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 성북아리는 성북 + 아리아리를 합친 말입니다.
아리아리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자, 그래도 없으면 길을 만들자”라는 우리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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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 탈자, 날자] 맹탕 라면죽국도 모자라서 늘 배가 고팠어요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1-12-27 조회수 :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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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탕 라면죽국도 모자라서 늘 배가 고팠어요

 

최진성(40. 지적장애)

 

저는 올해 마흔 살이고 지적장애가 있어요. 충남 홍성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어요. 10살 때쯤 부모님이 이혼하셨고, 그즈음 아기였던 남동생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엄마와 살다가 엄마가 너무 힘드셔서 11살 때 아빠와 잠깐 살다가 12살부터는 귀신 잡는 해병대출신 할아버지와 살았어요. 할아버지는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고 용돈도 안 주고 구박이 너무 심했어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열네 살쯤 초겨울에 집을 나와서 무작정 역으로 걸어가서 기차를 탔어요. 어렸을 적 엄마 손 잡고 서울 이모 집에 다녀온 기억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계신다고 생각되는 서울행 기차를 탔죠. 몰래 타서 숨어 있었는데 표 검사하는 아저씨한테 걸렸어요. 그런데 그 아저씨가 집으로 다시 돌아가라며 1만 원을 줬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아저씨였어요.


  

 ▶ 전주 한옥마을 앞에선 진성님.


서울역에 내렸는데 엄청 춥고 배가 고팠어요. 집에서 나올 때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나왔거든요. 아무튼, 서울에 도착하니 기분은 좋았어요. 내리자마자 만원으로 빵을 사 먹었어요. 그리고 지하철을 탔어요. 원래는 청량리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잘 못 타서 은평구 쪽으로 갔어요. 구산역에서 내렸어요. 제가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 이름도 모르고 집 주소도 모른다니까 지나가는 아저씨들이 동네 지구대로 데리고 갔어요. 경찰 아저씨도 제 가족 이름과 주소를 물어봤어요. 또 모른다고 하니까 경찰차에 태워 은평 서울시립소년의집으로 보냈어요. 잠깐이었지만, 그곳에서 학교도 다니고 수영도 했어요.

 

소년의집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1997년쯤에 다시 강원도 철원에 있는 은혜요양원으로 버스를 타고 갔어요. 그곳에서 저보다 어린 아이들과 같이 지냈어요. 주로 빵을 만드는 일을 했어요. 7일 안식교에서 운영했는데 토요일마다 예배를 봤어요. 9시에 취침해서 아침 7시에 일어났어요. 어느 날인가 시설에서 일하는 엄마들(성람재단 요양원 직원들)이 폭발했어요. 종로구청(성람재단 관할 구청)에서 김치를 보내왔는데 썩은 김치가 온 거예요. 이거 애들 먹이고 죽일 거냐고 한바탕 난리가 났죠.

 

밥은 매일 똑같아요. 어묵, , 김치, 라면죽국(라면을 부숴서 큰 솥에 끓인 죽 같은 국)이 나왔어요. 라면죽국은 맛이 하나도 없고 완전 맹탕이에요. 그것도 양이 부족해서 엄청 배고팠어요. 어떤 아이들은 배가 너무 고파서 똥을 먹기도 하고 종이를 먹기도 했어요. 어떤 애는 심지어 비닐봉지를 먹고 죽었어요. 어떤 아이는 밥을 훔쳐먹다가 걸려서 엄청나게 맞기도 했어요.

 

제일 힘든 일은 겨울을 나는 일이었어요. 방이 너무 추워서 한겨울이 지나면 몇 명씩 얼어 죽었어요. 눈이 많이 쌓인 날 여자아이들 빼고 남자들 다 옷 벗고 옥상으로 집합하래요. 그리고 누워서 구르래요. 우린 잘못한 것 없는데 쟤는 뭐를 잘못했다이러면서 뒹굴게 하는 거예요. 어떤 원생 한 명은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옥상으로 끌려가서 맞아 죽었어요. 그때 경찰이 와서 다 조사받고 그랬어요.

 

또 힘들었던 건 TV를 마음대로 못 보게 하는 거예요. 일요일 낮 12시에 뭐 하는지 아세요? 전국노래자랑이요. 전 출발비디오여행을 보고 싶은데 방마다 전부 똑같이 전국노래자랑만 틀어놔요. 이방 가도 딩동댕동저 방 가도 딩동댕동’.

 

은혜요양원에서는 작업장에서 일했는데 빵 만드는 데 사용한 식판을 닦았어요. 뜨거운 식판을 닦다가 여기저기 화상을 입기도 했어요. 일은 매일 했는데 월급은 한 번도 못 받았어요. 내 통장에 있다고 하면서 안 보여줘요. 생일 같은 날이 다가오면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고 통닭 같은 거 사줘요. 그리곤 네 월급 네가 다 썼다그래요. 15년 정도 일했는데 시설에서 나올 때 통장에 2백만 원 정도 있었어요. 그것도 나와서 족발 사 먹고 술 먹고 다 썼어요. 그때 은혜요양원에서 박정혁 형하고 지영 누나도 같이 있었어요. 두 분 다 탈시설해서 잘 살다가 암에 걸려서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 63빌딩 전망대에서. 

 

2012년에 서대문에 있는 기관에서 인권실태조사를 나왔어요. 우리 요양원에 있는 원생들을 일대일로 만나서 상담했어요. 그때 제가 다 이야기했어요. 밥이 맛이 없다, 영화 보고 싶은데 못 보게 한다, 직원들이 자꾸 때린다, 이런 거 다 솔직하게 이야기했어요. 시설에서 나가고 싶냐고 물어봐서 여긴 지겹다. 감옥이다. 나가서 살고 싶다고 했죠.

 

201336일에 나왔어요. 제가 나간다고 하니까 요양원 직원들이 너 나가서 개고생 한번 해봐라이러더라고요. 근데 지금 저 잘살잖아요. 거기서 나온 사람들 결혼도 하고 잘 살아요. 지금 은혜요양원에 원생들이 없대요. 다 나가서.

 

은혜요양원에서 나와서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운영하는 체험홈에 들어갔어요. 15년 만에 독립해서 혼자 살아야 하니 어려운 점이 무척 많았는데 성북센터에서 많이 도와줬어요. 자립생활 시작하고 얼마 있다가 생명의 전화에서 운영하는 해피워크라는 자립작업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그곳에 다니고 있어요. 처음에는 빵 만드는 일을 했었는데 지금은 양말 포장하는 일을 해요. 월급은 30만 원인데 보험료 빼고 29만 원 받아요. 은혜요양원에서 빵 만들 때보다 지금 일이 훨씬 더 재미있어요. 그때 성동센터 노유리 활동가 소개로 노들장애인야학에도 다니기 시작했어요. 노들야학 다니면서 강원도 바닷가도 가고 춘천 남이섬에도 가고 재미있었어요. 시설에 있을 때 제주도 한 번 가본 후에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바다를 봤어요. 밤에 불꽃놀이도 했어요.

 


 
▶ 장애인 보호작업장에서 양말을 조립하는 진성님. 

열다섯 살에 시설에 들어가서 서른 살에 나왔네요.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9년 정도 살았고요. 시설에서 나오니까 제일 좋은 건 자유롭다는 거예요. 시설에서는 답답해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못하게 해요.

 

앞으로 하고 싶은 건 아직 글을 빨리 읽지 못하고 잘 쓰지 못하는데 열심히 공부해서 글을 잘 읽고 쓰고 싶어요. 그리고 가고 싶은 곳에 여행도 다니고 싶어요. 저는 중국 드라마를 좋아해서 많이 봐요.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요. 중국어 배워서 중국에 여행 갈 거예요. 다른 외국어에도 관심 있어요. 저번에 어떤 베트남인이 명동을 어떻게 가냐고 물어보길래 지도하고 지하철 노선도 보여주면서 친절하게 가르쳐줬어요.

 

그리고 역사에 관심이 많아요. 중국 역사도 관심 있고 우리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 역사도 좋아해요. 그리고 최근 역사로는 물고문당해서 돌아가신 박종철 열사와 최루탄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 이야기도 알아요. 저는 자유도 없고 막 때리고 밥도 맛없는 시설이 빨리 모두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시설에 있는 장애인들이 다 나와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 글은 글을 쓰기 어려운 최진성 님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고 편집했습니다.)


* '탈자, 날자'는 '탈시설 자립생활, 이제 날아보자'의 줄임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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