 있을 거로 생각해요. 그랬을 때 장애인 당사자로서 의무감이나 무게감 같은 것은 없는지 궁금해요. 


♣︎ 환 : 굉장히 민감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저는 두 군데 다 경험을 해 봤어요. 비장애인이 중심인 센터, 장애인이 중심인 센터. 두 군데밖에 활동을 안 해봐서 비교가 적긴 하네요. 처음 활동한 센터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휠체어를 탄 사람이 소장과 저뿐이었고 20명 중 4명만 장애인이었어요. 그런데 평상시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사례회의만 하면 이상한 일이 발생했어요.
  가령 이용자랑 활동지원사가 싸웠어요. 그런데 이 이용자가 이전에 그런 경우가 되게 많았던 거예요. 최중증장애인인데 어떤 활보는 하루 만에 갈아치우기도 하고, 화를 못 이기고 ‘너 바로 나가’ 이러고 센터에 활보 새로 보내 달라는 사례였죠, 그 회의에서 한 활동가가 ‘바지에 똥 지리게 냅두자. 그래야 활동보조랑 안 싸우지. 소중한 줄 알지.’ 그 말에 제가 정말 열 받아서 ‘그건 해결방안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죠. 근데 그때 제가 아니라고 했을 때 누구에게도 공감받지 못했어요.
  이후 계속 문제를 제기해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됐는데 결론은 ‘우리는 작은 복지관이야, 어쩔 수 없어. 그래서 당신의 역할이 중요해 동료상담가의 역할이 중요해,’ 이런 식인 거예요. 제가 ‘장애인이 중요하다고 느끼면 더 뽑으면 되지 않냐’라고 이야기하니 답변은 ‘우리 지역에 일할 장애인 없어’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계속 문제제기하고,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막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싸움닭이 되어갔어요.
  또 현장 투쟁이 있을 때마다 ‘네가 장애인이니까 네가 가. 투쟁이 있으면 장애인이니까 네가 가야지.’라는 논리로요. 어느 날엔가 큰 행사를 치르고 남들은 다 집에 갈 때 ‘포천 어디 시청 점거했대. 그럼 너 가야지. 네가 장애인인데.’ 해요. 군말 없이 갔어요. 그리고 거기서 짜장면 먹으면서 천막 지키다가 저상버스 타려고 하는데 고장 난 차라서 밤 12시에 집에 들어갔죠. 이게 2~3년 반복되니까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어요. 왜냐면 맡은 일이 점점 많아져서 그만두기 직전에는 8가지 사업을 맡았어요. 장애인식개선사업, 체험홈 2개, 동료상담, 권익옹호, 개별ILP 등. 업무 분장을 요청하더라도 ‘동료상담가의 역할이 중요한 사업들인데 너밖에 없으니 네가 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죠. 그렇게 투쟁도 가고 상담도 직접 진행하다 보니 외부 일정이 많아서 짧으면 1주일, 길게는 2~3주 정도 센터에 못 들어간 적도 있었어요.
  사실 제 경험은 굉장히 극단적인 경험일 거로 생각해요, 하지만 자립생활센터의 중심은 장애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해요. 지금 성북센터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많이 편해졌어요. 




♤ 경 :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원교 소장님만의 편안함이 있는 것 같아요. 


♣︎ 환 : 많이 울기도 하고, 그러면서 이게 장애인 중심이 맞다는 자립생활운동의 이념, 세상이 장애인 중심일 필요는 없지만, IL만큼은 중심이어야 하고 중심이고 싶다고 생각해요. 사실 다른 센터들도 고민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비장애인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실무자인 저희도 예민하게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투쟁을 나가보면 알잖아요. 이분이 상근자인지 그냥 같이 오시는 건지. 우리 센터에서도 고민이에요. 사실은 성북센터가 작년까지는 장애인 비율이 굉장히 높았어요. 그런데 중구센터와 나뉘는 과정에서 대부분 장애인 당사자들이 갔죠, 구인광고를 내기 시작했는데 장애인 구직자가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예전에는 장애인 비율이 60~80%까지 갔던 기획사업팀이 어느 순간 장애인이 몇 명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을 보면서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나도 그들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조금 불안함이 생기기도 하고 실제로도 그런 고민이 많아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적절한 선을 잡고, 사실 누가 중심이라기보다는 다 같은 사람이잖아요. 이런 것들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 경 : 장애인운동에 있어서 스피커를 장애인에게 줘야 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죠. 그리고 사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같이 활동한다고 했을 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동등한 기회를 준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당사자들이 교육받지 못하고 사회경험도 부족할지언정 센터들이 더 많은 장애인 당사자들을 발굴하고 그들이 센터로 나와서 활동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어쨌든 계속 그런 고민을 하고 계신다고 하니까 성북센터의 장래가 되게 밝네요. 협의회 활동가로서 그 고민을 계속 놓지 않고 갔으면 좋겠어요. 


♣︎ 환 : 넵! 잘 알겠습니다. 


♤ 경 : 저는 진짜 궁금해서 이 질문을 너무 하고 싶었는데 장애인운동 현장에서 팀장 또는 사무국장이라는 물리적인 위치 말고 어떤 활동가로 남고 싶으신가요.


♣︎ 환 : 그냥 저랑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좋은 일 또는 나쁜 일이 있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동료로 남고 싶어요. 어느 때나 신뢰하고 생각나는 사람이요.


♤ 경 : 찐 동료상담가네요. 저는 이원교 소장님의 좋은 면이라고 생각하는 게 별로 친하지 않은데도 왠지 이야기하면 편해요.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으신 거죠?


♣︎ 환 : 그쵸. 저한테는 소장님이 그런 사람이에요. 사적으로도 제 개인사가 잘 해결되면 소장님한테 자랑하고, 좋지 않은 일이 터지면 힘들다고 하소연해요, 소장님뿐만 아니라 사무국장님도 저한테는 그런 분들이에요. 그런 모습이 되고 싶기도 한 것 같아요.


♤ 경 : 그런 선배가 나와 함께 현장에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 환 : 그래서 여기서 힘든 일이 있어도 이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 경 : 그래요. 힘들 때 연락할게요.


♣︎ 환 :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아 참, 그것도 궁금해요. 중앙에서 일하는데 아쉬운 점이라기보다 개별 센터들에게 좀 더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 경 : 저는 센터들이 욕심을 가졌으면 좋겠고, 그 욕심이 이상한 데로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우리 센터의 어떤 당사자가 어떤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정말 욕심을 갖고 이것을 해결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올바른 욕심을 가져주시기도 하지만, 조금 다른 욕심으로 엇나가기도 하죠. 센터의 사업과 세를 확장하는 데로만 흘러가는 것이 속상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센터가 운동하는 단체라는 것을 명확히 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그 지역의 운동 단체라는 정체성을 명확하고 단단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업과 투쟁의 갈등상황 속에서 무척 안타까운 거죠. 사회변화를 위한 활동이라는 것이 아주 명확하게 자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그런 센터가 많지 않아요. 운동에 대한 욕심, 사회변화에 대한 욕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센터들이 점점 더 사회복지사를 많이 채용하잖아요.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회복지사를 표적으로 채용하는 게 좀 안타깝더라고요. 사회복지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이 운동에 뜻을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같이 했으면 좋겠어요. 또 점점 센터가 규모가 커지면서 ‘복지기관’으로 작동하지 않게 센터가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언젠가 한 센터에 가서 물어봤어요. ‘소장님, 센터에 활동가가 몇 명이에요?’ 그랬더니 ‘활동가요 아니면 직원이요?’ 이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니 활동가요’ 그랬죠. 나중에 알고 보니 활동가는 장애인이고, 직원은 비장애인/장애인 상근자인 거에요. 너무 웃기잖아요. 저는 누군가 취업을 목적으로 센터에 들어올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일하러 들어온 그 사람을 잘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 ‘조직’에 대한 노력이 없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을 이 운동에 동지로서 끌어내려고 하는 노력이 아니라 그냥 너는 ‘일하는 사람, 뒷받침하는 사람, 그리고 지역장애인 몇 명은 같이 하는 활동가’로 규정지어 버리는 것도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정리하자면 운동을 하고자 하는 욕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사실 그것도 협의회도 같이 해야 하는 일이겠죠. 


♣︎ 환 : 저도 수경님 말을 듣다 보니 조금 고민이 드네요. 왜냐면 센터 활동가로서 제가 지난해 9월부터 현장에 거의 못 나갔어요. 저도 나가서 함께하고 싶거든요. 사실 센터 일은 일이고 현장 투쟁은 투쟁이고를 구분하는 것도 웃기긴 한데, 여차여차해서 센터에 수습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지금도 진행 중이고. 그러다 보니까 그런 괴리감도 생기기도 했어요.
  센터 일도 중요하고 현장 투쟁도 중요한데 어느 순간 제가 사람을 못 만나는 거예요. 코로나 영향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제가 뭘 하고 있는지 길을 잃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지금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비장애인분들이란 말이에요. 한편으론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이 내가 초기에 겪었던 불안감, 무서움들을 없애고 현장을 즐길 수 있게 만들까’하는 고민이 아주 커요. 그런데 제가 컴퓨터 업무만 하고 있는데 입으로만 떠든다고 설득되지 않을 거 아니에요. 현장이 나쁜 게 아니고 정당한 투쟁을 하는 것이라는 그런 고민을 같이 나눌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 경 :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내가 조직하다 보면 누군가를 계속 설득을 시켜야 하잖아요. ‘이 활동 정말 재밌어, 필요해, 정당해, 우리가 움직여야 세상이 바뀌어’라며 계속 조직해야 하는데 그게 너무 벅찬 거예요. 심지어 센터 활동가들도 설득이 안 되는 게 너무 숨막히는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 아빠 하나 변화 못 시켰는데, 우리 아빠 변화시키기도 힘들었는데 뭔 놈의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그만큼 사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를 조직하고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은 굉장히 공을 들여야 하고, 대단히 많은 시간을 들여 만나야 하고, 이 사람의 삶에서 이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끌어오게끔 하는 엄청난 공력이 드는 과정이라더라고요. 그래서 단번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하루는 너무 죽을 것 같고, 하루는 다 갖다 버리고 싶고, 그래도 다시 하고, 그렇게 활동하는 거죠. 제가 최근에 읽었던 책 중에 은유 작가의 책이었는데 그런 문장이 있었어요. ‘타자를 변화시키는 일은 계몽이 아니라 전염이다.’ 누군가를 계몽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인데 일상에서 누군가를 전염시킬 수 있다는 말이었어요. 그래서 카톡에도 써놨는데 저는 그런 마음으로 계속 활동하고 있죠. 




♣︎ 환 : 그래서 혹시 요청을 드리자면 센터 전체가 다 할 수는 없겠지만, 센터의 몇 명을 조직해서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조직화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가 협의회 차원에서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내가 현장에서 돌아와 내 동료들을 전염시킬 전파력이 더 높아지지 않겠냐고 생각해요. 사실은 이런 것이 없으면 비장애인 활동가가 자립생활센터에 언제까지 남아 있겠나 하는 걱정도 좀 있어요. 저는 장애인, 비장애인을 떠나 옆에 있는 동료와 조금 더 오래 함께하고 싶은데 그 방법 중 하나가 이런 것일까? 아직 해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이런 생각이 들어서 뭐라도 해보고 싶은데 제가 가진 게 별로 없어서 전염을 많이 못 시키는 것 같아요. 이런 고민을 많이 이야기할 자리나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것을 요청하고 싶어요. 


♤ 경 : 제가 그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우리는 조직 자판기가 아니다. 자판기에 천원 넣으면 포카리 나오는 것처럼 내일 기자회견 있으니까 와 이러면 몇 명 오고 그런 게 아니라 기자회견이 충분히 동의가 되었는가, 충분히 의미를 알고 있는가, 이런 것인데 그 의미전달에 대한 고민도 늘 있고, 잘하고 싶어요. 암튼, 고민되는 문제는 서로 이야기한 것 같고, 힘이 되는 이야기도 대충 나눈 것 같은데요. 일환님은 장애인운동 외에 관심 있거나 하고 싶은 일은 있어요?

 

♣︎ 환 : 딱히 없어요. 왜냐면 이미 여기에 다 맞닿아 있잖아요. 


♤ 경 : 저도 이 말이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장애인들은 결국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같아요. 장애인 당사자들에게는 이곳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문애린이 어디 가겠어요. 아무리 그만둬도. 그쵸? ㅎㅎ

 

♣︎ 환 : 절실한 공간이기도 하면서 그만큼 편한 공간이기도 해요. 힘들긴 한데. 저도 반대로 혹시 똑같은 질문을 드린다면 수경님은 어떤가요?


♤ 경 : 장애인운동 하는 비장애인이라고 했을 때 저는 사실 많이 흔들려요. 제가 사실 되게 관종이에요. 저는 관심받는 거 되게 좋아하고, 어디 가서 주인공 하는 거 되게 좋아해요. 그런데 저는 숙명이라고도 생각해요. 장애인운동 하는 비장애인은 절대로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인공이 될 수도 없고, 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제가 처음 IL 수업을 들었다는 교수가 이야기했어요. “미안하지만, 우리 과 학생들은 어디 가서 주인공을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대신 멋진 조연을 해줬으면 좋겠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되게 주인공을 하고 싶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 운동판 안에서 제가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깨달았을 때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성소수자, 여성운동을 할까?’ 이런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저는 장애인운동이 너무 좋아요. 진짜로. 장애인 자립생활운동이 너무 좋고 계속하고 싶어요. 안타깝네요.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비련의 조연. 어떤 방식으로 빛나는 조연이 될 수 있을까, 빛나는 조력자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 좋겠죠?


♣︎ 환 : 개인적으로 저한테는 거의 주인공이세요. 왜냐면 투쟁을 나가면 주기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장애인들도 주인공인데 항상 수경님도 어디엔가 계셨어요. 역할의 중요성도 있지만, 드라마에서 분량 많으면 주인공처럼 보이잖아요. 그게 오히려 수경님에겐 고민 지점일 수 있지만, 저한테는 되게 멋지셨어요.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노들야학에서 회의하다가 제가 내려왔어요. 원래 회의에서 빨리 도망가는 걸 좋아하거든요. 끝나기 5분 전에 나오는 거 좋아하고. 그때도 슬금슬금 도망가려고 준비하고 내려왔는데 어떤 장애여성 동지가 입구에서 지나가던 차에 부딪힐뻔했나 봐요. 그때 수경님이 그 운전자랑 엄청 싸우고 있더라고요. 그런 모습들부터 시작해서 저한테는 수경님이 되게 멋있거든요. 누군가를 위해서 늘 투쟁하는 그런 모습들요. 자립생활운동판에서의 위치나 주인공 다 떠나서, 주인공 조연 다 떠나서 저한테는 아주 멋져 보이셨어요. 물론 살짝 무섭긴 했어요. 그럼에도 멋짐이 더 각인됐어요. 


♣︎ 환 : 아 참, 한 가지 더 질문이 있어요. 사실 수경 님은 장판에서 이름만 대면 아는 분들이 많잖아요. 저는 사실 그런 동지들 처음 만날 때 되게 굳거든요. ‘높은 사람’  머 이런 게 있어요. 이원교 소장님도 처음에 되게 무서웠거든요. 지금도 무섭지만. 그런데 저랑 같이 일하는 이윤재 동지가 수경님이랑 워크숍 하면서, 소장님 올라프 닮았다고 놀리셨다고 들었어요.




♤ 경 : 이원교 소장님 올라프 닮았어요.

 

♣︎ 환 : 윤재 동지가 그거 보여주면서 저희끼리 웃고 그랬거든요. 혹시 그러다 보면 편해질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장판에서 유명한 분들의 별명을 지어줄 수 있나요? 


♤ 경 : 이형숙 소장님은 아따맘마에요, 장판 인싸들의 별명 짓기? 딱 떠오르는 게 있긴 해요. 이원교 소장님은 너무 올라프 닮았어요. 최용기 대표님은 약간 잘생기지 않았어요? 잘생긴 것 같아요. 옛날 연예인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약간 최수종 닮았어요. 동료상담 하면서 별명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다는 거 되게 좋아하셨고요. 생각을 좀 해볼게요. 다른 분들은 지금 당장 떠오르진 않네요. 끝으로 서로에게 응원 한마디씩 하고 서로인터뷰 마무리하는 게 어때요? 


♤ 경 : 진짜로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한자협 사무국 회의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차세대 장애인 당사자 리더를 우리가 키워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적합한 사람 후보군에 안일환이라는 사람이 나왔어요. 왜 그랬냐면 그때 당시에 성북센터 건물 지하에 체대입시학원에서 코로나 확진자 터지고 그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진짜 일 잘한다, 숨겨진 인재다, 저 사람은 차세대 리더로 제격이다’라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리고 마무리도 잘하셨죠. 그 이후로도 새로운 리더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할 때면 젊은 당사자 중에 일환님이 나왔고, 일 잘하는 사람, 한자협의 차기 회장으로도 생각했었어요. 제가 아까도 장애인 당사자로서 센터에서 위치나 이런 것에 대해 여쭤봤잖아요. 사무국장으로 빼기도 했지만 저는 좀 더 꿈과 욕망을 갖고 활동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진짜 센터에 있어 줘서 너무너무 고마워요. 저는 장애인 당사자들이 센터에 있는 게 정말 고맙거든요. 그리고 송은영이랑 술 먹는데 일환님이 수경이랑 은영이랑 잘 맞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고 들었어요. 은영이랑 셋이서 맥주 한잔합시다.


♣︎ 환 : 꼭 불러주세요. 저도 오래 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오래 버틴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수경님이 그 자리에서 계속 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의미도 있어요. 제가 멋지게 봤던 활동가들이 순간순간 사라져요. 그 사람들이랑 오래 있었으면 좋겠는데 보통 길게 봐야 3~4년이었어요. 그러지 않고 함께 장애해방 그날까지 같이 가요. 그리고 제 활동지원사로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 경 : 알겠습니다. 월수금은 문애린.


♣︎ 환 : 그때까지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부르시면 공수표가 아니라 응원의 한마디 대신 언제든지 달려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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