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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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 연재2] 공공시민노동 ① 공공시민노동과 노동의 혁신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1-12-15 조회수 : 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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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시민노동과 노동의 혁신(1)

 

 

김도현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언네서세리아트의 시대, 인간의 노동

 

작년에 한 토론회의 발제를 준비하며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다 알게 된 용어가 하나 있다. 바로 언네서세리아트’(unnecessariat)​1).불안정노동 계층을 의미하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조어가 등장한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이제 우리는 말 그대로 불필요한 계층을 뜻하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자본은 노동 배제적 이윤 축적 체제를 구축하고 있고, 이런 조건 속에서 많은 이들이 쓰레기가 되는 삶들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2)은 과장된 수사가 아니게 되었다. 김정희원은 반복적으로 출현할 신종 바이러스에 취약한 인간 자체가 자본에 하나의 생물학적 위험’(biohazard)으로 간주되면서,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에 이런 흐름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예견한다.​3)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1차 산업혁명의 시기에 형성된 언네서세리아트가 바로 일할 수 없는 몸을 뜻하는 장애인’(the disable-bodied)이었다. 그들은 우리나라 1세대 장애인운동가들이 자주 사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기생적 소비계층으로 치부되었다. 전체 장애인의 3분의 2가 직업을 가져본 적 없기에 실직자조차 될 수 없는 비경제활동인구로 밀려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 육체노동은 로봇으로 대체되고, 이에 따라 중간 관리노동은 최소화되며, 전문직의 정신노동은 인공지능과 경쟁해야 할 가까운 미래에 장애인(일할 수 없는 몸)’비장애인(일할 수 있는 몸)’의 경계는 완전히 새롭게 그어질 것이다.

 


                                 
[출처 : 게티이미지]

 

노들장애학궁리소의 고병권은 장애인이 가치를 착취당하기 이전에 가치라는 개념 자체의 폭력에 시달리는 존재들이라고 말한다.​4) 노동에 대한 논의가 계속해서 회계학적 잉여가치와 자본주의적 교환가치를 하나의 정상 규범으로 상정하는 한, 그리고 노동하는 자로서의 인간이 노동의 정의와 노동에 부여된 가치의 사회적 의미를 갱신해내지 못한다면, 그 폭력은 우리 모두에게 점점 더 가혹하게 전면적으로 행사될 것이다.

 

3회차에 걸쳐 이루어질 이번 연재글에서는 이러한 폭력과 위기의 시대를 넘어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노동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방향성을 공공시민노동개념을 중심으로 함께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워커홀릭 놈팡이라는 역설적 존재와 모순

 

우선 좀 가볍게 개인적인 이야기로부터 논의를 풀어가 보자. 주변의 동료들은 종종 나를 보고 워커홀릭(workaholic)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내가 노동 중독자라는 것인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맞을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틀린 얘기다. 노동의 가장 간결한 사전적 정의는 (육체와 정신)을 움직여 일함이지만, 사회적 의미에서의 노동이란 이것을 넘어서는 무엇이다. 어떠한 활동을 하되, 그것이 가치가 있어야 하고, 그러면 그에 따른 대가가 수반된다. , 가치가 있어서 대가가 제공되는 활동, ‘활동가치대가라는 계열 내에 있는 활동이 노동인 것이다.​5) 이것이 노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규범 내지는 통념(즉 이데올로기)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 졸업 후, 장애인운동을 하는 활동가로 살아왔던 나는 늘 무언가 꼼지락거리고 애를 써가며 가치 있는 일을 하기는 했던 것 같은데, 대개의 경우 대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때 집에 가면 언제까지 그렇게 직장도 구하지 않고 놀고먹으며 허송세월을 할 거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또한 국가에 갑종근로소득세(갑근세)를 낸 기간이나 국민연금공단에서 인정한 나의 노동 기간 역시 60개월 정도에 불과하니, 나머지 기간에 나는 사회적으로 보자면 놈팡이로 지낸 셈이다.

 


                                    [출처 : MUBI]


 이렇게 내가 워커홀릭 놈팡이라는 역설적인 존재가 된 이유는 노동에 대한 앞의 규범 내지는 통념 내에 언뜻 잘 드러나지 않는 어떤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한 가지 문제를 같이 풀어보도록 하자. 밥 짓기 보고서 쓰기 상담하기라는 세 가지 활동이 있다. , 그렇다면 이러한 활동들은 노동일까 노동이 아닐까? 누군가는 이 모두가 노동이라고 답을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이러한 활동 중 일부만 노동이라고 답할 수 있으며, 또 누군가는 모두가 노동이 아니라고 답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우리는 크게 봐서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의 경우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정답을 말할 수가 없다. 혹은 어떤 답변을 해도 오답이 되지는 않는다. ? 위의 각 활동이 노동인지 아닌지는 어느 개그맨의 오래된 유행어를 빌려오자면 그때그때 달라요라서 그렇다. 일단 시간이라는 변수를 고정했을 경우, 동일한 활동이라면 동일하거나 엇비슷한 가치가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예컨대 집에서 매일 밥 짓는 일을 하는 여성들은 그냥 집에서 노는사람 취급을 받지만, 비슷한 일을 H 자동차 공장의 식당에서 하게 되면 임금을 받고 노동자로 불린다. 또 어떤 장애인이 몇 달간 수십 권의 책을 읽고 인터넷에서 수많은 자료를 검색해 장애인의 자립생활 증진 방안에 관한 보고서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그걸 서울시에 보낸다고 해서 돈이 지급될 리는 만무하다. 반면 한국장애인개발원의 직원은 이와 비슷한 보고서를 쓰면서 상당한 액수의 연봉이 지급된다. 복지관에서 장애인들을 상담하는 사회복지사의 활동은 당연히 대가가 제공되는 노동이다. 하지만 30년간 시설에서 살다 탈시설을 한 중증장애인이 동료·후배 장애인들에게 자립하는 방법에 대해 상담해주는 것은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어째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



                            
    [출처 : 비마이너]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                                                                                


​1) Anne Amnesia, “Unnecessariat”, More Crows Than Eagles, May 10, 2016(https://morecrows.wordpress.com/2016/05/10/unnecessariat/); Adam Greenfield, Radical technologies: The design of everyday life, London: Verso Books, 2017, chap. 6.

2)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정일준 옮김, 새물결, 2008.

3) 김정희원, 공정성 담론이 놓치는 것비교불가능한 정의의 영역, 프레시안, 2020. 6. 8.

4) 고병권,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받다, 천년의상상, 2019, 230.

5) 김도현, 장애학 함께 읽기, 그린비, 2009, pp. 235~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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