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 성북아리는 성북 + 아리아리를 합친 말입니다.
아리아리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자, 그래도 없으면 길을 만들자”라는 우리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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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 서로 인터뷰]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1-11-16 조회수 :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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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



 성북아리는 장애인운동 활동가 두 사람이 서로를 인터뷰하는 서로인터뷰꼭지를 마련했습니다. ‘서로인터뷰는 일방적인 인터뷰가 아닌 상대방의 인터뷰어가 되어 서로 생각을 나누는 꼭지입니다. 세 번째로 박김영희 대표(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장애해방열사_)우정규 활동가(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만났습니다. (편집자 주)



              

                   

  

우정규(아래 ) :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서울장차연)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정규라고 합니다. 올해 9월에 활동한 지 1년을 넘긴 신입 활동가입니다.

 

박김영희(아래 박김) : 반짝반짝, 멋져요. 저는 장애해방열사_단 대표,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대표를 맡은 박김영희입니다. 저는 1995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회원으로 시작해서 빗장을 여는 사람들에서 활동했지요.

 

: , 제가 96년생이에요.

 

박김 : 하하하

 

: 제가 태어나기 1년 전에 운동을 시작하셨네요. 26~27년 정도 경력 차이가 나네요.

 

박김 : , 95년에 활동을 시작해서 1999년 장애여성공감 창립멤버, 2001년에 장애인이동권연대 공동대표를 맡아 활동했어요. 2010년부터는 장추련과 장애해방열사_단 활동을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3살 때부터 소아마비장애인으로 살고 있고 지금은 밤에 호흡기를 끼고 아침에 떼는 호흡기 장애인이기도 하네요.

 

: 주무실 때 호흡기를 끼신 지가 3년 정도 되신 건가요?

 

박김 : . 호흡기를 껴야만 잠을 잘 수 있고 낮에는 자가 호흡이 가능해요.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게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요즘 기자회견이나 집회에서 발언할 때 제일 먼저 저는 호흡기 장애인입니다. 제가 마스크를 벗고 발언해야 하니 여러분은 마스크를 잘 써주십시오라는 말로 시작하죠.

 

 

: 맞아요. 코로나 때문에 기자회견 같은 게 많이 줄었지만 하긴 해야 하잖아요.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인 것 같아요.

 

박김 : 요즘은 집회현장이나 기자회견, 토론회 등을 많이 못 나가고 집에서 줌(zoom)으로 하지요. 온라인으로 회의하고 심지어는 기자회견도 온라인으로 하고. 그래서 집에 있지만 더 바빠요. 각종 토론회 등도 다 들어가 봐야 하고 회의도 밤낮없이 해야 해요.

 

: 맞아요. 공간 제약이 없어지고 시간 제약만 있다 보니 여러 행사가 겹쳐서 대표님들이 진짜 더 바빠지셨어요. 원래 대표님들의 일정을 공간으로 통제했었던 부분이 있죠. 몸이 가질 못하니까 오늘은 여기까지였는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가 이젠 장비도 많이 갖추고 줌으로 하니까 대표님들은 온라인으로 저녁 7시에도, 주말 오전에도 회의하시고....

 

박김 : 그리고 계속 뭔가 검토 요청도 들어오니 밤낮없이 일할 때가 많아요.

 

: 저는 코로나 시국에 활동가로 운동을 시작하다 보니 좀 줄어든 상황이죠. 전장연은 그래도 현장투쟁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시민사회단체들은 외부 활동도 많이 줄어든 상황인 것 같아요. 코로나 전에 운동을 안 해본 세대인 거죠. 저는.

 


 

 

박김 : 아무래도 젊으니까 적응이 좀 빠르겠죠. 저는 온라인이라는 게 아직 익숙지가 않아요. 그래서 뭔가 계속 배워야 해요. 줌뿐만 아니라 또 다른 프로그램도 계속 적응하며 배워야 해요.

 

: 전장연이나 장추련 등 대표님들 나이가 꽤 있으시잖아요. 그런데도 어떻게든 다들 하세요. ‘아 힘들어하시면서도 온라인회의를 하시더라고요. 60년대 생이 많으시잖아요. 저희 어머니가 62년생이시거든요.

 

박김 : 61년생이에요. 하하하.

 

: 60년대생 중증 장애여성이면 가족이 시설에 입소시킨다던가 그런 경험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어릴 적 힘들었던 경험이나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박김 : 여러 가지 있죠. 스물다섯 살까지는 거의 집안에서만 살았고, 일 년에 두 번 정도 외출했어요. 연례행사였죠. 부활절과 성탄절, 그 외에는 외출이 별로 없었어요. 그리고 더 어렸을 때는 동생들이 학교 갔다 와서 저녁때 산책하자고 하면 수동휠체어를 타고 나가기도 했죠. 동네 사람들이 구경난 것처럼 나를 쳐다봐요. 동생들이 짜증 내면서 구경났어요? 왜 쳐다봐요했죠. 그런 상황이 반복되니까 조금씩 불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점점 나가지 않게 됐고, 스물다섯 살까지 대부분 집에서만 지냈어요.

 

우리 살던 곳 다섯 집 건너쯤에 영화관이 있었어요. 시골에는 3일에 한 편 정도 새로운 영화가 들어와요. 그러면 할머니가 저를 업고 그 영화관에 갔죠. 김지미, 신성일 이런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들이었어요, 뭔진 잘 몰랐지만 그거 보는 재미로 살았죠. 그리고 옛날에는 세계문학전집, 한국문학전집 이런 걸 집에 갖춰놓는 게 자랑거리였어요. 저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 학교 다닌 게 전부예요. 그런데 동생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할부로 구매했어요. 그때 집에서 책 읽는 게 아주 재밌었어요. 또 라디오 듣는 게 취미였어요. 강원 지역방송이나 엠비시(MBC) 라디오 같은 데 글 써서 보냈어요.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뭔가 써지더라고요. 그걸 보내서 제 글이 방송에 나가면 상품 받는 게 참 재미있더라고요. 엠비시 여성싸롱 이런데 글 보내서 이달의 편지’, ‘올해의 편지이런 거에 뽑혀서 상품도 받고, 그 재미로 살았어요.

 

이십 대 중반에 천주교 영세받고 나서는 라디오를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전국의 사람들과 펜팔하는 재미에 빠졌죠. ‘사랑의 고리라는 천주교 여성 공동체모임이 있는데 거기 계시던 뇌병변장애인인 안젤라라는 분이 우리나라 색동문학상을 받았어요. 서정슬이라는 뇌병변장애인인데 동시를 썼어요. 그분이 여성 잡지에 기사화된 걸 보고 제가 편지를 보냈죠. 그분이 사랑의 고리 공동체에 살고 있어서 나도 자연스럽게 회원이 되었어요. 그 이후로 생전 처음 집을 떠나서 부산이라는 곳에서 살아봤어요. ‘사랑의 고리에서 일주일 동안 살고 집으로 돌아왔죠. 그러면서 사람들을 점점 많이 알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걱정을 했죠. 14녀 중 내가 맏이인데, 동생들은 날 보고 언니 걱정하지 마, 내가 같이 살게이런 말을 했어요. 그런데 동생들이 결혼할 때마다 동생 친구들이 언니 속상하죠? 영신이가 언니 데리고 산다고 했었는데.’라고 해요. 이런 이야기를 여동생 결혼할 때마다 계속 듣는 거예요. ‘동생들이 나를 데리고 살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 가족들이 피치 못할 상황에서 시설로 가라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시설을 알아봤죠. 아마 충북 제천쯤 어디였는데 겨울이었어요. 시설 측에서 이불이랑 옷은 들고 오려면 힘드니까 미리 보내라고 해서 소포로 다 보내고 남동생하고 그곳으로 갔죠. 들판에 비닐하우스로 된 곳이었어요. 그 안에 설치된 평상에서 장애인들이 살고 있었고 책임자라고 하는 사람도 장애인이었어요. 무슨 제품을 조립하는 일을 하면서 생활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직접 가서 보니까 저 같은 중증장애인은 없더라고요. 화장실 가는 것, 먹는 것, 입는 것 다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내 처지에 그곳에서 지내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죠. 그래도 여기서 살아볼까 잠깐 고민도 했지만, 아니라는 결정을 하고 돌아왔어요. 나보고 입소하라고, 다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일일이 남한테 도움받으면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옛날에는 여름방학 겨울방학 때 대학생들이 집집마다 방문해서 이방자 여사가 명휘원이라는 장애인시설을 만들었다면서 거기에 장애인을 보내면 일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 엄마가 거기 가면 화장실 가고 먹는 것은 다 해주냐 그랬더니 그것은 못 해준대요. 그래서 거기도 아닌 것 같다고 했죠. 그때 본 팸플릿 중에 명휘원도 있었고 삼육재활원이라는 곳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부 손을 쓸 수 있는 사람, 보행이 가능한 사람만 있더라고요. 사진만 보고도 알겠더라고요. 늘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고민을 했죠.

 

: 뭔가 가족의 부담으로 남아있다는 고민을 스스로 하신 거잖아요?

 

박김 : 2000년대 초 탈시설 이야기가 나오면서 보건복지부에 요구해서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과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나온 결과가 시설에 있는 장애인 대부분이 누가 보내서 온 게 아니라 내가 오고 싶어서 왔다고 답했어요. 복지부가 봐라, 본인들이 원해서 온 것 아니냐라고 하더군요. 사실은 시설에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간 게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죠.

 

: 그렇죠.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어서 그렇게 선택한 건데 설문조사에서 그렇게 답하니까 장애인들이 원한다고.

 

박김 :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시설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 못 하는 거죠. 제 어릴 적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정규 님의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 저는 부산이 고향이고, 서구 남포동 쪽에 있었어요. 외국 살다 온 기간 말고는 한동네에서 쭉 살았어요. 제 친구들도 다 비슷해요. 지금도 고향 내려가면 초등학교 때 친구를 만나요. 부산 도착하자마자 말이 달라지죠. 원래 부산 사투리 억양이 무척 세요.

 

초등학교 때 발달장애인 친구와 같은 반이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없었고. 대학교 때가 어떻게 보면 장판에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됐죠. 1학년 동기 중에 청각장애인 친구가 있었어요. 원격지원교육이라고 해서 노트북으로 속기사가 내용을 속기하고 청각장애인 학생이 그 화면을 보면서 공부하는 시스템이죠, 그런데 장비가 많이 필요해요. 노트북도 있어야 하고 화상 캠도 있어야 하죠. 이런 것을 실행하기 위한 장애학생지원도우미라는 제도가 있는데 지원센터에서 담당하거든요. 그런데 1학년 1학기까지 그 친구를 지원하던 동기가 그만하게 되었어요. 청각장애 학생은 2학기에 새로 도우미 학생이 필요했죠. 그 당시에 대학을 졸업하려면 봉사시간을 채워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사회복지학과인데도 뭔 대학까지 와서 봉사시간이 필요하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자원봉사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박김 : 그런데 사회복지학과는 왜 갔어요?

 

: 원래 전 대학을 안 가려고 했거든요. 고등학교를 자퇴한 이유 중 하나가 제가 뭘 잘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뭘 잘하고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게 막연한 두려움으로 다가왔어요. 고등학교 가는 순간부터 입시에 뛰어들어야 하고 먹고살 길을 찾아야 하잖아요. 제가 뭘 잘하는지는 몰라도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야 하는데 전혀 그런 걸 모르겠더라고요. 자퇴하고 대안학교에 갔죠. 여행을 교육 모티브로 삼는 대안학교였어요. 여행 다니면서 저 자신에게 질문을 굉장히 많이 던졌어요. 전 남들하고 같이 사는 것을 무척 즐기는 타입이더라고요. 그리고 괜찮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고. 남들 도우면서 사는 게 좋은 것 같다고 생각했죠.

 

대안학교는 18개월 과정이었는데 그중 9개월은 인도와 네팔에 있었어요, 또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을 배낭여행으로 많이 돌아다녔죠. 제 미래를 생각해보다가 그때는 군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제시간에 맞춰 일어나고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것은 자신 있었거든요. 2년을 여행 갔다 오니 남들 고3일 시기에 저는 검정고시까지 다 마친 고졸 백수였죠. 그래서 집에서 뒹굴뒹굴 티브이 보고 있었거든요. 그때까지 아버지가 제게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한 게 하나도 없었어요. 뭐 한다고 하면 왜 그러냐고 물어봐 주시고, 저도 그런 선택에 대해서 뭔가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갔어요. 그런데 갑자기 대학에 안 갈 거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전 그대 대학 갈 생각 전혀 없었죠. 그래서 당당하게 이야기했어요. 내년에 부사관 시험 쳐서 직업군인으로 가고 나중에 소방관으로 이직할 생각이라고, 그랬더니 아버지가 너는 네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문제를 가족이랑 아무런 상의도 안 하냐면서 대학에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군인은 안된다는 거예요. 그때까지 안된다는 거 한 번도 없었는데. 군인은 안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막막했죠. 나중에 현역으로 군대 갔다가 제대하고는 아버지한테 그때 나 잘 말렸다고, 군인 안 하길 너무 잘했다고 말씀드렸어요.

 

대학 가서는 사회복지학을 공부했어요. 무척 재밌었고 사회복지사를 꿈꿨죠. 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서 일하려고 알아보다가 서울장차연까지 지원하게 되었어요. 그동안 희망하는 직업이 많이 바뀌었어요. 10대 후반에는 군인, 소방관이었고 사회복지학과에 가서는 사회복지사, 연구원 등이었죠. 그런데 뭔가 꿈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 같은 꿈을 꾸는데 실행하는 수단이나 방법이 조금 다를 뿐 지향하는 부분은 모두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아까 청각장애학생 도우미 일을 했다고 했잖아요. 그 일을 하면서 장애인 친구들을 많이 만났어요. 대학에 장애인학생도우미 커뮤니티가 있어요. 동아리를 만들려고 했는데 학교에서 동아리로 인정해주지 않아서 암묵적으로 운영하는 모임이었죠. 그 모임에서 보니까 차별사례가 무척 많더라고요. 예를 들어 학교에 청각장애인이 20명 가까이 되는데 노트북 3대로 돌려쓰고 있어요. 노트북이 쉴 틈이 없는 거예요. 컴퓨터라는 게 소모품이잖아요. 노트북이 많이 쓰면 생각보다 굉장히 빨리 고장 나거든요. 학생복지처에서 잘 관리해야 해요. 파일이 많아지면 주기적으로 포맷해서 속도가 느려지지 않게 해야죠. 속도가 느려지면 청각장애인학생은 그동안 수업을 못 듣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런 일이 수시로 발생했어요. 그래서 학교에 문제 제기를 시작한 거죠. 3시간짜리 수업인데 10분 만에 노트북이 꺼져버린 거예요. 저는 수업 듣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 친구는 2시간 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거나 다를 게 없게 된 거죠. 그런 상황이 자주 반복되니까 제가 많이 화났어요. 수업 중에 학생복지처에 전화하고 바로 학생복지과에 가서 따졌죠. ‘노트북이 또 고장 났다. 이거에 대해 어떻게 보상할 거냐?’라고 따졌더니 담당자가 엄청 거만하게 팔짱 끼면서 그래서 뭐가 불편해서 왔는데요?’ 이러는 거예요. 어이가 없더라고요. ‘장애학생 입시전형도 없는 학교에 청각장애인이 당당하게 입시 경쟁과 면접을 거쳐 들어온 건데 학교가 청각장애인인 것을 알고 입학시켰으면 학생복지처가 책임져야지, 이것을 학생한테 전가하면 어떻게 하냐. 저 학생은 강의실에 앉아 있지만 노트북이 제 기능을 안 하면 수업을 듣는 게 아니다.’ 막 소리 지르며 이야기했죠. 그다음 학기에 장비를 다 바꾸더라고요. 그걸 보니까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죠. 그냥 무책임하게 그 민원처리를 무시했던 거예요. 그때는 이런 일을 장애인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학교 배리어프리 캠페인 정도로 생각하고 활동했죠. 선배 중에 뇌병변장애인인데 다리를 심하게 절어요. 비 오는 날 학교 오다가 경사로에서 넘어진 거예요. 그곳이 경사가 너무 심해서 항상 난간을 설치하라고 요구했는데 선배가 다치고 나니까 만들더라고요. 부실 공사로 시각장애인 유도블록 튀어나와서 시각장애인이 걸려 넘어지기도 했고요. 그런 것들을 매주 보고 듣고 하다 보니까 다 모아서 학교에 전달하는 그런 활동을 했어요.

 


 

 

졸업할 때까지 해결하지 못했던 것도 있죠. 제가 다닌 대학교 동아리방이 학생회관 3층부터 쭉 있어요. 동아리도 엄청 많아요. 50개 이상 되는 것 같아요. 아는 형이 법대생이었는데 휠체어를 탔죠. 그 형이 졸업하면서 나는 대학 다니면서 동아리 활동을 한 번도 못 해본 게 너무 아쉽다라고 말하더라고요. 그제야 그 형이 동아리방에 갈 수 없었다는 걸 알았죠. 악기 배우고, 술도 먹고 다 동아리방에서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지체장애인학생들은 동아리 활동을 하나도 못 했던 거죠. 그걸 졸업할 즈음에 알았다는 게 너무 미안했어요. 그래서 이 문제를 또 학교에 제기하니 건물이 오래돼서 못 짓는다, 건물이 외벽으로 된 건 못한다는 등의 이유를 대더라고요. 그런데 그 형 졸업하고 제가 군대 갔다 오니까 엘리베이터를 짓고 있더라고요. 그 건물 안전규정이나 편의시설 규정이 지자체 규정에 부적합하다면서.... 만약에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장추련이나 국가인권위원회에 총장을 찔렀을 텐데,

 

박김 : 그럼 부산에서 계속 살았어요? 서울엔 언제 올라온 거예요?

 

: 20209월에 왔어요. 군 생활 빼고 서울 올라온 게 다섯 번도 안 돼요.

 

박김 : 그럼 지금 혼자서 자취해요?

 

: 네 성균관대 앞 4.5평짜리 원룸에서 살고 있어요. 아까 이야기 들어보니 대표님도 부산과 인연이 있으시네요?

 

박김 : 저는 25살 때부터 베네딕토수녀회가 운영하던 사랑의 고리라는 단체를 알게 돼서 부산에 1988년쯤 처음 갔어요. 부산대 근처 부곡동에 온천이 있고 동네 시장이 있었어요. 처음엔 지나가는데 싸움이 난 것 같아서 구경하려고 가보니 사람들이 그냥 평범하게 이야기하는 중이더라고요. 어찌나 목소리가 크고 빠른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못 알아들었죠. 조그만 애들이 사투리 쓰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무척 재밌어서 계속 말 시키고.

 

 

강릉집에서 부산까지 버스로 한 7시간 걸렸죠. 베네딕토수녀회 안에 두 칸짜리 방을 빌려서 사랑의 고리 장애여성들이 공동체 생활을 했어요. 1년에 한 번씩 부산에 가면 열흘 정도 있으면서 아침마다 미사도 보고 수녀님들도 만나고, 그리고 수사님들과 부산 빈민촌에 장애인들 만나러 다녔죠, 거기서 만난 장애인들을 사랑의 고리 모임에 참여를 권하고 그랬어요. 한 달에 한 번씩 광안리에 있는 공동체에서 모임도 했어요. 그러던 중에 다니던 해운회사에서 아버지가 부산으로 발령이 나면서 부곡동에서 3년을 살고 1990년에 서울로 이사 왔어요.

 

25살까지 집에서만 지내서 사회성이나 대인관계 맺는 걸 잘 못 했어요. 그런데 부산에 가서 많은 사람을 만나며 사회성도 키워지고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능력도 많이 늘었죠. 지금도 그 당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요. 그런 관계 맺음이 나에게 하나의 자양분이 돼주었어요.

 

정규 님은 서울에 와서 전장연이라는 장애인운동 조직을 접하셨잖아요? 낯설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 현장에서 싸우는 동지들 모습이 전 무척 좋았어요. 시작할 땐 많이 들떠있었는데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해요. 함께걸음을 읽다가 비마이너도 알게 됐죠. 군대에서도 비마이너는 계속 봤어요. 제가 전공이 사회복지학과라 종합복지관에 실습을 나갔죠. 전공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게 법이에요. 수소문해서 광주지역에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이라는 단체에서 1개월간 자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과정 속에서 잠시 전남장애인권익옹호기관의 활동가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참 괜찮은 거예요. 그러다가 4학년 2학기에 취업 준비를 하며 이력서를 여러 군데 많이 넣었죠경기북부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도 넣었는데 면접발표날이 서울장차연 최종발표일이랑 같았어요. 서울장차연 합격이 먼저 확정된 거죠. 원래 시민사회단체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이런 단체들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채용공고에 코가 꿴 거죠. 채용공고에 보니까 사회복지사가 아니어도 되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여기다가 다 적어놓았더라고요.

 

면접은 박옥순, 문애린 동지랑 봤는데 참 인상 깊었어요. 학교에서 면접을 준비하면 시사나 관련 이슈 등의 답을 준비하잖아요. 그런데 그날 면접에서 내가 어떤 책을 읽었다고 답하면 그 책 읽고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냐,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등 내가 생각하는 가치에 대해서 계속 물어보시더라고요. 사실 박옥순 사무총장도 제 어머니뻘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어른이 요즘 20대한테 그런 질문하기가 쉽지 않죠. 그런 어른 만난다는 것도 굉장히 귀한 경험이었어요. 진보 장애인운동하는 이곳에나 경험하지 다른 현장에선 거의 없어요. ‘저 사람도 굉장히 높은 사람일 텐데 별다른 거 안 물어보고, 이런 거 물어봐 주네, 재밌겠는데그래서 그때 마음먹었죠.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재미있어요.

 

박김 : 그래도 고민거리는 없어요?

 

: 고민은 뭐 일이 많은 것인데 고민한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그래서 현실적으로 고민하죠. 제가 서울장차연 단체회원이나 후원회원 관리도 해요. 그래서 지금 재정 상황으로는 활동가를 더 뽑을 수 없다는 것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고 그래서 일단 견디는 거죠. 일이 힘들거나 그런 것은 당연히 각오했었고, 각오했던 것보다 더 힘든 것도 분명한데 재밌는 게 더 커요. 최근엔 일하면서 힘들다는 생각을 진짜 한 번도 안 했어요. 요즘도 밤 9시나 11시쯤 퇴근할 때도 많거든요? 사무실에서 집까지 15~20분 정도 걸어가요. 퇴근길에 힘들다, 못하겠다는 생각보다 오늘도 진짜 재밌었다는 생각이 자주 들죠. 단체가 지향하는 관점과 내가 지향하는 가치가 일치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거든요. 그러면 잃을 게 없어요. 얼마 전에 버스 위에 올라가서 경찰에 연행됐을 때도 내가 한 일이 맞는다고 하고 들어갔어요. 그래도 또 올라갈 상황이면 올라가겠죠.

 


 

박김 : 맞아요. 운동이라는 게 그렇더라고요. 저도 지금까지 해오면서 나에게 주어진 것을 피하지 않고 받으면 그게 운동이 되고 그것이 하나의 작은 변화를 만들어요.

 

: 제 목표를 하나하나씩 이뤄주는 공간이죠. 저는 지금 서울장차연에서 하던 일을 부산에서 하는 것이 꿈이거든요. 도망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서울이 그나마 장애인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하잖아요. 저상버스도 많고 활동지원서비스도 그렇고 예산, 일자리사업 등 서울시가 장애인정책을 선도하는 게 아주 많죠. 아까 80년대에 살아보셨다니 아시겠지만, 부산이 엄청 열악하거든요. 진짜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장애인이 살 곳이 못 돼요. 언덕도 너무 많고 사람들 성격도 급하고. 저는 여기서 잘 배워서 나중에 내가 사는 곳에서 이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분명히 있고, 지금은 배워야 하는 상황이 많으니 뭔가 계속 잘 흡수하려고 해요. 활동가가 얼마 없다 보니까 제가 공문, 보도자료, 제안서, 요구안 다 쓰죠. 일이 많아도 재밌는 게 더 커요. 주변에서 걱정도 많이 하죠. 그러다 소진된다고. 그런데 저는 소진되면 그때 고민하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소진이 영어로 번아웃이더라고요. 재만 남는 것. 근데 저는 다 태우고 생각하려고요. 지금 재밌는데 굳이 먼저 겁먹을 필요가 없죠.

 

박김 : 미리 지칠 것을 걱정해서 재밌는 것을 안 하는 것보다 재미있게 해야죠.

 

: 맞아요. 그냥 모두 소진하고 지쳐버릴 수도 있죠. 스포츠도 아니고 삶인데. 힘드냐고 물어보면 힘들다. 근데 재밌다.’라고 말하죠. 서로 챙기는 것이기도 한데 전 아직은 열심히 달려가고 있으니까요.

 

박김 : 정규 동지 이야기 들으니까 저도 에너지를 받고 힘이 나네요. 활동을 처음 시작한 동지 중에 계속 이걸 할지 모르겠어요. 언제까지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힘들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내가 기운이 빠져요. 그래서 요즘에 지친다, 힘들다, 떠나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후배들 통해 들으면 이 운동을 끝까지 할 사람은 누구일까?’ 아니, 끝까지 하지 않더라도 현재 하는 일이 재미가 없다면 이걸 누가 할 수 있을까?’ 이런 부분이 요즘 저한테 큰 고민거리거든요.

 

 

: 저는 지금 해야 할 일을 할 때는 다음을 별로 생각 안 해요. 물론 하고 싶은 것이 아직 많이 남아서 평생 서울장차연에 있을 생각은 당연히 없죠. 저는 자동차 정비도 배우고 싶어요. 군대에서 장갑차 조종수였는데 되게 잘했어요. 그리고 부모님이 식당을 하세요. 제가 요리도 곧잘 하거든요. 나중에 자영업도 해보고 싶어요. 돈 많이 벌어서 장추련에 후원 많이 하면 그것도 운동 아니에요? 지금은 그냥 유쾌하게 생각해요. 활동을 그만두는 사람이 그냥 그만두는 거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저 처음 들어왔을 때 서울장차연 상임대표 문애린, 사무국장 김순화였는데 지금은 저 말고 다 바뀌었어요. 지금 이규식 대표랑 활동하는 것도 참 재밌어요. 에너지를 많이 받죠. 사무국에서 중증 뇌병변장애인이 어떤 활동을 해나가야 할까 고민도 있는데 이규식 동지는 대표로서 역할이 있어요. 조직하고, 현장에서 싸우는 등의 역할이 있고, 사무국 활동가는 사무국에서의 역할이 있는 거죠. 뭔가 아주 재밌게 가는 중이에요. 이규식 대표에 대한 걱정이라면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생긴 건 덤프트럭처럼 생겼는데 마음 쓰시는 건 마티즈에요. 따뜻한 분이죠.

 

박김 : 규식 동지가 투쟁 현장에 나갔을 때랑 사무실에 있을 때랑 눈빛이 다르잖아요?

 

: 일단 낯빛이 꽤 밝아졌어요. 원래 까만 것도 있지만, 지난해에 얼굴이 회색이었는데.... 사무실에선 잘 웃으시고.

 

박김 : 센터 소장하는 것도 참 힘든 일이었을 거예요. 투쟁 현장에 나와야 하는데....

 

: 제가 힘들지 않아요?’하고 물어보면 재밌어이래요. 서로서로 사무국 일에 잘 맞춰 가는 시기인 것 같아요. 어쩌다 보니 제가 서울장차연에서 제일 오래된 활동가가 됐고. 이규식 대표는 신입 활동가죠. 활동한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최고참 활동가가 돼버린 이상한 단체여서 더 재밌죠. 뭔가 이상한데 재미있어요.

 

, 박김 대표님 스물다섯 살 이후 살아온 이야기도 해주세요.

 


 

 

박김 : 전 오래 살아서 이야깃거리가 너무 많아요. 일단 장애여성공감 처음 시작할 때는 진짜 착한 장애여성이었어요. 운동을 시작하고는 못된 장애여성이라고 욕을 먹기 시작했고 지금은 뭐 적당히 어떤 노인네로 살까? 어떻게 즐거운 노인네가 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죠. 요즘 고민이 하나 생겼어요. 양로원도 장애인은 안 받아준다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에 어떤 장애여성이 장애가 더 심해져서 요양원에 들어가려고 상담했는데 장애인이라니까 안된다고 했대요. 같은 노인들 안에서 비장애인 노인들이 장애인 노인들과 같이 지내는 것을 불편해한다는 이유래요. 그분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장애인으로 산 것도 서러웠는데, 요양원에서도 거부당하니 슬프다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늙어도 차별당하는구나. 노인이 돼서 몸이 힘든 것도 있고 불편함도 있고, 할 수 없음이 있는 몸들인데 장애인이었던 사람과 비장애인이었던 사람 사이에 이런 또 다른 차별들이 있다는 고민이 시작된 것 같아요.

 

아무튼 부산에서 사랑의 고리라는 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부산의 장애여성들, 그리고 전국의 장애여성들을 만나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장애인 안에서도 더 차별받아야 했던 너무 많은 경험을 들었거든요. 예를 들면 집에 전기 고치러 온 사람이 아기도 키우고 결혼도 한 장애여성에게 성적인 희롱이나 성폭력 같은 행위를 저지르는 일이 일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을 어디 가서 이야기할 데가 없는 거죠. 그런 상황들에 대해 너무 억울해하고 화만 내고 있었죠.

 

1995년도에 베이징에서 세계 여성대회가 열렸고 우리나라에서 보고대회를 하는 행사가 있었어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빗장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이 있었고 박옥순 활동가가 간사였어요. 우연히 거길 알게 됐고, 96년도부터 그 모임 활동을 하게 됐죠. 97년도에 미국 워싱턴에서 세계 장애여성 리더쉽 포럼이 있었어요. 거기 한국 대표단 단장으로 가서 세계 81개국 장애여성들을 만나면서 시야가 크게 넓어지고 인식이 확대됐어요. 거기서 아시아 장애여성들은 남성들로부터 얼마나 맞아 죽고 있는지, 얼마나 성폭력을 당하는지 말하고, 아프리카 장애여성들은 어떻게 먹고살 것인지, 미국에서 어떻게 원조받을 것인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유럽 장애여성들은 레즈비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굉장히 충격을 받았죠. 거기다가 유럽의 장애여성들은 다리에 보조기를 차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거예요. 그리고 양쪽 팔 절단된 장애여성이 누드모델을 해요. 우리나라 장애인들은 장애의 몸을 감추는 데 급급했거든요. 다 가려야 되고, 남의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하고, 어떡하면 정상의 몸처럼 보여서 사람들한테 인정받을지 고민하는 그런 나라에서 살아왔는데. 장애인의 몸이 부끄러운 게 아니구나. 이걸 깨닫게 되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된 거죠.

 

1999년도에 장애여성공감을 만들어서 고덕동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우리끼리 워크숍도 하고 모임도 진행했어요. 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나왔느냐 하면 96년도에 남부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처음으로 1회 여성장애인 대회를 했어요. 보건복지부에서 예산을 받아서 하는데 포스터 만들고 공문 쓰는 등의 실무를 빗장을 여는 사람들 회원들이 다 했어요. 지금 정의당의 배복주 부대표와 전장연 박옥순 사무총장이 연구소 간사였어요. 역사적으로 함께했던 사람들이죠. 1회 여성장애인대회를 한다고 연구소에서 같이 준비하면서 포스터가 나왔는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이름은 크게 나오고 빗장을 여는 사람들은 조그맣게 나온 거예요. 실무는 우리가 다 했는데. 우리는 장애여성의 이름으로 하는 게 중요했죠. 그래서 문제를 제기했죠. 그렇게 갈등이 심화하다가 97년도 6월에 세계장애여성 리더쉽 포럼에 참가하러 미국에 갔다 오니까 배복주 간사를 해고한 거예요. 간사가 우리 편을 들었다고 부당해고한 거죠. 그래서 미국에서 오자마자 시각장애, 지체장애 여성들이 빗장을 여는 사람들 이름으로 미국 다녀온 보고회를 한 뒤 연구소 측으로부터 부당해고에 대한 사과를 받고 탈퇴한 거죠.

 

그 시기에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서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고덕동에 방을 얻어 살면서 매주 워크숍을 했어요. 장애여성의 여성주의가 뭔지, 여성주의에서 장애여성은 왜 빠져있는지, 장애가 있는 몸은 어떤 경험을 하는지 등을 이야기하고 글쓰기 작업을 했어요. 그리고 글을 모아 공감이라는 잡지를 냈어요. 그런데 사람들 꽤 많이 읽기 시작했고 언론에 기사화도 됐어요. 사회에 알려지면서 정립회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장애여성 모임을 했어요. 그러다가 우리의 단체가 필요하겠다 싶어서 1999년에 9명이 모여 장애여성공감을 창립하게 됐죠. 창립하자마자 어떤 지역에서 지적장애여성이 주민들에게 수년 동안 집단 성폭력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어요. 그 사건을 여성단체들과 함께 공동대응하면서 장애여성운동이 좀 더 알려지기 시작했죠. 그 사건에서 처음으로 가해자 3명을 처벌했어요. 지적장애여성에 대한 성폭력사건으로 처벌된 적이 그전에는 없었거든요. 그 사건을 기점으로 공대위가 만들어지고 가해자가 처벌되니까 전국에서 지적장애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엄청나게 알려지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2000년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장애여성 전문 성폭력상담소가 만들어지고 장애여성공감은 2000년에 강동구 명일동에 사무실을 얻고 상담소도 내며 자리 잡았죠.

 

2000년에 제가 장애여성공감 대표를 맡고 장애여성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쯤인 2001년 장애인이동권연대의 투쟁이 시작됐어요. 그때 노들장애인야학 학생이던 이규식 활동가가 혜화역에서 추락하는 사고 나서 공대위가 만들어지고 박경석 대표가 저보고 공대위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죠. 그래서 최용기 대표, 박경석 대표, 저 이렇게 세 명이 공동대표가 되고 그때부터 투쟁 현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죠.

 

 

2007년에 진보신당 비례대표로 정치 활동을 약 3년 정도 했어요. 201011월부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사무국장을 맡았죠. 그 해에 장애해방열사_단 대표도 맡았어요. 3년 만에 다시 장애인운동으로 돌아온 거죠. 지금은 직접적인 장애인 권익 옹호 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2007년도에 제정되고 그 법을 제대로 이행하는지를 감시하고 모니터링해야 하는데 전국에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복지부와 관련이 있다 보니 자유롭지가 않아요. 장추련이 그 역할들을 하고 있죠. 장애해방열사와 희생자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일도 계속하고 있고요.

 

: 서울장차연에서 활동하면서 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일을 안 하고 있다는 걸 넘어서 저러면 안 되지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것 볼 때마다 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 안 가길 잘했다고 생각하죠.

 

박김 : 그래서 공익변호사들이나 법률가들과 계속 모니터링하고 차별 상담 들어오면 대응하고 그런 일을 계속해요. 저는 제일 먼저 장애여성운동을 시작했고, 그다음 이동권투쟁이었고, 정당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권익옹호 활동과 장애해방열사를 추모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남이 안 하는 것들을 계속하면서 보람도 있고요.

 

: 새로운 일이 계속 튀어나오잖아요. 운동이라는 것이 권리가 확장되면서 새로운 게 계속 튀어나오는 것 같아요.

 

박김 : 계속 많은 의제가 쏟아지죠. 1981년 심신장애자복지법이 만들어지고, 1989년엔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제정된 뒤 2000년대 들어서 장애인 관련 법들이 많이 제정되는데 그 법을 제정하기 위한 지난한 투쟁이 있었죠. 지금은 탈시설이라는, 거대한 시설 권력과 싸움을 해야 하는 과제도 있고 우리에게 너무너무 많은 과제가 있어요.

 

: 맞아요. 싸울 것은 너무 많은데 몸이 부족해요. 저는 사실 탈시설이라는 것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장판에 들어왔거든요. 이동권은 알겠는데 왜 탈시설 투쟁을 해야 하는지 처음 활동할 때는 의문을 들었죠. 활동 초기에는 탈시설이 맞나? 시설이 괜찮아지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아재활원 사건이 터지고, 그 이후에도 시설문제가 계속 터졌죠. 또 발달장애인이 고독사하고, 돌아가신 어머니 곁에 살면서 구걸하다가 발견된 방배동 모자 비극 사건도 있고요. 그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제 탓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전히 장애인을 가장 싸게 취급하는 예산이 장애인 거주시설 예산인데 아직도 그런 수단으로 통제하려는데 머물러있는 거죠. 비장애인과 비교해 장애인의 권리가 아직 발목에도 못 미친다고 생각하거든요. 활동지원서비스가 그나마 장애인 권리의 방향을 보여주는 제도라고 생각해요. 장애인 거주시설에 모아놓으면 그 운영비 등이 활동지원보다 쌀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거주시설 수용에서 장애인 자립생활을 위한 활동지원서비스로 갔을 때 권리의 주체성은 완전히 달라지죠.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성을 누가 쥐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활동지원 받으며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장애인들은 그 방향성을 자기가 쥐고 있고, 시설 안 장애인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참 많은 오해를 받는 게 탈시설이 아닐까 생각해요. 장애인이 거주시설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람도 결국엔 그 장애인이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은 있는데 그거 말고 대안이 없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인프라가 없다는 것이죠. 사실 그 모든 인프라를 포함하는 게 탈시설인데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참 아쉬워요.



 

 

박김 : 1년 활동하면서 장애인운동이 본인의 운동으로 맞는지, 본인 운동의 지향점과 맞닿아있다고 느끼나요?

 

: 저의 운동이라는 부분은 잘 모르겠고, 제가 그리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게 큰 것 같아요. 단체가 지향하는 가치와 내가 생각하는 게 일치하는 것. 서울시가 지금 이따위로 잘못된 정책을 펴고 있는데 그것이 잘못됐으니 이렇게 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죠. 활동가로서의 장점은 이런 것들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장애인이 사회적 약자잖아요. 약자의 편에 서서 당당할 수 있는 것, 그게 서울장차연 활동가로서의 장점이에요. 당신들이 아무리 나한테 뭐라고 해도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곳을 택해서 나는 떳떳하다는 자신감이 있죠.

 

박김 : 너무 좋아요. 저는 사실 긴 세월 운동을 했잖아요. 비장애인과 함께 장애인운동을 하면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게 어떤 협상에 대표성을 갖고 들어갔을 때죠. 비장애인 네가 뭘 알아? 장애인이 이야기해야지. 비장애인 활동가가 훨씬 오랜 세월 활동했고 내용적인 면에도 더 설득력이 있어도 언제나 그런 자리에서는 작아지는 것이 있죠. 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이런 소외감을 느낄 때마다 이것 때문에 혹시 장애인운동을 내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타자화된 남의 운동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가끔 들 때가 있었거든요.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가 지향하는 점이 분명히 있잖아요. 같이 잘 살고 싶고, 제대로 된 정책을 꿈꾸면서 투쟁으로 만들어가는데 제가 돋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규식 대표와 제가 있으면 전 제 역할이 있어요. 어차피 제 인생에서는 제가 주인공이잖아요. 같이 이끌어 나가는데 투쟁에서까지 제가 주인공일 필요는 없죠. 저는 완벽한 지원자가 되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잘 지원하는 길도 굉장히 멀고 험난하더라고요. 뭔가 내가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그 길을 가는데 내가 돋보이지 않는다, 내가 열심히 했는데 사람들이 잘 몰라준다,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아요. 저 진짜 열심히 살거든요. 열심히 산다고 해서 눈에 띄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또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이 열심히 살지 않는 것도 아니죠.

 

박김 : 건강한 비장애인 남성이기에 차별받지 않는 세상, 기득권을 가진 위치에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애쓰면서 사는 것도 힘든데, 그리고 내가 불편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 모두 불편하지 않은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 참 좋네요. 같이 일하면서 내가 잘 안 보여서, 놓칠 수 있는 그런 것들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고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요.

 


  

: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활동가로서의 우정규는 남겠죠. 활동 시작하고 석 달쯤 지나니까 제가 신문 기사에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제 이름 안 나와도 되고 그냥 서울시에 저상버스 100% 설치되면 그냥 기분 좋아요. 누구나 편하게 잘 살면 마냥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굳이 내가 안 보여도 돼요.

 

박김 : 보이는 것은 둘째 문제고, 불편하고 어려운, 누구나 제약을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 여기 같이 있는 사람이 굉장히 소중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 저는 전략적으로 판단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요. 서울장차연 관련 입장을 제가 말하는 것은 무척 불리한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보면 저는 제일 기득권이잖아요. 비장애인이고 남성이고. 차라리 서툰 말일지라도 이규식 대표가 이야기하는 게 맞죠. 각종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당사자중심주의라기보다는 같이 어깨동무하고 손잡고 같이 가자는 거죠. 저는 지금 손을 잡고 같이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굳이 그걸 내칠 필요도 없고 손잡은 거 그냥 같이 가보자는 것이죠.

  

박김 :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오히려 제가 힘을 받아서 너무 좋네요.

 

: 제가 오히려 기분이 좋습니다. 그동안 박김영희 대표님하고는 이야기할 시간이 많이 없었는데, 예전에 우송역에서 버스 점거했을 때 발언하셨잖아요. 제가 그때 버스 막고 앉아서 대표님 발언하시는 거 아주 가까이서 봤거든요. 발언이 무척 좋았어요. 대표님이 젊었을 때 몸이 아주 말랐었는데 경찰이 옮기려고 자꾸 들려고 해서 뚱뚱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는 말씀이었어요. 저는 그때 저분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박김 : 아 참, 정규 님 젊었을 때 아파트에 난 불을 껐다면서요? 그 이야기 좀 해주세요.

 

: 제가 아파트 19층에 살았거든요. 그런데 부모님이 자영업을 하셔서 항상 밤 11시쯤에 같이 밥을 먹었어요. 밥 먹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타는 냄새가 난다고 하시더라고요. 조금 지나서 어디선가 연기가 올라오더라고요. 나가보니까 아래층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죠. 그래서 아버지랑 내려가서 문을 두드렸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만 계신 집인데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안 나와요. 혹시나 해서 문고리를 잡으니 이미 불이 난 지 오래되었는지 너무 뜨겁더라고요. 그런데 그 집 할아버지가 어떻게 문을 여셨어요. 문을 여니까 난리가 나 있었죠. 연기가 자욱하고 두 분이 화장실에서 물을 받아서 불을 끄는 중에 할머니는 넘어져서 쓰러져계셨죠. 집에 소화기가 있어서 가져왔는데 고장 났더라고요. 아파트에 층마다 소화전이 있거든요. 18층 소화전은 줄이 엉켜있어서 제가 뛰어가서 17층에 있는 거 끌어와서 아버지께 쥐여주고 물을 틀어서 불을 껐어요. 잔불 남은 거까지 다 진압했죠. 다 끄고 나니까 소방서에서 오더라고요. 불 끄고 자려고 하는데 경찰서에서 조사받으러 오래요. 불을 누가 껐냐고 물어서 아버지랑 저랑 껐다고 했죠. 별의별 거 다 물어보더라고요. 불을 어떻게 껐냐고 해서 소화전 가져와서 껐다고 하니 보통 일반인들은 그걸 쓸 줄 모른다길래 군대에서 해봤다 했죠. 원래 아파트 현관에서 난 불이 엄청나게 큰 화재래요. 현관에서 불이 나면 보통 안에 있는 사람 다 죽는대요. 지금 말로 하니까 그런데 그때 상황은 무척 급박했죠. 아래층 할아버지 할머니 지금도 건강하세요. 그때 일이 어쩌다 모범 화재진압 사례로 남은 거예요. 그 일로 중구 소방서에서 표창을 받았죠. 소방서에서는 이렇게 화재 진압하는 게 무척 드문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이 일이 막 커져서 지역신문에 나고 그 덕에 대학교에서도 상도 받고 그랬어요.

 

박김 :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네요.

 

: 대학 다닐 때 축구동아리도 하고 밴드동아리도 했었어요. 참 바쁘게 지냈죠. 전 바쁘게 지내는 게 업인가 봐요. 서울장차연이 아니고 다른 곳이었어도 바쁘게 살았을 거예요. 바쁘게 살면 스트레스가 올 수도 있는데 일정 잡아두고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게 전 재미있어요. 사람도 많이 만나고 술도 많이 먹고. 술 좋아하는 데 지금은 멀리하는 편이에요. 제가 수면장애가 심해서 정신과에 다녔었거든요. 그런데 그 약이 술이랑 안 맞아서 어쩔 수 없이 술을 끊었어요.

 

박김 : 특별히 본인 건강 관리 하는 게 있나요?

 

: 지금은 못 하고 있어요. 지난 3월부터 무너졌어요. 축구를 좋아해서 계속했는데 도저히 마스크 끼고 못 뛰겠더라고요. 집에서 맨몸운동 하던 것도 서울장차연 일이 바빠지고 나서 일상생활 규칙이 무너지고 나서 중단했어요. 다시 해야죠.

 

박김 : 전장연이라는 조직 안에서 다른 활동가들과는 잘 어울리며 활동하시나요? 어려움은 없으세요?

 

: 남을 공격하거나 하는 사람은 전장연이라는 조직에서 견디기가 힘들어요. 참 이타적인 조직이에요. 현장에서 거칠게 싸우고 활동가들 담배 뻑뻑 피우고 그런 이미지가 있어서 처음에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각박할 줄 알았는데 웬만한 데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괜찮아요. 인간관계에서 전장연이 뭔가 안 좋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어요. 동료 관계에서도 더할 나위 없는 신뢰 관계가 있죠. 단체가 바라보는 관점과 제 관점이 다르다면 그럴 텐데, 아직 그런 건 없죠.

 

박김 : 그렇군요. 제가 참 힘을 많이 받았어요. 하하. 우리 운동에 정규 님 같은 분이 있어서 정말 좋네요. 힘이 됩니다.

 

: 전장연에서 활동하면 사람을 정말 많이 만나잖아요. 별의별 사람 다 만나는데 오히려 만나면서 힘을 얻는 게 큰 것 같아요. 사실 주말엔 사람 별로 안 만났거든요. 애인 있으면 애인만 만나지 애써 사람 만나러 다니지 않았는데 활동하면서 만난 사람들한테 힘을 많이 얻어요. 사람 때문에 힘들 수도 있겠지만, 사람 때문에 힘든 것은 어딜 가도 힘들어요. 일 때문에 힘든 것도 어딜 가도 힘들고. 본질적으로 일은 늘어나는 속성을 가진 것 같아요. 어딜 가도 늘어나요. 물론 견딜 수 없는 시점은 오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죠 머.

 

박김 : 예전에는 후배 활동가가 그만둔다고 하면 아쉽고 안타깝고 그랬는데, 이제는 그만둔다고 하면 그래 좀 쉬고 놀다 와그렇게 이야기하죠, 조금 있으면 돌아올지 모르니까요. 



 

: 그만두면 부산 내려가서 아버지랑 낚시나 하려고요.

 

박김 : 낙천적이고 좋네요. 고마워요. 힘이 돼줘서.

 

: 대표님도 힘들거나 그런 일이 있을 거 아니에요. 대표님들은 그런 이야기 잘 안 해요. 대표님들한테 듣기도 어렵고. 그런데 분명히 운동하면서 사람이 떠나는 것도 그렇고 힘든 일이 있을 것 같은데요.

 

박김 : 제일 힘든 게 사람 떠나는 거죠. 물론 죽을 때까지 평생 함께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계속 곁에서 같이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떠나겠다고 해요. 요즘에도 우리 활동가들 중에 올해까지만 할게요그러면 그래, 올해까지만 하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에 상처가 되고 그래서 나는 피를 흘리죠.

 

: 힘이 되는 순간도 있으실 거 아니에요.

 

박김 : 다시 돌아와서 일하겠다고 할 때 좋고 반갑죠. 그런데 항상 고민은 어떻게 돈을 만들어야 하나, 누가 후원해줄까 하는 거예요. 열심히 활동하는데 활동비나 기본적인 복리후생을 어떻게 갖춰줄까 하는 것이 대표가 해야 하는 고민이죠. 또 한 가지는 어떻게 이 운동이 가야 하는지 방향도 이야기해줄 수 있어야 하고 바쁘게 쫓기며 일상에서 해야 할 일 중에 놓치고 가는 것이 없는지 챙겨야 하죠. 방향이 잘못됐다면 방향을 틀 수도 있어야 하는데 저한테 그런 지혜가 있는지 고민도 하게 되죠.

 

: 저는 장판에 괜찮은 리더들이 참 많다고 느껴요.

 

박김 : 장판에 있는 다른 대표들도 다 마찬가지지만, 죽을 때 무슨 재산 남겨놓고 갈 것도 아니고 뭘 물질적으로 남겨놓고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활동가를 많이 남기고 가야 해요. 그 사람들이 또 다음 일을 얼마만큼 할 수 있는가 고민하죠. 정답은 없다는 것 같아요. 그 전에 선배들도 그렇게 하셨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것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고, 그때그때 현재의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대학로에서 사무실 운영 관련한 후원행사를 하잖아요. 그래서 어디 후원 좀 많이 받을 곳 없나 고민하고 있어요. 어제 장추련 사무국장이랑 통화하면서 많이 안 먹고 조금 먹으면 되니까 혼자 먹고살 거는 걱정 안 하는데 단체 활동가들 활동비 이런 것을 어떻게 마련하나, 어떻게 안정적으로 만들까 이런 고민을 한참 이야기했죠.

 

: 마지막으로 대표님이 신입 활동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박김 : 아까 정규 님이 말했던 이야기가 무척 고마운 이야기에요. 나중에 지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하겠다는 그 말이요. 항상 활동가들에게 제일 어렵고 고민되는 지점이 나의 지향과 조직의 지향이 다르다고 말하면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하는데 오늘 정규님은 서로 지향이 맞는 것 같다고 이야기해줘서 정말 고맙고 앞으로도 그 마음 놓지 않고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네요. 혹여 나중에 지치고 너무 힘들 때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진짜 고마워요. 정규 님 만나서 오늘 에너지 많이 받고 가요. 오래오래 있어 주세요.

 

: 대표님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활동하세요. 너무 좋네요.

 

박김 : . 오늘 참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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