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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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 이책] 『마스크가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들』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1-07-10 조회수 :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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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마스크가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들』 

홍성훈


코로나바이러스(COVID-19)가 발생한 지 1년 6개월이 지났다. 마스크는 우리 일상의 필수품이 되었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얼굴이 낯선 시대가 되었다. 가는 곳마다 마스크가 '나와 이웃을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하는 최소한의 방어막'이라는 메시지가 되풀이되고, 거리두기가 기본 에티켓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혹시나 코로나19라는 '보이지 않는 적'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우리 내부에 또아리를 튼 또 다른 그림자를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마스크가 답하지 못한 질문들>(미류 외은 코로나 시대의 핵심 과제로 떠오른 '방역'이 자칫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안의 본질을 덮어버릴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작가, 사회운동가, 비평가 등이 쓴 글을 한 데 묶었다. 이들의 시선은 마스크로 대표되는 방역(혹은 백신)의 이면을 파헤친다.

                                         
                                                                                                         『마스크가 답하지 못한 질문들 』



단적으로 코로나19는 우리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재난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심층에 있던 문제들을 표면으로 끌어올린 것뿐이라는 것이다. 지금부터 나열되는 문장을 한번 읽어보자. 


 (코로나19 때문에) 어떤 특정한 사람들은 사회적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때문에) 일회용품 사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때문에) 홈리스들은 거리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때문에) 장애인들은 시설에 수용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때문에) 배달 노동자들은 빠른 배달을 위해 자신의 안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문장들을 다 읽었다면, 앞에 있는 괄호를 빼고 다시 읽어보자.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괄호를 포함한 문장과 뺀 문장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우리 사회는 코로나19 이전에도 특정 사람들을 비난하고, 일회용품을 쓰고, 홈리스들을 거리에서 내쫓았다. 장애인들이 시설에 수용되는 현실을 당연시하고, 제시간에 오지 않는 배달 노동자들을 재촉해왔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당연시'해온 행태들이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을 바꾸지 않았다. 그저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문제들을 헤집어 우리의 눈앞에서 보여준 것뿐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들을 정부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문제를 해결할 의지는 그다지 없는 듯하다. 정부는 ‘신속한 역학조사’ 등을 내세우며 K-방역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지만, K-방역으론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에는 거의 손을 놓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코로나바이러스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수용시설 내 장애인들이다. 장애학 연구자 김도현이 이 책에서 지적했듯이, 코로나바이러스는 시설 거주 장애인들에게 매우 높은 치명률을 보인다. 국내에서 발생한 코로나19 첫 사망자는 청도 대남병원에 입원해 있던 장애인 당사자였다. 그는 대남병원에 20년 동안이나 장기 입원하고 있었다. 사망 당시 몸무게가 42kg에 불과했던 것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국적으로 확진자 수가 급증하고, 장애인 시설에서 집단 감염이 일어나자 방역 당국은 해당 시설에 ‘코호트 격리(지역사회와 차단하는 공통 집단 격리)’를 시행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까지 지역사회와 단절된 삶을 강제당했던 정신장애인과 중증장애인들은 사실 ‘이미’ 코호트 격리 상태에 있었던 셈이다. 이미 격리되어 있던 이들을 동일한 장소에서 다시 격리한다는 건, 마치 ‘두 번 죽인다’는 말처럼 한편으로는 모순되게, 또 한편으로는 무참하게 들렸다. 첫 코호트 격리는 모두가 알다시피 청도 대남병원의 정신병동에서 이루어졌고, 그런 조치 속에서 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들은 실제로 사회적 존재로서 한 번 죽임을 당하고, 다시 생물학적 존재로서 두 번 죽임을 당했다. 그러고서야 그 격리에서 해제될 수 있었다.” (112쪽, 김도현 「’시설사회’와 코로나19, 그리고 장애인」)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정부가 장애인 시설에 내린 코호트 격리 조치는 전혀 새로울 게 없다. 늘 해왔던 조치의 반복에 불과하며, 좀 더 삐딱하게 바라보자면 장애인들을 코로나19로부터 더는 보호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다. 비단 시설 거주 장애인들뿐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재가 장애인들도 감염 위험에 노출되기 쉬우며, 확진될 경우 정부의 허술한 지원체계 속에서 완치까지 험난한 과정을 겪는다. 똑같은 바이러스라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건강상의 위협을 받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삶 전체가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이렇듯 재난 상황 또한 절대 평등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코로나19라는 재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 책의 저자들은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이미 이전부터 재난은 시작되었으니까. 우리는 코로나19 ‘이후’를 상상하고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혐오되지 않으며, 자신의 삶 그대로를 지속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면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그다지 우리의 삶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마스크가 아닌 우리가 답을 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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