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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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 이책]『사이보그가 되다』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1-11-29 조회수 :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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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사이보그가 되다



           홍성훈 활동가(성북센터)



믿기 어렵겠지만 나에게는 네 개의 팔이 있다. 그중 팔 두 개는 매일 오전, 오후 번갈아 바뀐다. 오전의 팔은 잠에서 깨어 출근을 준비하거나 직장에서 업무를 본다. 오후에 바뀌는 팔은 퇴근 후 워크숍에 참여하는 등 외부 활동을 하는 데 사용된다. 다리는 또 어떻고? 다리는 팔보다 더 많은 여덟 개다. 그중 네 개는 바퀴가 달려 있다. 바퀴 달린 다리는 배터리로 움직이는데, 온종일 안전하게 쓰려면 매일 충전하는 약간의 수고스러움을 감내해야 한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여러분은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물음표가 생길 것이다. 네 개의 팔이 있고, 다리가 여덟 개에 그 중 바퀴 달린 것이 네 개라고? 그 물음은 대개 이런 생각에 닿는다. ‘얘는 대체 무엇인가? 로봇이냐, 인간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날 번개와 함께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로봇을 상상했다면, 아쉽게도 아니다(한때 터미네이터의 근육질 몸매를 선망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도로 위를 질주하는 스포츠카였다가 헉! 하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변신하는 로봇을 상상했다면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을 쓰고 있을까? 지구를 지키려면 1분 1초가 아까울 판인데). 미안하지만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활동지원사와 다니며 일을 하고 퇴근 후 워크숍에 참여하거나 공연을 한다. 


하지만 내가 몸을 사용하는 방식은 평범하지 않고, 좀 복잡하다. 간단한 물건 집기와 집 안에서 이동하는 일은 혼자서 할 수 있지만 씻고, 먹고, 외출을 준비하려면 또 다른 팔과 다리가 필요하다. 나는 그 팔과 다리의 움직임을 통해, 그러니까 활동지원사의 노동을 통해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네 개의 팔은 나와 활동지원사 분의 팔 개수를 합친 거고, 여덟 개의 다리는 이 두 명에다가 전동휠체어 바퀴 네 개를 합친 것이다. 이제 좀 그림이 그려지시는지? 여기까지 읽으면 누군가는 김이 샐지도 모르겠다. 별것도 아닌데 왜 배배 꼬아서 말하냐고 타박할 수도 있겠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라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른 누군가와(또는 무엇인가와) ‘연결’된다는 이야기다. 나와 주로 연결되는 것은 활동지원사와 휠체어, 키보드 등이다. 이들과 연결되어 살아온 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호흡이 잘 맞기도 하지만 어떤 때에는 한숨이 푹푹 나올 만큼 삐거덕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SF(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하는 사이보그들이 부러웠다. 인간이 아닌 그들은 보통 인간의 능력을 몇 배로 뛰어넘었다. 아무리 강력한 적이 나타나더라도 초능력을 발휘하는 그들 앞에선 결국 무릎을 꿇는 게 영화의 뻔한 결말이다. 침을 꼴깍 삼키며 보았지만, 사이보그의 화려한 승리로 끝나는 마무리를 보고 나면 괜히 시무룩해지곤 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보잘것없는 몸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완벽해 보이는 사이보그들의 이야기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음을 깨닫게 된 건 한 권의 책을 통해서였다. 그 책은 아이언맨이 하늘을 휘젓고 다닐 때 지상에서 삐그덕대는 몸으로 살아가는 사이보그들의 존재를 놓치지 않는다. 삐거덕거리는 사이보그들은 영화나 드라마 속이 아닌 현실에서 살아간다. 책에서 주목하는 사이보그는 바로 ‘장애인 사이보그’들이다. 



『사이보그가 되다』(김초엽&김원영, 현실문화, 2021)는 그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김초엽은 SF 소설가이자 청각장애인 당사자이다. 또 다른 저자 김원영은 변호사이자 공연 퍼포머로 활동하는 골형성부전증 지체장애인 당사자다. ‘장애인’이라는 정체성만으로는 두 작가를 온전히 설명하기에 부족하지만 ‘장애’를 세상을 해석하는 데 주요한 도구로 사용하는 이 두 작가는 과학과 기술 혹은 의학이 장애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각자의 위치에서 질문을 던진다. 


흔히 과학과 기술, 의료의 영역에서 장애는 ‘불완전한’, 또는 ‘미발달된’ 상태로 이야기되곤 한다. 그 시각에서 보면 장애인 사이보그의 몸은 그 자체로 온전히 존재한다기보단 무엇인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자 고쳐야 할 신체다. 많은 과학-기술자들은 장애가 종식되는 ‘유토피아적 미래’를 제시하는데 그 미래에서 장애인 사이보그들은 대개 비장애인에 가까운 신체를 얻을 것으로 예측한다. 보이지 않는 사람이 보고, 들리지 않는 사람이 듣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저자 김원영은 장애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현실에서 장애란 단지 신체의 기능적(도구적) 역할을 결여한 상태가 아니라, 그 몸을 본 사람들이 ‘비정상’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할 때 비로소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169~170쪽). 즉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들이 말하는 ‘유토피아’에서조차 새로운 장애가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


유토피아적 시각의 문제점은 또 있다. 설령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그 ‘유토피아’가 온다고 해도 그 시기를 정확히 예측할 수가 없으며,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강해질수록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장애인 사이보그들이 존재할 정당성은 희미해진다는 것이다. 장애인은 치료와 극복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할 뿐 온전한 주체로서 평가를 받기란 요원하다. 따라서 장애인의 권리 보장은 지금 당장 실현해야 할 과제가 아닌 언제나 ‘나중’의 문제로 유예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과학기술과 장애, 의학과 장애는 언제나 적대적인 관계로만 있게 될까? 아니다. 분명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전이 장애인들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해왔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문제는 장애인들이 항상 과학기술과 의학 발전의 수혜자라고 보는 시각에 있다. 과학기술, 의학이 언제나 장애인을 ‘구원’한다는 시각은 그 관계를 일방적인 것으로만 보게 될 위험성을 내포한다. 하지만 김초엽이 지적한 대로 실생활에서 많은 장애인 당사자는 휠체어를 수리하거나 더 나은 보조기기의 성능을 조사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유리한지 꼼꼼히 따져보는 ‘지식의 생산자’로 살아가고 있다.


과학기술이 ‘전환의 기술’로 기능한다면 큰 품을 들이지 않고도 장애인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상에서 청각장애인에게 소리정보를 시각정보로 전환하는 문자통역을 제공한다거나, 반대로 시각장애인에게 음성해설을 제공한다면 당사자는 소외를 덜 느끼고 주체적으로 일상에 참여할 수 있다. 이 기술들은 이미 나와 있으며 일부 장애인 당사자들도 적극적으로 이를 이용해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이러한 ‘전환의 기술’ 예시는 과학기술 발전의 방향성을 설정할 때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알려준다. 


또한 장애인들은 꼭 과학기술만이 아닌 수많은 타자와 연결되거나 접속하며 살아간다. 앞에서 썼듯이 이미 많은 중증장애인이 활동지원사와 호흡을 맞추거나 보조견과 보폭을 같이하고 동료들과 서로 상담하고 돕는다. ‘사이보그’라는 의미를 기계와 결합한 존재만이 아니라 타자와 결합한 존재로 확장해서 볼 수 있다면, 현재 장애인 사이보그들의 삶을 더 입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


여전히 마음 한편에서는 휠체어 바퀴를 굴리는 장애인 사이보그보다 슈트를 입고 하늘을 날며 적들과 싸우는 사이보그 이미지가 더 끌릴 때가 많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그 ‘섹시한 사이보그들’은 적들로부터 세계를 겨우 지켜낼 뿐 본질적으로 세계의 구조를 바꾸지는 못한다(아무리 무수한 적을 쓰러뜨려도 새로운 적의 출현을 막는 구조를 바꾸어내지 못한다). 반면 장애인 사이보그들은 혼자의 힘으로는 적을 쓰러뜨리는 데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곁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사회 구조 자체를 바꿀 것을 요구한다. 때로는 거리에서, 때로는 컨테이너 위에서, 때로는 온라인 공간에서 지속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수많은 타자와 연대한다. 그 모습이 비록 ‘폼’ 나진 않아도 정신없이 질주하는 세계에 잠시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김원영의 표현대로 하면 “끊임없이 이음새를 만드는”) 장애인 사이보그들에게 나는 조금 더 기대하고 싶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매끈한 서사보다 구불구불한 몸의 이야기들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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