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 성북아리는 성북 + 아리아리를 합친 말입니다.
아리아리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자, 그래도 없으면 길을 만들자”라는 우리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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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 서로인터뷰] ‘동료상담한 이가 시설을 박차고 나왔을 때 뿌듯해요’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1-07-17 조회수 :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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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상담한 이가 시설을 박차고 나왔을 때 뿌듯해요’


 ‘성북아리’는 장애인운동 활동가 두 사람이 서로를 인터뷰하는 ‘서로인터뷰’ 꼭지를 마련했습니다. ‘서로인터뷰’는 일방적인 인터뷰가 아닌 상대방의 인터뷰어가 되어 서로 생각을 나누는 꼭지입니다. 두 번째로 김포장애인야학 김동림 활동가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이정하 활동가가 만났습니다. (편집자 주)

     


                                                                               

▶ 김동림님(왼쪽)과 이정하님.


♤ 이정하 (아래 ♤ 하) :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아래 발바닥행동)에서 활동하는 이정하라고 합니다. 


♣ 김동림 (아래 ♣ 림) : 반갑습니다. 저는 석암비대위에서 활동했고 현재 김포장애인야학에서 교감으로 일하는 김동림이라고 합니다. 


♤ 하 : 먼저 동림님 어릴 적 어떻게 사셨는지 궁금하네요. 


♣ 림 : 저는 초등학교 5학년까지 걸어 다녔어요. 그런데 그해 교통사고 났죠. 13년 동안 누워만 있었어요. 그 시절 아버지가 술 드시고 들어오기만 하면 자꾸 저에게 꼴 보기 싫다고 하셨죠. 그때 누워만 있으니까 책 읽는 것하고 티브이(TV)밖에 못 봤어요. 티브이에서 시설 이야기도 나오는데 장애인들이 생활하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타의 반 자의 반 어머니한테 부탁했죠. 집에 있으면 내가 짐만 되니 시설 좀 알아봐달라고. 그런데 어느 날인가 어머니가 시설에 갔다 오더니 나한테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가슴 아파하시는 거예요. 왜 그러냐니까 ‘너 거기 가지 말고 그냥 나랑 살자. 그래도 가야 하겠냐?’ 하시더라고요. 시설에 가서 보니까, 전부 다 누워있고 말도 잘 못하고 그러니까 보기가 안 좋으셨나 봐요. 그래도 간다고 했어요. 그래서 석암재단에서 하는 시설에 들어가게 됐죠. 정하님 어린 시절 이야기도 해주세요. 어떠셨나요?


♤ 하 : 저는 80년대 생이거든요. 제가 중학교 때 터진 아이엠에프(IMF), 그런 굵직한 사건으로만 기억이 나요. 저는 뭐 어린 시절 특별히 기억나는 게 많지 않아요. 어렸을 때 할머니랑 부모님이랑 같이 살았는데 할머니에 대한 기억들이 많은 편이에요. 동림님은 교통사고가 난 뒤 누워만 지내셨다고 했는데 정확한 병명은 나중에 알게 되신 건가요?


♣ 림 : 시설에 들어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내 병명을 몰랐어요. 2002년도에 시설에서 프로그램을 했거든요. 창문 쪽에 서려고 하다가 뒤로 꽝 넘어간 거예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고 눈 뜨니 병원이에요. 엑스레이(x-ray) 찍고 시티(CT) 촬영까지 했는데 뇌위축증이래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비장애인으로 살다가 교통사고 난 뒤 팔 하나 꼼짝을 못했어요. 그 뒤로 정확한 병명을 마흔이 되서야 알게 된 거죠.


♤ 하 : 뇌위축증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에 뭔가 달랐나요?

  

                                                                               

                                                                                                                                               이정하님.


♣ 림 : 뇌위축증이라는 병명을 알고 나서 제가 한동안 밖에 아예 나가지를 않았어요. 방 안에 나하고 같이 있던 사람들 전부 뇌성마비 장애인이었어요. 병명을 듣고 난 뒤에 사람 만나는 것도 되게 힘들었어요. 뇌위축증을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작은 뇌 운동신경 쪽에 이상이 있는 병이더라고요. 보치아를 하려고 하는데, 중심을 못 잡겠는 거예요. 같이 있던 사람들은 일어서면 걷지는 못해도 반듯이 서요. 그런데 난 안 그래요. ‘너 대낮부터 술 먹었냐?’ 이렇게 물어봐요. 그래서 두 달 정도 나가질 않았어요. 그러다가 후원자들이 오니까 조금씩 밖에 나가서 같이 이야기도 하고 그랬어요. 


♤ 하 : 제가 왜 여쭤봤냐면, 제가 친할머니랑 같이 살았다고 했잖아요. 할머니도 지체장애가 있으셨는데 허리가 아예 펴지지 않는 장애였거든요. 이동할 때는 특별히 무리도 없고 그래서 사실 저는 장애인지도 모르고 지냈어요. 아직도 그런 정확한 명칭이나 원인을 잘 모르거든요. 그런 것을 알면 어떤 느낌일까, 혹은 그 이후에 삶이 어떻게 달라지나? 그런 것들을 좀 여쭤보고 싶었어요. 


♣ 림 : 솔직히 내가 그 말 들었을 때, 병원에서 안 나오려고 했어요. 뇌위축증이 희소병이에요. 우리나라에서 뇌위축증이 있는 사람이 7명밖에 없다고 들었어요. 


                                                                                                                                                                                                                                                                                                              ▶ 김동림님.

 

♤ 하 : 24살에 시설에 들어갔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향유의 집에 계셨던 다른 분들 인터뷰를 했었거든요. 그 안에서 재밌는 에피소드도 많고 서로 많이 의지하셨다고, 그래서 헤어질 때 그만큼 많이 힘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자립하려고 시설을 떠나는 것과 다르게 거기 살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문제는 또 다른 것 같더라고요. 그 안에서는 어떻게 지내셨는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림 : 솔직히 시설에 들어가서 5년 동안은 사람들하고 이야기 안 했어요. 그냥 아침 먹고,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저녁에 들어와서 잤어요. 5년 지나고 나서 사람들하고 조금씩 소통을 시작했죠. 그 당시 제가 살던 방에는 전부 50~60대 어른들이었죠. 제가 제일 어렸어요. 그때 24살. 다 아버지뻘이잖아요. 그러다가 소통을 시작한 계기가 있었죠. 친동생이 계속 면회를 오다가 안 오기 시작한 거예요. 거의 1주일에 한 번씩 왔어요. 그런데 나한테 자꾸 찾아가면 안 된다고 누가 그랬나 봐요. 내가 1주일을 버티며 동생이 오는 날을 항상 기대하는 거예요. 오늘은 오겠지, 내일은 오겠지 하면서. 그런데 동생이 오지 않게 되니까 사람들하고 이야기도 하고 같이 방에 다니고 밥도 먹고 그랬던 거죠. 그때서부터 사람들하고 시설에서 나올 때까지 친하게 지냈어요. 그때 제일 친한 사람이 한규선 씨와 김진수 형이었어요.제가 듣기론 정하 동지는 발바닥에 오기 전에 박노해 시인을 좋아하셨다고 들었는데. 


♤ 하 : 시인을 좋아한 것도 있지만, 사실 정확히 말하면 박 시인의 단체가 하던 활동을 좋아해서 같이 했어요. 주말마다 봉천동 아이들 만나는 활동을 했어요. 봉천동이 그때 이슈가 임대아파트하고 일반아파트 단지를 철조망 같은 것으로 구분해 놓았죠. 그래서 빈곤 지역에 대한 문제가 많이 일어났었어요. 제가 아이엠에프세대인데 그 이후에 더 많은 문제가 생겼다고 해요. 주말에 아이들 만나면 그 동네에서 활동하고 놀러 다니기도 했어요. 아이들 활동과 관계된 시도 쓰고, 세계의 분쟁지역에 가기도 하고.... 그 당시에 그 단체 일을 좋아했어요. 원래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책을 읽으면 그 책 속에서 이야기하는 빈곤의 문제들을 사회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그런 시각이 꽤 강했던 것 같아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고민을 하다가 그쪽 활동을 하게 된 거죠. 박노해 시인은 사실 많이 만나지는 못했어요. 어쩌다가 한번 만나는 정도였죠. 단체 활동하던 중에 결혼도 빨리하게 되었어요. 


♣ 림 : 그러면 지금 자녀들은 몇 살이에요?


하 : 저는 아이가 5학년 2학년 이렇게 두 명이에요, 아까 5학년 때 장애를 입었다고 이야기하셨잖아요. 애를 키워보니 5학년이라는 시기가 자기만의 생각들, 인격이 갖춰지는 시기인 것 같더라고요. 세대가 다르니까 다를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래서 아까 이야기하시는 시기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 림 : 발바닥행동 오기 직전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 하 : 사회복지란 것을 거의 몰랐는데 할머니랑 같이 살고 저의 개인적인 빈곤의 어려움이나 이런 것들을 성인 초기에 막 고민하다가 사회복지라는 것을 박노해 시인을 통해서 알게 된 거죠. 그래서 공부했죠. 그런데 공부해도 제 삶에 적용되지 않는 거예요. 그때 할머니가 요양원에 계셨는데 전혀 적용되지 않았어요. 제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거나 서비스 기관에 문의해도 삶이 전혀 해결되지 않으니까. 답답하게 고민하다가 사회복지정보원이라고 대안적인 사회복지 운동을 한다는 곳에 가게 됐죠. 거기도 사실은 ‘시설도 사회복지스럽게 하면 좋은 곳이다, 집이다,’ 이렇게 인식하고 있는 곳이고요. 그런 대안적인 활동들을 열심히 하면 당사자와 가족의 삶, 지역사회가 변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건 이미 판이 짜여 있더라고요. 그런 곳에서 내가 아무리 들들 볶고 뭐를 해도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거죠. 전국을 돌아다녀 보고 안되는 거 되는 거 해보고, 그러면 바뀔 줄 알았던 것 같아요. 


♣ 림 : 그러다가 어떻게 해서 발바닥행동에 오시게 됐어요?


♤ 하 : 사회복지에서는 당사자 중심, 당사자 주체, 지역사회에서 살아야 하고 같이 가는, 지역사회에서 마땅히 누려야 하는 가치들을 이뤄야 한다고 배웠고 열심히 활동했는데 잘 안 되더라는 거죠. 그래서 공부해서 학술적인 무기들을 갖추면 그런 힘이 생길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영 아니었던 거죠. 그런 제가 원하는 가치들을 중심에 두고 열심히 공부하다가 끝까지 왔는데, 그게 탈시설운동이었던 것 같아요. 그 지점에만 오면 학교에서 늘 싸우게 되는 거예요. 학교만 오면 내가 공부하러 온 건지 싸우러 온 건지, 내 돈 내고 내가 왜 이런 공부를 해야 하는지 고민했죠. 학교에서는 사실 자립생활이나 탈시설에 대해 많이 배우기는 어려웠어요. 너무 음해세력이 많아요. 너무 왜곡된 논리들로 탈시설운동을 폄하시키죠. 제가 아는, 열심히 한다는 사회복지사들이 이건 마땅히 해야 하는 건데 아무도 안 하려고 해요. 그런 매력에 끌려서 왔어요. 결정적으로는 발바닥행동 활동가들이 진짜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기 와서 복사하는 일만 해도 행복하겠다, 의미 있겠다, 사소한 어떤 것을 하던 의미가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어쨌든 받아주셔서 왔어요. 참, 동림님 연예 이야기 좀 해주세요. 어떻게 연애를 했는지. 만난 지 몇 년 만에 결혼하신 거예요?


                                                                 

                                                     


♣ 림 : 미경을 만난 건 2009년 탈시설해 나와서예요. 그때 노들야학에서 운영하는 평원재에 저는 2층, 미경 씨는 1층에 살게 되었죠. 9월에 노들야학에서 초중고 과정 중에 어떤 반에 들어가야 하는지 저와 미경이 시험을 봤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은 반에 배정됐죠. 야학이 지금은 9시에 끝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밤 11시에 끝났어요. 집에 오다가 배고프면 포장마차에 가서 김밥이나 튀김을 사 먹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뒤에 와서 나도 사달라고 해요. 포장마차에서 진수형이랑 마로니에 8인들하고 술 먹고 있으면 꼭 찾아와서 나도 달라고 하고. 그러다가 저랑 진수형, 정용이형이랑 혜화역 4번 출구 앞에 술판이 벌어졌어요. 그런데 그때도 와서 달라고 해요. 그러니까 진수형이 ‘아무래도 너랑 사귀어야지 안되겠다. 내가 중매설 테니까 한번 사귀어보라’ 그러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연애 그런 마음은 없었어요. 그러다가 노들야학 불수레반(중등과정)에서 한소리반(고등과정)으로 올라가게 되었어요. 저 혼자 올라갔으면 신경도 안 썼을 텐데 두 사람이 동시에 올라간 거예요. 그때부터 제가 사귀자는 말은 안 했지만, 같이 왔다 갔다 했어요. 그런데 제가 평원재에서 나가서 자립해야 하는 6개월 기간이 되었어요. 저는 길음동에 있는 체험홈으로 가기로 했죠. 2달 후에 제가 길음으로 옮기고 4호선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죠. 그때 우리 사귀자고 말하고 길음으로 왔어요. 첫 번째, 두 번째 다 대답을 안 했어요. 그렇게 두 번 튕기고 나서 며칠 지나고 낮에 평원재로 밥 먹으러 오라고 문자가 왔어요. 가니까 그러면 사귀어보자고,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짝꿍 만나면 맛있는 것도 사주고 그랬죠. 그 동네 롯데마트인가 거기 5층에 스테이크 자르는 데가 있었어요. 짝궁 생일에 처음으로 거기 가서 스테이크 자르는데 내가 주인한테 말하니까 주인이 촛불을 켜서 케이크를 가져다 줬어요. 2010년 초에 제가 말했죠. 우리 결혼하자고. 그리고 2011년 5월 21일에 결혼했어요. 원래 우리가 2011년 3월 21에 마로니에공원에서 결혼하려고 했는데, 그날 방상연 씨가 가로챘어요. 그래서 우리는 도봉구민회관에서 5월 21일에 했어요. 


♤ 하 : 마로니에공원이 그런 역할을 했는지 처음 들었어요. 늘 노숙농성 등 힘든 공간으로만 생각했는데 여러 역할을 했네요. 


♣ 림 : 8명 나왔는데 그중 4명이 결혼했어요. 다들 우리보고 결혼하려고 나왔냐고 그래요. 


♤ 하 : 항상 궁금했던 점이 또 하나 있는데 김정하 활동가는 형님들께 탈시설을 제안했을 때 몇 초 만에 ‘좋다’ 이렇게 결정하고 나오셨다고 하는데, 또 다른 사람들 말은 여러 번 열심히 나오자고 해서 나왔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거든요. 진실은 뭔가요? 


♣ 림 : 시설에서 나오기 몇 달 전부터 규식 동지하고 박현 동지, 정종훈 아버님 등이 왔었어요. 규식 동지가 시설에서 나가자고 이야기하는데 내가 속으로 그랬죠. 저렇게 장애가 심한 사람도 지역사회에서 사는데 내가 그동안 뭐 했는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몇 번 만나고 2009년 6월 3일에 저, 규선이, 정용이 형, 진수 형 등이 다 모였어요. 그날 김정하 동지가 와서 탈시설 제안을 했죠. 그런데 딱 말 나오자마자 ‘다 나가자’ 그랬죠. 규선이가 그랬어요. 힘들 수도 있다고. 그래서 우리가 그랬어요. 힘든 게 문제가 아니라고. 빨리 나가서 우리 권리를 찾자. 나를 찾아야지. 그게 1초도 안 걸렸어요. 그냥 서로 나가자. 그래서 나오게 됐죠. 


♤ 하 : 그래도 실제 나오실 때 쉽지 않았을 텐데 그 과정도 좀 설명해주세요.


♣ 림 : 솔직히 말해서 진짜 나올 거라고 생각 안 했어요. 막상 우리가 나가자고는 했지만, 보따리를 쌌을 때 심정이 반반이었어요. 내가 과연 나가서 살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 반반이었어요. 왜냐면 시설 종사자들이 ‘너네 나가면 다 죽는다’ 그랬으니까요.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반신반의했어요. 막상 6월 4일에 활동가들이 차 가지고 짐 실으러 왔을 때 ‘우리가 나가서 죽나 사나 보자’ 그리고 나왔어요. 우리가 처음 나왔을 때 마로니에공원에서 노숙하면서 오세훈 시장 따라잡기 투쟁했죠. 서울시 탈시설지원 정책으로 자립주택, 활동지원 추가 급여, 탈시설 정착금, 담당 전담부서 등을 요구했어요. 지금도 오세훈 시장이지만, 그때 오세훈 시장 지겹도록 따라다녔어요. 아마 동천의집 갔을 땐가 명희 동지가 오 시장 잡았을 때 겁 좀 먹었을 거예요.


                                                                     


♤ 하 : 그때를 계기로 해서 계속 제도들이 생기고 지금도 굴러가고 있는 것 같아요. 너무 감사드려요


♣ 림 : 아직까진 부족해요. 제대로 더 만들어야지. 장애해방 되려면 아직 멀었어요. 


♤ 하 : 더 제대로 만들고 더는 들어가서 살지 않게 만드는 것도 아주 중요한 거 같아요


♣ 림 : 우리가 나올 때 그랬어요. 향유의집 폐쇄시키자고 했는데 과연 그런 곳이 무너질까 그런 말을 했었어요. 그런데 35년 만에 폐쇄되니까 속으로 만세 불렀어요. 종사자들 고용 승계된 사람들은 지금 뭐 다들 지원주택에 따라갔으니까. 


♤ 하 : 고용 승계가 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 림 : 네. 


♤ 하 : 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았네요. 


♣ 림 : 정하 활동가는 애 둘 키우면서 이런 활동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 하 : 쉽지 않을 것은 사실 별로 없는데, 아이 키우면서 고유의 어려움은 있는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고 일하면서 코로나 시대에 산다는 것, 이것이 힘들다면 힘들죠. 사실 활동 때문에 힘든 것은 거의 없고 오히려 되게 좋아요. 저는 이전에 대형 법인, 관료적인 조직에서 일했었는데 그 안에서 일하다 보면 심리적으로 힘든 부분이 많고, 규칙과 룰에 의해 움직여지게 되죠. 첫 아이 낳았을 때 육아휴직이 없다가 처음 도입되던 시기였어요. 그런 제도가 많이 없어서 힘들었고, 그런 시기가 지나니까 아이가 좀 아파서 힘들었죠, 그런데 지금은 제가 활동하면서 아이들이 오히려 무척 좋아해요. 같이 세종 농성장도 가고 그러면 아이들이 물어봐요. 여긴 뭐 하는 곳이냐고, 시설에 왜 사람이 있냐고. 아이 언어로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있는 그대로 오늘 뭐 하다 왔고 등등을 설명하는데요. 왜 사회가 이렇고,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어가는 과정이 이러한데 이 과정 안에 시설이 왜 있는 건지, 그런데 이런 걸 아이들한테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제가 은평에 사는데 우리 집이 산 위에 있어서 거실에서 보면 시설이 보여요. 시립 은평의마을 은혜로운집이요. 아이들이랑 밥 먹다가도 제가 멍하니 보고 있으면 애들이 ‘엄마 돌아와’ 이렇게 이야기하곤 하죠. 아이를 키우면서라기보단 시설 조사 갔다 와서 심정적으로 힘든, 그럴 때가 있어요. 


♣ 림 : 5학년, 2학년이면 아직 돌봄이 좀 필요할 수 있잖아요. 일이 있어서 늦게 들어가거나 그러면 어떻게 해요?


♤ 하 : 짝꿍도 직장이 멀어서 서로 하기는 어렵고, 지역에서 협동조합을 하면서 같이 키우기도 했어요, 그래서 저녁에 같이 봐주기도 했고요, 지금은 코로나여서 어려운 면이 있는데 또 지역에서 아이들 봐주는 센터나 협동조합을 같이하던 분들이 계세요. 앞으로가 좀 어려울 것 같긴 해요. 중고등학교 가면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 림 : 지금 발바닥행동에서는 어떤 일을 주로 맡았어요?


♤ 하 : 아직 1년밖에 안 돼서 뭘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요. 지금 저는 정책적인 내용을 보는 것을 주로 해요. 탈시설 정책 같은 거 보고 그중에 허투루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열심히 찾아보고 있어요. 각 시설에 대해 개별적으로 대응하는 것들은 다른 활동가들과 같이하고 있고, 요즘은 조사하러 많이 가려고 해요. 코로나19 때문에 들어가기 힘들어서 일부러 더 많이 보려고 하고 있어요. 


♣ 림 : 아까 탈시설도 문제지만 시설로 들어가는 구조를 막아야 한다고 했잖아요. 지금 정하 동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구조를 만드는 건가요?

         

                                                                           


♤ 하 : 향유의집 있었던 분들도 인터뷰해보면, 건강보험 혜택이 딱 끊기는 시점에 입소하시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예를 들면 건강보험이 1년 반 정도 유예기간이 끝나면 집에서 치료지원을 받기 어렵게 되고 그때 입소하신 분들도 많았던 것 같아요. 엊그제 다녀온 시설의 3분의 1 정도가 어린 아동들이었어요. 현재도 많이 유입되고 있는 거죠. 시설은 너무 정확히 그 지점을 알아서 유형화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의료상의 지원이 필요한 노인 쪽과 대안이 없는 아동 쪽, 근데 노인 쪽은 그래도 목소리라도 낼 수 있지만, 아동 쪽은 미신고시설에서 사망 사건이 일어나도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이죠. 그런 것에 좀 더 발바닥이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죠. 노인 쪽도 마찬가지로 유입이 많이 되고 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을 좀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탈시설뿐만 아니라. 


♣ 림 : 막아야죠. 우리 김포야학에도 지적장애, 발달장애가 있는 학생 어머니들 상담이 많이 들어와요. 그럴 때 이야기하죠. 시설 보내지 말라고. 우리 활동가들 다 그래요. 그러면 여기 데려올 테니까 우리 보고 아이 좀 편안하게 해주면 좋겠다고. 그런데 발달장애인들 특성상 한 가지에 꽂히면 그것에 집중하잖아요. 그러면 공부시간에는 그거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죠. 


♤ 하 : 김포야학에서 발달장애 학생들과도 수업하는 거예요?


♣ 림 : 네.


♤ 하 : 교감 선생님은 어떤 역할을 주로 하시나요?


♣ 림 : 교장 선생님과 평생교육사 팀장님이 일 처리를 대부분 하시고, 저는 주로 학생들 만나 상담해요.


♤ 하 : 교감 일은 재미있으세요?


♣ 림 : 재미라기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해야 하니까 물어보면서 하기는 하는데 아직은 힘들어요. 


♤ 하 : 엊그제 시설에 갔어요. 한 시설에 학교도, 작업장도 다 있는 곳 있잖아요. 한 학생에게 시설에서 종교 행위 강요하지 않느냐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안 한대요. 그래서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죠. 그런데 알고 보니까 학교 가서는 종교 수업을 받는 거예요. 같은 법인이잖아요. 그런 거 보면서 아이들 누구든 외부랑 소통할 수 있는 어떤 방편이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법인 안에서 같은 담장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거니까요.


♣ 림 : 맞아요, 우리가 시설에 있을 때도 정보라고는 텔레비전뿐이었어요. 막상 당사자인 우리가 결정할 게 없어요. 대부분 당사자 목소리가 없어요. 그냥 종사자들이 결정하고 그거로 끝나버려요.


♤ 하 : 저는 발바닥 활동 시작하면서 힘든 것보다 요새는 힘이 나는 일들이 많아요. 얼마 전에 동림님이 발바닥에 큰돈을 기부해주셨잖아요. 저희가 많이 놀랐었거든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는지.


                                                                     


♣ 림 : 시설에서 나오기 전에 제가 세운 열 가지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이룰 일을 적은 목록)가 있었어요.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가에 ‘내가 나가서 바꿔야 할 게 있으면 뭐라도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왔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돈을 조금씩 조금씩 모아서 뭔가 하자고 마음먹었죠. 발바닥행동 사무실에 처음 갔을 때 참여연대 근처에 있었고, 당산동 사무실에도 가봤는데 불쌍하다기보다 참 열악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그런데 꽃님 씨가 자기 수급비 10년 동안 모아서 2천만 원이나 탈시설 기금으로 내놓더라고요. 내가 참 부끄러웠어요. 그분한테. 같이 탈시설한 사람인데 나도 조금이나마 보태자고 생각하고 모았죠.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이걸 미경 씨한테 이야기 안 했어요. 짝꿍 모르게 모은 거죠. 이번에 이야기했어요. 내 꿈이었다고 말했더니 처음엔 나한테 아무 말 안 하고 있다가 ‘잘했다’ 그러더라고요. 짐 싸라고는 안했어요. 지금까지 진짜 못해본 것 중 하나가 외국 여행이에요. 원래 코로나 시작되기 직전에 함께 일본에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미경 씨가 일본엔 갔다 왔대요. 또 어디 가보고 싶냐 물어봤더니,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가고 싶대요. 그런데 자기는 돈 안 모은다고 나보고 다 모으래요.ㅎㅎ 


♤ 하 : 아까 그 열 가지 버킷리스트에 뭐 남았어요?


♣ 림 : 외국 여행 가는 거 하나 남았어요. 9개는 다 했어요. 집 마련했죠, 결혼했죠, 친구하고 친하게 지내지요, 그리고 IL센터 만들었지, 직장 다니지, 전국 여행 다녀봤지. 안 가본 데 없어요. 제주도까지 갔다 왔으니까. 강원도는 속초, 주문진, 경포대 1년에 1~2번씩 가고. 마지막 외국 여행만 남았어요,정하 동지는 이제 장판에 막 발을 들여놨는데 활동하면서 어려운 점이나 좋은 점이 있다면요?


                                                                            


♤ 하 : 좋은 점은 제대로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잘, 제대로, 사는 것 같이 사는 게 좋아요. 한순간, 혹은 한 달, 일 년을 다시 돌아봤을 때 참 좋아요. 살아 있구나, 잘 지내고 있구나, 여러 감정 중에 좋은 감정들이 훨씬 많죠, 특히 더 좋은 것은 탈시설운동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거예요. 관료조직이나 복지관에 있으면 일부러 찾아다녀야 사람을 만날 수 있어요. 혹은 내가 무언가를 내려놓거나 무언가를 포기해야 사람을 만날 수 있었죠. 그래서 지금은 사람을 그냥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게 좋고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어서 좋아요. 반면에 어려운 점도 있죠. 이건 제 개인의 어려움이라기보다 탈시설운동하는 활동가들이 공통된 어려움일지도 모르죠. 예를 들어 시설에 방문했다가 나올 때 나만 나오는 것. 저는 그게 꿈에 나와요. 어떤 활동가는 다르게 나타나겠죠. 그런 감정들을 어떻게 잘 추스를 수 있을까 고민이죠. 가끔 출근하다가 이 감정들이 올라오면 사무실에 가도 일을 못 할 것 같은 때가 있어요. 혜화역 양쪽 출구 중에 한쪽은 카페들이 엄청 많은 곳이고 한쪽은 마로니에공원 쪽이에요. 그럼 마음이 왔다 갔다 해요. 사무실에 갈 수 있을까? 오늘 감정을 좀 추스르고 가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오늘은 감정을 빨리 내려놓고 일을 하자고 생각하고 사무실 쪽으로 올라가죠. 그런 감정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런 것이 어려운 지점인데 발바닥행동 안에서 활동가들과 많이 이야기하죠. 또 저는 글 쓰는 것으로 푸는 성격인데 그렇게 풀어보고 있어요. 동림님은 어떠세요? 오래 활동해오셨는데 어떤 게 좋고 어떤 점이 어려우신지. 


♣ 림 : 저는 현장 투쟁하면서 높으신 분들과 면담하고 그럴 때 무조건 ‘노력하겠다’ 그런 말 할 때 어려운 것 같아요. 우리가 세종시나 어느 지역 탈시설 투쟁하면서 면담 들어가면 대답을 시원시원하게 안 해주고 그냥 마지못해서 ‘노력하겠다’ 그렇게 그냥 대답할 때가 제일 힘들어요. 가장 좋을 때는 시설에 있는 사람들 동료상담하러 갈 때죠. 그 사람하고 계속 만나 상담하고 나서 그 사람이 시설을 박차고 나왔을 때 그때가 제일 뿌듯해요. 


♤ 하 : 저는 한 분을 지원한 적이 있는데 그분은 의사 표현이 어려운 중증 발달장애인이셨어요.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같이 해서 탈시설한 발달장애인분이셨어요. 2020년 5월에. 전 그분 나오실 땐 진짜 좋더라고요. 그런데 활동지원 시간이 너무 적은 거예요. 그나마 프리웰 지원주택에 가셔서 안정은 되셨는데, 그사이 다른 주택 알아볼 때 시설 밖에 다른 갑질들이 너무 많아서 고생 좀 했죠. 동림님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다는 활동 계획이나 바람이 있으신가요?


♣ 림 : 저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시설에 들어가서 동료상담해서 탈시설하게 하는 것. 그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 목표에요. 


♤ 하 : 저는 흰머리 있는 활동가 되고 싶고, 그게 너무 좋은 것 같아요. 나중에 아동 탈시설 하는 것까지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발바닥에서 그 부분을 같이 하고 싶어요. 생각보다 꿈이 빨리 이뤄질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래오래 활동하고 싶습니다.


♣ 림 : 네, 오래오래 함께 갑시다. 고맙습니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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