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 성북아리는 성북 + 아리아리를 합친 말입니다.
아리아리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자, 그래도 없으면 길을 만들자”라는 우리말입니다.

성북아리

[4호 - 서로 인터뷰] ‘IL센터, 복지관화 되지는 말자’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1-12-29 조회수 :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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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아리’는 장애인운동 활동가 두 사람이 서로를 인터뷰하는 ‘서로인터뷰’ 꼭지를 마련했습니다. ‘서로인터뷰’는 일방적인 인터뷰가 아닌 상대방의 인터뷰어가 되어 서로 생각을 나누는 꼭지입니다. 네 번째로 문애린 활동가(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과 홍성훈 활동가(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만났습니다. (편집자 주)






♧ 애린 : 성훈님 반갑습니다. 본인의 장애 상태를 자세히 설명해주신다면?


♤ 성훈 : 저는 태어날 때 뇌병변 장애를 입었어요. 일상생활 전반을 활동지원사 분들과 함께하고 전동휠체어로 이동합니다. 언어장애도 있어 AAC(보완대체 의사소통)와 문자로 소통해요. 제가 그나마 의지대로 쓸 수 있는 부위는 팔과 오른쪽 검지예요. 오른쪽 검지로 타이핑해서 활동 전반을 해낸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제가 엄청 중증장애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저 스스로 그렇게 느끼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생활하는데 그렇게 큰 불편함을 느끼진 못하거든요. 다만 저를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저를 소개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는 편이에요. 우선 저는 음성언어(말)가 아닌 문자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고 장애를 경험하는 사람으로서 고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이고요.


♧ 애린 : 재가장애인 시절은 몇 년이나 보내셨어요?


♤ 성훈 : 저는 출산사고로 뇌병변장애인이 되었는데요. 엄마가 저를 볼 때마다 하는 말씀이 “내가 그때 힘만 줬더라면 이렇게까지 안 됐을 텐데……”였어요. 어렸을 때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머리가 커지고 그 말을 자주 듣다 보니 짜증이 나더라고요. 죽이 됐든, 밥이 됐든 장애는 나의 현재 상태이고 정체성인데 그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들려서 한번은 크게 화를 냈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좀 서운해하는 눈치였는데 그다음부터 한동안 그 이야기를 안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다시 하시더라고요. 짜증 나는 건 여전한데 정색하고 따지진 않아요. 마음은 아프지만, 그 이야기는 엄마한테 나름의 ‘자기 서사’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자신한테 갑자기 닥친 사고를 엄마의 방식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인 셈이죠. 저는 그게 꼭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엄마가 너무 죄책감이 들지 않게 하는 것, 또는 저를 불쌍한 자식새끼로 보지 않게 하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혼자의 힘으로 잘살아 보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진 않네요.

  어린 시절은 정신없이 보냈던 것 같아요. 제 밑으로 동생이 세 명 있는데, 부모님 말씀으로는 훗날 자신들이 떠나고 나면 저를 돌봐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일부러 많이 낳았다고 해요. 그런데 저는 그 말씀은 핑계라고 생각해요. 다 두 분 금실이 좋아서 그런 거 아니겠어요? 하하. 아무튼 식구가 많아서 좋았어요. 물론 부모님은 힘드셨겠지만 저희는 재밌었어요. 저도 장애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우울함이나 슬픔에 깊게 빠지진 않았던 것 같아요. 대식구 틈에서 살아남으려면 몸을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했어요. 치킨 한 조각이라도 더 먹으려면 빨리 입을 놀려야 했고요. 물론 동생들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관심이 대부분 저에게로 쏠려 있었기 때문에 서운함을 느꼈다고 하는데 뭐 어쩌겠어요. 이미 지나간 일을. 저는 중요한 건 지금이라고 생각해요. 아까 말했던 부모님의 걱정, 동생들이 저를 돌봐줘야 하는 상황이 안 오거나 되도록 늦추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어요. 물론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이 올 수도 있겠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근데 저는 돌봄을 받더라도 당당하게(?) 받고 싶어요. 서로의 존엄을 해치는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 열심히 돈을 벌고 있고요. 동생들한테 용돈도 주는 등 미리미리 떡밥을 깔아놓고 있어요.

 

▶ 성훈님. 


♧ 애린 : 동생이 세 명이나 있어요? 나이 차는 많이 나요?


♤ 성훈 : 바로 밑 여동생은 연년생이고요. 셋째는 세 살, 막내는 열한 살 차이예요. 


♧ 애린 : 우와 막내는 열한 살이나 차이가 나요? 혹시 어렸을 때 동생들이랑 싸운 기억도 있어요?


 성훈 : 각자 먹고살기 바빠서 싸운 기억은 별로 없어요. 그런데 엄마 말로는 저 때문에 동생들이 상처를 받았다고 해요. 


♧ 애린 : 이를테면 어떤 상처요?


♤ 성훈 : 학교에서 장애인 오빠 형 뒀다고 놀림을 받았다는 식의 이야기죠. 


♧ 애린 : 반대로 성훈님이 어렸을 때 상처받았던 적은 없어요?


 성훈 : 저도 외부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은 적은 있지요. 친할머니가 저를 싫어하셨어요. 장손이 장애인이라고 어머니를 구박하시기도 했고 저한테 관심을 안 주셨죠. 애린님의 어릴 적은 어땠나요?


♧ 애린 : 저는 어렸을 때 집구석에서만 지냈어요. 10살까지는 부모님하고 떨어져서 할아버지 할머니하고 고향인 제주도에서 살았어요. 10살쯤 다리 수술 때문에 부모님이랑 서울로 올라왔어요. 다리 수술은 그때 뇌성마비 장애인들이 많이 하던 수술이었죠. 



▶ 애린님.


♤ 성훈 : 저도 어렸을 때 수술 많이 권유받았어요.


♧ 애린 : 어린 저에게 그 누구도 ‘너 수술 받을래?’라고 물어보지 않고 부모님이 마음대로 했어요. 지금 물어보면 씨알도 안 먹힐 텐데. 어렸을 때 저는 기어 다녔어요. 지금도 집에서는 휠체어 안 타고 기어 다녀요. 


♤ 성훈 : 저도 집에서는 기어 다녀요. 


♧ 애린 : 1년 동안 서울대병원에서 세 번 수술 받고 6개월 입원했었죠. 30여 년 전인데 3천만 원 들었대요. 그 돈으로 집이나 한 채 사주지. 이야기 듣기로 할아버지가 땅 팔았대요. 그 뒤로 부모님이 살던 강원도 집으로 가서 쭉 재가장애인으로 살았어요.

 

♤ 성훈 : 저희 부모님도 제 치료비면 집 세 채는 샀다고 하더라고요.


♧ 애린 : 저희 부모님은 직접 이야기하시지는 않는데, 지금 그 이야기를 하면 차라리 집이나 한 채 사주지 이럴 거 같아요. 아무튼 그때부터 쭉 집안에서 지냈어요. 유일한 취미가 티브이랑 책 보는 거였어요. 


♤ 성훈 : 학교는 안 다녔어요?


♧ 애린 : 학교는 한 번도 안 다녔어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다녀본 적이 없어요. 


♤ 성훈 : 왜요?


♧ 애린 : 두 분 다 강원도에서 일하고 계셨는데 학교에 다니려면 부모님 중 누군가가 저를 계속 등하교시켜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럴만한 사정도 안 됐고, 무엇보다 학교에서 절 받아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학교는 근처에도 못 갔죠. 대신 부모님이 저한테 기본적인 교육을 하셨어요. 한글, 한자, 숫자, 영어 등을 하루에 3~4시간은 꼭 공부했어요. 홈스쿨링이죠. 책은 정말 엄청나게 읽었어요. 약 천 권은 읽은듯해요. 남동생하고 같이 보라고 엄마가 책은 정말 많이 사줬거든요. 전집 동화 같은 거 있었잖아요. 지금은 많이 없지만, 그 당시 동네에 책방이 있었거든요. 부모님도 책을 워낙 좋아하셔서 거기서도 책을 많이 빌려봤어요. 엄마 아빠가 보시던 소설도 제가 다 읽었어요. 독서에 취미를 붙이다 보니 좋아하는 장르가 생기잖아요. 한참 무협지, 액션, 이원호의 밤의 대통령, 이런 거 읽었어요. 박경리님의 토지도 다 봤어요. 물론 지금은 책 내용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요. 지금은 글자도 눈에 안 들어오고 하하.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요, 성훈님은 사춘기를 어떻게 보냈어요? 질풍노도의 사춘기.


♤ 성훈 : 뭐 다른 애들이랑 똑같이 보냈죠. 빨간 비디오 보고 부모한테 대들고 가출하고. 아, 가출은 하루 했어요. 망할 활보 시간 때문에 가출도 제대로 못 했어요. 


♧ 애린 : 활보 시간 때문에 가출도 제대로 못 하는구나. 그런데 하루는 가출이 아니라 외출이지. 가출한 이유는 뭐예요?


♤ 성훈 : 이유를 들으시면 ‘뭐 별것도 아니네’ 이럴 수도 있어요. 그때 제가 ‘어딘글방’이라는 곳(초창기엔 ‘창의적 글쓰기’라고 했어요)에 다녔어요. 청소년들이 모여 일주일에 한 번 글 합평회를 했는데 어느 날 제 글이 심하게 까였어요. 너무 충격을 받았죠. 그 당시에 저는 ‘글 좀 쓴다’라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다른 이들이 보기엔 쥐뿔도 아니었던 거죠. 그 사람들은 그냥 제 글을 읽고 솔직하게 평했을 뿐인데 저는 그걸 못 받아들인 거죠. 자존심도 상하고요. 합평회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괜히 집에 가기 싫어서 핸드폰 꺼 놓고 동네 으슥한 곳에서 분을 삭이고 있었어요.


  집에선 난리가 났죠. 이맘때쯤이면 들어와야 할 애가 감감무소식이니까. 온 가족이 동네를 뒤져서 놀이터에서 저를 발견했죠. 그걸로 제 가출 경험은 끝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지만요. 그때 활보 시간이 충분했다면 어디 찜질방에서 자거나 피시방에서 밤을 새울 수 있었는데... 그래서 저는 우스갯소리로 중증 장애청소년의 가출을 위해서라도 활동지원서비스 시간이 충분하게 지원되어야 한다고 말해요. 솔직히 그 나이가 아니면 언제 가출을 해보겠어요? 아, 그러면 활동지원사가 곤란해질까요?




♧ 애린 : 친구들에게 자신의 글이 까였다는 생각으로 홧김에 가출했군요. 그게 몇 살 때예요?


♤ 성훈 : 열일곱이요. 고 1이었죠. 


♧ 애린 : 그런데 어디 가서 가출했다고 말하기엔 좀 짧네요. 한두 달 정도는 해야 가출했다고 할 수 있지요. 하하. 사춘기는 짧았어요, 길었어요? 


 성훈 : 저는 적당했다고 생각하는데 부모나 다른 가족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 애린 : 성훈님 정도의 장애로 초중고를 다니면서 비장애인 친구들 속에서 일정 정도 성적을 유지하면서 공부하려면 힘들지 않았어요? 물론 엄마의 희생도 있었겠지만, 다른 여건도 갖춰져야 했을 텐데 교과과정을 어떻게 따라갔어요?


♤ 성훈 : 저는 되게 운이 좋았어요. 6살 때 잠깐 특수유치원을 다녔는데 그 유치원은 장애아가 일반 학교에 진학하면 통합교육을 지원했어요. 예를 들어 일주일에 한 번 유치원 선생님이 학교에 오셨는데 노트북을 들고 오셔서 그간 못 봤던 시험도 치고 공부도 했어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주변에 아는 사람이 쓰던 노트북을 줘서 그거 들고 다니면서 공부했어요. 그런데 제가 타자 속도가 느리니깐 수업 시간에 필기를 다 못했어요. 그때마다 친구들 노트를 빌려와 집에서 못다 한 필기를 하는 식으로 공부했죠. 노트를 빌려준 친구에게는 쉬는 시간마다 제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게 해줬어요. 노트도 빌리고 비장애인 친구들하고 친하게 지내기 위한 나름의 꿀팁이었던 셈이죠. 애린님은 동생들이랑 잘 지냈어요? 


♧ 애린 : 반반인데, 동생은 저랑 6살 차이거든요. 동생이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잘 지냈죠. 남동생이 중학교 올라간 뒤 사춘기가 오고 저도 사춘기가 오랫동안 지속해서 그 시기부터 저나 동생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아요. 전 사실 가족한테 별로 정이 없어요. 성훈님은 가족들하고 잘 지내는 편이에요? 아까 보니까 동생들한테 용돈도 준다고 하는데. 아직도 동생들한테 용돈도 주고 그래요?


♤ 성훈 : 노후 대비죠.


♧ 애린 : 노후를 위해서 밑밥을 까는구나. 하지만 별로 소용없을걸요? 아예 저축을 많이 하세요. 용돈 주는 거로 저축하세요. 가족을 믿는 건 별로 안 좋은 방법 같아요. 


♤ 성훈 : 저도 그냥 체면치레하는 거지 완전히 믿진 않아요. ‘노후 대비’라는 말은 우스갯소리고 가족을 완전히 믿는다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서로 도와가면서 살 수 있을지 많이 생각하는 편이에요. 어릴 땐 부득이하게 가족의 희생이 필요할 때도 있었고,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았는데 이젠 저도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나서는 편이에요. 또 앞으로 제가 도움받을 일이 생기면 얼굴에 철판 깔고 받으려고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애린님은 노들야학을 통해 장판에 들어온 거로 아는데 노들은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 애린 : 제가 살던 신내동에 아는 장애인 형이 있었어요. 그때 부모님이 임대아파트가 돼서 그 동네에서만 약 30년 가까이 살았어요. 신내동에 장애인복지관이 있거든요. 엄마가 집에만 있지 말고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복지관에 가래요. 수동휠체어 타고 일주일에 한 번 컴퓨터 배우기, 글쓰기 모임 등에 다녔죠. 그때 복지관을 같이 다니던 형이 장애인 야학에 다닌대요. 그때 제가 검정고시를 시작해서 초중고 과정을 막 끝난 상황이었거든요. 물론 공부를 혼자 하지는 않았지만. 


♤ 성훈 : 몇 살 때요?


♧ 애린 : 열일곱, 열여덟쯤 검정고시를 시작한 거 같아요. 복지관에서 자원봉사 형식으로 과외 해 주시는 분을 연계해줘서 3년 동안 검정고시를 준비했죠. 3년 만에 초중고를 다 통과하고 나니까 공부가 재밌었어요. 그리고 그때가 스무 살 직전이었는데 집에서 나가고 싶었거든요. 너무 답답해서. 고민 끝에 집을 나갈 방법은 대학교 기숙사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검정고시로 초중고를 통과한 실력으로는 대학에 갈 수 없어서 집 근처 학원을 알아봤어요. 그런데 편의시설도 부족하고 비용도 들어서 고민하던 중에 장애인 야학에 대해 들은 거예요. 아는 동네 장애인 친구 한 명을 ‘나랑 공부해보지 않을래?’하고 꼬셔서 그 친구랑 야학에 택시 타고 올라갔죠. 


♤ 성훈 : 그때부터 조직 활동을 하셨네요.


♧ 애린 : 하하. 혼자 가기는 뭔가 되게 두려웠어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요. 믿지 못하겠지만 저 낯을 굉장히 많이 가려요.




♤ 성훈 : 노들이 정립회관에 있을 때죠?


♧ 애린 : 맞아요. 그때가 2000년대 초반이었어요. 그 뒤로 1년 반 정도 노들야학에 다녔어요. 그때부터 빨간 물이 들기 시작했죠. 


♤ 성훈 : 수동휠체어 타고 다녔어요? 


♧ 애린 : 네. 수동 탔어요. 야학 봉고차 한 대로 등하교를 했거든요. 그때는 진짜 ‘야학’이었죠. 밤 10시에 끝나면 집으로 갈 방법이 없는 학생들을 전부 태워서 집까지 데려다줬어요. 저는 집이 멀어서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거의 밤 12시가 넘었어요. 


♤ 성훈 : 등교는 몇 시에 해요?


♧ 애린 : 낮 12시나 1시쯤요. 왜냐면 봉고차에 여러 명이 타야 하니까 2시에 누구 태우고 4시엔 누구 태우고 돌고 돌아서 오후 5시쯤 야학에 도착했어요. 


♤ 성훈 : 4시간 수업받으려고 12시간을 밖에 있었네요. 


♧ 애린 : 맞아요. 


♤ 성훈 : 부모님이 뭐라고 안 하셨어요?


♧ 애린 : 딸내미가 공부하겠다는데 뭐라고 하진 않으셨어요. 다만 너무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 좀 걱정하셨죠. 그런데 이걸 깨는 계기가 있었어요. 야학에 간 지 1년 정도 지나 학생회장 선거가 있었는데 얼떨결에 제가 회장이 된 거예요. 그런데 그해 4월 20일을 앞두고 한 방송사에서 야학에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어요. 장애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알아보는 거였는데 회장이라는 이유로 제가 하게 됐죠. 그날 지방까지 내려가다 보니 자정이 넘어버렸어요. 그런데 그날 일정을 집에 미리 이야기하지 않은 거예요. 저도 그렇게 늦게 끝날 줄 몰랐죠. 마음은 초조하고 휴대전화로 지금 어딘데 올라가고 있다고 말씀드렸죠. 자정이 훨씬 넘는 시간에 집에 도착했어요. 보통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들은 주무시고 화장실 정도만 불을 켜놓죠. 그날따라 불이 환해서 ‘아 죽었다’ 생각했어요. 참고로 저희 아빠는 굉장히 ‘상남자’여서 무척 고지식하셨어요. 


  뭐 하다가 늦게 들어왔냐고 물으셔서 설명해드렸더니 저보고 당장 때려치우래요. 좀 화가 나더라고요. 그 당시엔 아빠를 무척 무서워해서 집에서 별로 말을 안 했어요. 근데 그날따라 제가 너무 화가 나서 아빠를 거의 똑바로 바라보고 이야기했죠.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냐, 나도 내가 살고 싶은 삶이 있는 거고, 엄마 아빠가 내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고 나도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할 거 아니냐.’ 뭐 대충 이렇게 말씀드렸던 것 같아요. 그때 부모님도 많이 놀라셨을 거예요. 생전 조용하던 딸내미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이야기를 하니까. 그 뒤로는 잠잠해지셨어요. 그때가 스물하나? 스물둘? 그날을 계기로 늦게 들어가면 늦게 들어간다고 말씀드리고 그때부터 외박도 가끔 했던 것 같아요. 집에 못 들어간다고 말씀드리고요.


♤ 성훈 : 그 당시 노들야학에 갈등은 없었어요? 


♧ 애린 : 그때 교사나 학생들 간에 팽팽한 대립이 있었어요. 공부냐, 투쟁이냐.


♤ 성훈 : 애린님은 어느 쪽이었어요? 


♧ 애린 : 저는 물론 공부파였죠. 하하. 데모하러 나가는 거 되게 싫어했거든요. 툭하면 교사들이 어디 데모하러 가재요. 난 얼른 공부해서 대학가야 하는데. 그리고 그때 이동권연대투쟁가 같은 노래가 새로 나오면 교사가 기타 치면서 학생들이랑 같이 불러요. 나는 그게 엄청 싫어서 건성건성 불렀어요. 팔뚝질도 당연히 안 했지. 그렇게 1년 반 야학을 다녔어요. 


♤ 성훈 : 그래서 1년 반 만에 대학에 갔어요?


♧ 애린 : 네. 수능을 두 번 봤어요. 입학 첫해 9월쯤 야학에 들어가자마자 수능 보고 점수가 안 나와서 재수했죠. 이듬해에 다시 보고 합격한 곳이 한국재활복지대학교였어요. 저는 멋진 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점수가 안 나왔어요. 당시 이 대학이 한국 최초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통합해서 다닌다는 대학이었고, 처음 만들어지다 보니 응시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어요. 등록금도 싸고. 그래서 엄마랑 합의해 이 대학에 가기로 했죠. 


♤ 성훈 : 그래서 그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어요?


♧ 애린 : 네. 집에서 나온 것은 좋았죠. 그런데 학교생활이 많이 힘들었어요. 그때 이 대학 학과가 사회복지학과, 음악창작과, 컴퓨터과, 보조기기학과 등 10여 개밖에 없었어요. 내가 가고 싶은 과가 없었죠. 근데 엄마가 저보고 사회복지학과를 가래요. 저는 정말 싫었거든요.


♤ 성훈 : 왜요?


♧ 애린 : 일단 어려울 거 같았어요. 다른 과도 마찬가지였겠지만요. 좀 쉬운 학과를 가고 싶었죠. 그때 10개 학과 중에 실내디자인학과가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실내 디자인’이니까 단순히 디자인하는 거로 생각하고 그 과에 갔어요. 근데 들어가 보니 진짜 완전히 노동하는 과에요. 맨날 그리고, 붙이고, 썰고, 만들고. 그 과 학생이 22명이었는데 지체장애인은 저 혼자밖에 없었어요. 절반은 비장애인, 절반은 청각장애인이었죠. 3개월 동안 학교 기숙사에 있다가 방학 즈음이면 몸무게가 절반쯤 빠졌어요. 힘들어서 만날 입술 부르트고, 과제도 엄청 많았는데 한 번도 펑크 내본 적이 없어요. 덕분에 거기서 엑셀, 포토샵, 일러스트, 캐드 등 웬만한 건 다 배웠죠. 기숙사는 콘도형으로 돼 있어서 화장실 하나에 방이 세 개, 거실이 하나 있었는데 한 방에 2명씩 쓰는 형태였어요. 


♤ 성훈 :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있었어요?


♧ 애린 : 같은 과 친구들이 있었는데 나보다 어리거나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아주 친한 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그래도 지금까지 만나는 언니하고 동생이 있어요. 성훈님은 대학교를 국어국문학과에 간 거죠? 그래서 글을 잘 쓰는구나. 




♤ 성훈 : 저는 대입 때 장애인 차별을 당해서 재수했어요. 수시모집에 지원하면 면접을 보잖아요. 그래서 대학 측에 노트북하고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연결해달라고 요청했더니 안 된대요. 구술면접인데 나만 컴퓨터로 하면 형평성에 어긋난다면서요. 그 자리에서 면접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실시간으로 치는 것이니 누가 대신해 줄 수도 없는 거였는데 말이죠. 건대, 경희대, 동국대를 상대로 저랑 어머니랑 인권위에 장애인 차별 진정을 냈죠. 근데 대학 측이 ‘우린 성적대로 했다’고 나오니까 어쩔 도리가 없더라고요. 결국 재수해서 성균관대학교에 갔어요. 


♧ 애린 : 성대에 입학할 때는 괜찮았나요? 


♤ 성훈 : 대학 측에 저희가 먼저 제안했죠. 이러이러한 지원이 필요한데 해 줄 수 있냐. 그걸 대학 측이 받아들여서 무난하게 진행됐어요. 


♧ 애린 : 그런데 ‘저희’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어요? 성훈님과 어머니를 말씀하시는 거죠? 성훈님이 어느 인터뷰에선가 어머니가 나서는 게 싫었는데 어느 순간 동화돼간다는 이야기를 본 적 있어요. 어머니라는 존재가 한팀처럼 ‘저희’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현재 어머니에 대한 부분은 어떤가요? 


♤ 성훈 : 겉으론 싫다고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제가 어머니한테 많이 의지했죠. 어릴 때 차별을 받으면 제일 먼저 어머니가 나섰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상급 학교로 올라갈 때마다 학교의 반대에 부딪혔고 그때마다 같이 싸웠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한 팀처럼 생각했어요. 그런데 재밌는 건 가족과 한집에서 살 때는 간섭 받는 게 싫어서 어떻게든 어머니에게서 도망치려고 했어요. 제가 12살 때부터 전동휠체어를 타기 시작했는데 그때 자주 도망갔던 기억이 나네요. 공부방 안 가고, 게임방 가고 영화 보러 다녔어요. 그러면 어머니가 저 잡으러 온 동네를 뒤지고 다녔어요. 욕도 많이 먹었죠. 전동을 타고 나니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어요. 그리곤 몰래몰래 ‘독립’에 대한 꿈을 키워왔어요. 지금은 좀 더 독립하려고 노력하죠. 


♧ 애린 : 이력을 보니 성대 다니면서 ‘성균지’ 기자 활동을 하셨던데 어떤 방법으로 취재했어요?


♤ 성훈 : 교지 기자 활동은 편집부에서 제안을 받아 시작했고요. 제안받을 때부터 자유롭게 기고해도 된다는 말을 들었어요. 아무래도 제 장애 때문에 그런 배려(?)를 받은 것 같아요. 덕분에 저는 무엇에 구애받지 않고 글을 썼어요. 당시 저는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노동문제연구회 알기’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기사를 많이 썼어요. 제가 기자 활동을 할 당시에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 복직 투쟁이 한창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 분향소가 차려진 대한문에도 가고 재능교육 본사가 있는 혜화동에도 뻔질나게 다녔죠. 집회가 있으면 노동자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 현재 주요 쟁점은 무엇인지를 보고, 듣고 제 나름대로 기록해뒀다가 근처 카페에서 기사를 썼어요. 이런 성격의 기사는 당연히 인기가 없었어요. 생기발랄한 교지에서 누가 그런 심각한 기사를 읽고 싶겠어요? 그렇게 1~2년 정도 활동하다가 그만두게 되었죠.


♧ 애린 : 자료를 보니 성훈님이 출연한 영화 <손과 날개>로 이스라엘 텔아비브 LGBT 영화제 단편 부문 최우수상을 받으셨네요. 와~ 이 영화는 어떤 내용이고 성훈님은 어떤 역할을 하셨나요? 


♤ 성훈 : 상을 받은 영화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손과 날개>는 퀴어 영화이고요. 저는 게이 장애인인 ‘우성’의 역할을 맡았어요. 영화 내용은 우성의 섹슈얼리티와 사랑을 다루는데요. 처음 배우 역할을 제안받았을 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실 제가 연기 욕심이 있어서 영화에 출연하는 건 받아들였지만, 주인공의 성적 지향 때문에 무턱대고 수락할 수는 없었어요. 실제 제 성적 지향과 ‘우성’의 성적 지향이 다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 두려웠기 때문이죠. 혹시나 저의 잘못된 표현으로 실제 퀴어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장애인 당사자들을 왜곡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 부분이 걸려서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표현해보자고 합의하고 연기했어요. 다행히 저희가 표현하고자 했던 바가 관객들에게도 잘 전달됐는지 몇몇 영화제에서 상도 탔고요. 한편으로는 욕도 많이 먹었어요. 기본적으로 ‘더럽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생전 처음 듣는 욕도 들었는데 미리 각오해서 그렇게 큰 타격은 입지 않았고요. 아, 이런 욕도 가능하구나 감탄할 만큼 창발적인 욕들도 많이 배웠어요.


♧ 애린 : 창발적인 욕이라니.... 하하. 영화나 연극뿐만 아니라 글쓰기 모임도 진행하셨다고 들었어요. 문화예술에 이전부터 관심이 많으셨나요? 성훈님은 장애인에게 문화예술이 어떤 의미나 역할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성훈 : 문화예술 작품들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봐왔고요. 요즘 들어 제가 보는 작품들이 그다지 다양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 폭을 좀 더 넓혀보려고 해요. 연극은 2019년부터 해왔어요. 제가 직접 창작하거나 출연하고 있어요. 모든 작품이 소중하지만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공연은 <내가 말하기 시작할 때>(2020)라는 공연이예요. 이 공연은 다큐멘터리 연극인데 출연진이 우리 가족이었어요. 제가 늘 하는 말이 ‘나는 가족을 팔아서 글 쓰는 놈’인데 하다 하다 연극에까지 팔게 되었네요. 그 연극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말은 ‘가족이 나를 한 명의 동등한 사람으로 봐줬으면 좋겠다’라는 것이었고 그 말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어요. 연극이 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연극을 본 장애인 당사자분들이 자기 가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 계기가 되었다고 소감을 전해주셨어요. 저는 문화예술의 역할이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생각해요. 당연하게 생각하고, 당연하게 봤던 대상들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질문이 필요하고, 그것을 문화예술이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어요. 관계를 재정립하고 기존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문화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런 힘 때문에 저는 문화가 운동적인 측면이 있다고 보고요. 이런 맥락에서 장애 예술은 비장애 중심의 세계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애린님은 언제부터 전동을 타셨어요?


♧ 애린 : 저는 대학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요. 혼자 움직여야 하니까. 


♤ 성훈 : 생활이 많이 달라지셨나요?


♧ 애린 : 완전히 달라졌죠. 수동 탈 때는 누가 밀어줘야 했는데, 삶이 수동적인 상태에서 능동적으로 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전동 타고나서부터 날아다니기 시작했어요. 학교 다닐 때 별명이 홍길동이었어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다닌다고. 


♤ 성훈 : 대학 졸업하고, 성북센터로 오게 된 것은 노들에 다녔던 것과 연관된 건가요?




♧ 애린 : 기억이 가물가물해요. 학교 다니면서 방학 때마다 집에 오잖아요. 그러면 박경석 교장샘인가 이규식 활동가인가 이런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이동권연대 워크숍 같은 행사를 따라가고 그랬었거든요.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니 엄마가 저보고 공무원시험을 보래요. 싫다고 하고 앞으로 뭘 할까 고민했죠. 그때 노들센터가 혜화동에 있었어요. 교장 선생님이 노들센터에서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하더라고요. 그 시기가 막 엄마의 공무원시험 압박에 시달리던 때여서 ‘네’ 하고 노들센터에 6개월간 인턴 형식으로 다니기 시작했어요. 인턴 하면서 이원교 소장이 준비하던 성북센터를 같이 만들었던 것 같아요.


♤ 성훈 : 성북센터를 초창기부터 같이 만든 사람이네요. 그러면 우동민 열사하고도 친했어요?


♧ 애린 : 초기 성북센터를 같이 만들었던 사람이 딱 다섯 명이었어요. 소장님, 동민이 형, 인기 형, 기정 언니 그리고 저요.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던 때라 사무실 얻을 공간을 알아보다가 장애인문화공간에 얹혀살기도 했죠. 그때 장애인문화공간에 최재호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한테 예산서 쓰는 거 등 실무를 많이 배웠어요. 센터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집에 안 들어가기 시작한 것 같아요.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 했으니까. 그때 장애인문화공간이 성신여대역 근처에 있었는데 승강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매일 리프트 타고 다녔어요. 리프트 고장 나면 역무원들이 휠체어 들어서 오르락내리락하며 다녔어요. 그리고 성북구에 언덕이 워낙 많잖아요. 성북센터 이름으로 첫 동료상담 준비할 때 동사무소마다 돌아다니며 포스터를 붙였는데 그땐 이런 전동휠체어도 아니고 진짜 작은 전동 타고 언덕길 왔다 갔다 하면서 활동했죠. 


♤ 성훈 : 성북센터 초기 분위기는 어땠어요?


♧ 애린 : 단란하고 무척 좋았어요. 성북센터가 만들어지고 1년 반쯤 뒤에 사무국장 역할 하던 기정 언니를 대신해 박현 활동가가 들어왔어요. 그 후로 이원교 소장, 박현과 저를 중심으로 활동했죠. 공모사업 따내서 진행도 하고 투쟁도 열심히 다녔죠. 인기 형하고 동민이 형은 반상근 형태로 외부활동을 많이 했어요. 그때 활동지원제도는 없었어요. 이원교 소장이나 박현 활동가나 저나 지금보다 젊어서 거의 모든 실무를 다 했던 것 같아요. 물론 장애인문화공간의 도움도 많이 받았죠.


♤ 성훈 : 개인적으로 저는 지금 말씀하신 시기가 잘 상상이 안 가요. 활동보조도 없는데 어떻게 활동했어요?


♧ 애린 : 거의 다 몸으로 때웠어요. 이를테면 활동보조가 없어도 사업기획서 쓰는 건 할 수 있잖아요. 동료상담은 성북센터에 인원이 없으니까 장애인문화공간이랑 공동주최로 해서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고요. 문화공간에는 재호 선배와 비장애인 활동가가 몇 명 있었거든요. 한 2~3년 동안 문화공간에 신세를 많이 진 것 같아요. 그 후에 본격적으로 성북센터가 독립해서 나온 거죠. 


♤ 성훈 : 애린님 이력을 보니 그 시기에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약칭 한자협)에 파견되어서 활동한 경력도 있던데 그 시기였나요?


♧ 애린 : 정확히 몇 년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이원교 소장님이 당시 한자협 회장을 맡았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 당시 한자협이 굉장히 열악한 상황이었거든요. 한자협에 활동가가 1명밖에 없어서 회계를 맡을 활동가가 없었어요. 회장님이 제게 회계를 맡아달라고 해서 약 7개월쯤 맡았죠. 그때 회장님 따라 경남, 광주, 대구 등 지역을 돌며 각종 회의에 들어가서 협의회가 이러이러한 활동을 하니 회비를 내주시라 설명하곤 했죠. 


♤ 성훈 : 오, 한자협의 실세였군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약칭 전장연)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신 거예요?


♧ 애린 : 성북센터에서 파견 형태로 3개월 정도 경남지역에서 활동하고 다시 복귀했다가 2013년 끝 무렵에 그만뒀어요. 그러다가 장애여성네트워크에서 반년 정도 일했는데 그 시기에 전장연에서 함께 일해보자고 제의가 들어왔어요. 전장연 들어가서 3년 동안 조직실에서 활동했어요. 2015년 1월부터요.


♤ 성훈 : 전장연 조직실 활동은 재미있었나요?




♧ 애린 : 사람 만나는 건 재밌었어요. 여러 활동가를 만나러 돌아다니는 건 재밌었는데, 워낙에 많은 지역을 돌다 보니 무척 힘들었죠. 그리고 지역마다 상황이 다 달라요. 뽀글뽀글한 곳도 있고 권력다툼 하는 곳도 많았어요. IL센터와 정당, IL센터와 부모조직 등이요. 장애인들끼리 편 갈라서 싸우는 모습을 보기도 했죠. 그리고 중앙 조직인 전장연이 중앙 의제를 가지고 지역 내려가서 교육도 많이 하러 다녔는데 꽤 힘들었어요. 당시 전장연엔 조직실, 정책실, 기획실 등 세 개 실이 있었는데 그때 조직실에는 활동가가 두 명이었거든요. 저랑 지금 광진센터에서 활동하는 이상용 동지요. 그런데 이상용 동지가 내가 들어간 지 1년 만에 그만둔 거죠. 그 후로 1년 동안 활동가가 안 들어왔어요. 그때는 나를 중심으로 혼자 활동하기 힘드니까 박옥순 총장이 보조를 많이 했죠. 


♤ 성훈 : 그렇게 3년을 활동하다가 서울장차연 사무국장으로 가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 애린 :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서울장차연 활동가들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2017년 말에 두 명의 활동가가 활동을 정리하는 시점이었고 대안이 없었죠. 서울장차연이 워낙 중앙 투쟁의 중심이고 다른 지역보다 조직은 잘 돼 있지만, 조직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전장연에서 한 명이 가야 했는데 갈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럼 내가 가겠다’고 했죠. 그때 새로 활동을 시작한 사람이 김순화 활동가예요. 지금 이음센터에서 저와 같이 활동하고 있어요.


♤ 성훈 : 중앙 활동을 하다가 서울장차연으로 가서 사무국장도 하고 공동대표도 하고 했잖아요. 서울장차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보람찬 일이 있었다면요?


♧ 애린 : 가장 보람찼던 일은 서울장차연이 개인회원제를 운영하고 있는데 3백 명 후반 정도의 개인회원을 제가 활동하는 동안 100명 가까이 더 늘렸던 것이지요. 


♤ 성훈 : 당시 서울장차연 활동가들과 합이 잘 맞으셨나요?


♧ 애린 : 하하. 어느 단체건 간에 100% 합이 맞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서로 어떻게 지속해서 생각을 존중하고 조율하느냐가 관건인데 그런 면에서 당시 저를 포함한 순화, 민진(초반) 정규, 미주(후반) 동지와 치열하게 토론하고 또 의지하며 정말 재미있게 활동했습니다.

  

♤ 성훈 : 서울이라는 특성상 가장 앞서서 장애 의제를 먼저 제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기억에 남는  쟁점 사안과 결과가 있나요?


♧ 애린 : 기억에 남은 건 단연코 이동권 투쟁과 탈시설 투쟁이죠. 이동권 같은 경우 서울시가 이전에 약속한 것이 있는데 지하철 역사 승강기 미설치로 발산역에서 또 장애인 한 분이 추락해 사망하셨어요. 무더운 여름날 지하철 타기 등 가열찬 투쟁을 통해 다시 서울시의 약속을 되살려냈습니다. 탈시설 부분은 거의 8년 만에 서울시청 투쟁을 재개해서 약 20일 정도 점거농성을 통해 탈시설 인원을 5년간 300명에서 800명으로 확대한 것을 꼽을 수 있죠.


♤ 성훈 : 서울장차연 활동에 아쉬운 점도 있나요? 


♧ 애린 : 아쉬운 점은 자신 있게 단연코 없습니다. 왜냐면 전 저의 모든 것을 걸고 매 순간 조직, 투쟁 등을 치열하게 했기 때문이죠. 다만 서울장차연을 포함해 중앙 활동이 하루 24시간 전쟁 같은데 나만 홀로 떠난 것 같아 함께했던 활동가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 성훈 : 올해 이음센터로 옮기셨잖아요. 중앙하고 지역의 가장 큰 활동의 차이는 뭔가요? 


♧ 애린 : 집중의 영역이죠. 전장연 조직실이나 서울장차연은 의제를 중심으로 다루고, 의제를 중심으로 사람을 조직해요. 그런데 이음센터에서는 영등포 지역 장애인 당사자 한명 한명을 다 대면해야 해요. 예를 들어 중앙에서는 ‘활동지원서비스가 무엇이 문제이고 이를 바꾸기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면, 지역에서는 지역 장애인들에게 어떤 것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들과 관계 형성을 아주 치밀하고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하죠. 중앙 의제를 지역에서 어떻게 어떤 형식으로 적용하고 풀어내야 할지도 고민해야 할 부분이고요. 


  또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은 지역 장애인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도 조직해야 하는 거예요. 서울장차연이나 전장연은 이미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이 명확한 집단이라면 개별 센터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냥 장애인 복지 관련 일을 한다거나 직원으로 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죠. 그러면 이 사람들을 우리는 ‘직원’의 개념이 아니라 ‘활동가’임을 함께 풀어내야 해요. 이 ‘활동’이 어떤 의미냐 하면 우리는 지역 안에서 장애인의 ‘권리’를 만들어 간다는 것을 동료들과도 치열하게 소통해야 해요.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동료 활동가들에게 알려내고 소통해야 하는 것들도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소장이 된 뒤 지금 이음센터에서는 소장님, 국장님, 팀장님 이렇게 부르지 않고 서로 이름을 불러요. 누구누구님, 누구누구씨 이렇게요. 그리고 ‘선생님’이란 호칭도 사용하지 않아요. 선생님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의미도 있지만, 저는 위계를 만드는 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더구나 IL센터는 탈시설해서 나오시는 장애인분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인데 우리가 그분들한테 ‘선생님’은 아니잖아요. 우리는 서로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해요. 아무튼 중앙과 지역은 이런저런 차이가 있네요.


♤ 성훈 : 자립생활센터가 한국에 들어와 20여 년이 지났고 대중 운동 조직으로 자리잡았다고 생각합니다. IL센터 활동가로서 애린님만의 운영 기준이나 목표가 있나요? 


♧ 애린 : 10여 년 만에 다시 자립생활센터 활동가로 돌아왔네요. 일단 IL센터는 자립생활이라는 목적이 있잖아요. 기관은 지원금을 통해서 운영하는데 이렇게 되면 활동에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어요. 저는 ‘IL센터가 복지관화 되지는 말자’라는 기준이 있어요. 이음센터에 와보니 정말 많은 부분 복지관화가 돼 있어요. 사업이 많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요. 이런 부분을 좀 바꾸려고 해요. 또 IL센터이기에 해야 하는 사업들, 예를 들어 ‘탈시설’이라는 정확한 목표가 있거든요. 탈시설을 지향하고 그 내용을 잘 담아낼 활동을 좀 오래, 많이 해보려고 해요. 지금은 중단된 ‘이음여행’ 같은 활동들요. 언제까지 이음센터 소장직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있을 때 만큼이라도 최대한 IL센터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죠. 


♤ 성훈 : 복지관화라는 것은 뭐예요?


♧ 애린 : IL센터에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사업들, 예를 들면 음식 나눠주기, 어느 집에 가서 청소해주기, 나들이 가기 등등 이런 사업들은 IL센터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그러면 무엇을 중심으로 해야 할지 같이 고민해야죠. 저는 그게 권익옹호 활동과 동료상담, 딱 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성훈님은 성북센터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 성훈 : 주로 기획사업팀의 업무를 보조하고 있고요. 회의록 쓰고 공문 정리하고 ‘서로인터뷰’가 실릴 『성북아리』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어요. ‘시키면 다 한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출근하고 있고요. 올해는 성북구에 거주하는 장애 청소년들을 만나 당사자들을 조직하려는 계획을 세웠어요.


♧ 애린 : 오호, 그 계획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세요. 


♤ 성훈 : IL센터가 장애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 많은데, 사실 자립을 생각하는 시기는 청소년기이잖아요. 성인기가 돼서 갑자기 자립하려면 준비가 설익죠. 그래서 미리 준비도 하고, 지역에 있는 장애인 당사자들과 동료 관계도 맺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장애인 동료가 별로 없어서 장애인 동료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요. 물론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 얘기를 들어줄 장애인 동료가 있었으면 했어요. 이러한 제 개인적인 바람에 비춰 청소년 장애인 당사자 모임을 기획하고 있어요. 1년 단위 사업이 아니라 좀 장기적인 관점에서 모임을 꾸려가려고 해요. 1년 차는 관계를 쌓는 데 집중하고, 2년 차는 함께할 활동들을 모색해보고, 3년 차는 또 다른 형태로 활동하는 식으로 단계를 쌓아나갈 예정이에요. 물론 언제까지 성북센터에서 활동할지는 모르겠지만, 해보는 데까진 해 보려고요. 아, 청소년 장애인 당사자 모임은 신체장애인 위주로 생각 중이에요. 


♧ 애린 : 좋네요. 재밌을 것 같아요. 


♤ 성훈 : 애린님이 사람을 잘 조직하는 팁 좀 알려주세요. 


♧ 애린 : 다른 거 없고 무조건 만나는 거예요. 무조건 들이대고요. 사람 만나는 건 정도가 없어요. 조직하는 데는 정도가 없어요. 관심 있는 사람을 눈여겨보잖아요. 뭐가 힘든지. 이런 것부터 출발이죠. 예전 성북센터 초기에 조직을 시작했을 때는 지역사회에 장애인들이 잘 다니지 못했던 시기여서 장애인이 보이기만 하면 무조건 쫓아가서 명함 주고 이렇게 시작했어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죠. 그 사람하고 관계맺는 것부터 중요한 것 같아요. 관계를 맺으면서 같이 경험을 나누는 거죠. 내 자립생활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그 사람도 겪어 볼 수 있도록요. 그리고 그 사람한테 뭐가 필요한지, 무슨 경험이 중요한지 이런 것들을 일방적으로 알려주는 게 아니라 ‘같이 알아볼까? 같이 해볼까? 같이 말해볼까?’ 이렇게 관계 맺는 게 저는 조직이라고 생각해요. 정형화된 틀이나 정도는 없어요. 기준을 가지고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죠.


♤ 성훈 : 더군다나 저는 언어장애가 있어서요. 그래서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땐 한편으로 두려운 마음이 들어요.


♧ 애린 : 그게 오히려 성훈님의 장점일 수 있어요. 신체장애 청소년이라고 해서 다 경증 장애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솔직히 경증장애인은 자립을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 혼자 알아서 해요. 그런데 성훈님 같은 중복장애인, 최중증 장애인은  고민을 무척 많이 하거든요. 성훈님의 경험을 같이 나누면 돼요. 나의 경험을 이 사람한테 어떻게 알려줄까, 어떻게 전달할까에 초점을 맞춰야죠. 내가 말을 못 하는데 이 사람과 어떻게 말을 섞을까는 차후 문제인 것 같아요. 그리고 성훈님이 잘하는 것 있잖아요.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 사람과 소통하고, 이런 거 굉장히 잘하는 거 같던데요? 성훈님이 롤모델이 되는 거예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이미 당신은 누군가의 롤모델일 수도 있어요. 





♤ 성훈 :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제가 지난해 말에 지하철 투쟁을 나갔었는데 그때 욕을 신나게 먹었어요. 중증장애인이 투쟁의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 애린 : 뭘 그 정도 가지고요. 난 천년은 살 거예요. 지금까지 욕 배불리 먹어서. 하하


♤ 성훈 : 현장 투쟁 나가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막상 가보니 시민들하고 눈을 못 마주치겠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쫄보인가 생각했어요. 


♧ 애린 : 처음부터 대담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없어요. 한 번 두 번 세 번 겪다 보면 무뎌지는 거지요. 저도 쫄보였어요. 처음에 경찰하고 눈도 마주치지 못했죠.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나는 여기 왜 와있나’ 이런 생각도 많이 했죠.


♤ 성훈 : 작년 11월인가 서울시청에서 투쟁했잖아요. 그때 먼발치에서 애린님을 봤었는데 휠체어에서 떨어져서 바닥에 앉아있더라고요. 경찰에 떠밀려 떨어진 거예요? 


♧ 애린 : 반반이에요. 공권력에 밀려 떨어진 것도 있고, 휠체어에 앉아있으면 번쩍 들어서 옮겨버리니깐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밑으로 내려간 것도 있어요. 


♤ 성훈 : 그날 애린님 보면서 어떻게 하면 저런 깡이 나오지 생각했어요. 저 같으면 그런 생각 자체를 못했을 건데. 저는 집에선 기어다니는데 밖에선 절대 휠체어에서 내리지 않거든요. 왠지 휠체어에서 내려오면 온갖 주위 시선이 저한테 달라붙을 것 같아요. 실제론 다른 사람들이 저한테 별 관심도 안 가지겠지만, 저는 그게 신경이 쓰여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휠체어에서 내려온 장애인의 몸’이 무기가 되잖아요. 그 몸들이 한강 다리를 건너는 차들을 멈추기도 하고, 미친 듯이 흘러가기만 하는 이 세계에 브레이크를 걸기도 하고. 저는 그런 장애인의 몸들에 흥미를 느껴요. 더 공부해서 비평의 언어로 거리에 나온 장애인의 몸을 해석해보고 싶어요. 이런 관점에서 애린님은 저의 흥미로운 관찰대상(?)이었어요.


♧ 애린 : 이 생활 20년이에요. 이런 깡이 하루아침에 나오지는 않아요. 저도 성훈님 같은 시기를 겪었죠. 그때 옆에 있는 사람들을 봤던 것 같아요. 저 언니, 형은 어떻게 하고 있지? 이런 거 보면서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통해서 현장투쟁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알았죠. 예전에도 활동가의 본분은 현장이라고 생각했고, 현장에서 많이 부대껴봐야 진짜로 필요한 것이 뭔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무엇보다 동료들을 많이 먼저 떠나보내는 경험들이 계속 생기잖아요. 그런 것도 영향이 있어요. 이것은 깡이 아니라 분노라고 생각하면 돼요. 


♤ 성훈 : 조금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그런 측면에서 성북센터는 현장투쟁에 좀 소극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IL센터가 그렇게 해도 될까 하는 고민이 들기도 해요. 


♧ 애린 : 그것은 비단 현재 성북센터만의 고민은 아니죠. 


♤ 성훈 : 그렇다고 해서 당장 이용자를 붙잡고 같이 나가자고 할 수도 없고. 


♧ 애린 : 저는 반대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이 지역의 이용 장애인을 왜 만나고 있지? 조금 거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용 장애인분들은 이 활동지원제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저상버스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르는 분들이 많아요. IL센터의 역할은 이런 것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리는 것도 있지만, 지역 장애인을 한 명이라도 활동가로 조직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야 더 많은 장애인이 함께 요구하고 지역을, 국가를 바꿔나갈 수 있는 거잖아요. ‘이런 집회가 있는 데 가볼래? 오늘 어땠어요? 어떤 부분이 불편했어요?’ 어떤 현장투쟁을 계기로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조직이죠. 그리고 이 사람에게 계속 힘을 불어넣어서 활동가로 만드는 것, 성북센터가 성훈님을 훌륭한 활동가로 우뚝서게 지원하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요? 성훈님은 요즘 특히 힘들거나 고민되는 것이 있나요?


♤ 성훈 : 본격적으로 자립하려고 최근 집을 구하는 중이었는데 그 과정이 무척 힘들더라고요. 중개인이랑 얘기 다 돼서 계약하려고 하면 장애인이라고 주인이 거부하는 일도 비일비재했고요. 연거푸 거부당하니 슬슬 짜증이 났어요. 저처럼 하우스푸어 장애인은 어떻게 집을 구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언젠가 장애인의 주거문제를 공론화시키고 싶어요. 시위든, 어떤 형태의 문화적 작업이든 다른 사람들하고 장애인의 주거와 관련된 문제의식을 나누고 싶어요. 시설 장애인 문제도 여전히 시급하고 중요하지만, 재가장애인의 주거문제도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어요. 


♧ 애린 : 이런 문제로 함께 싸울 수도 있어야죠.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장애인들과 함께 싸우고 함께 해결해나가야겠죠. 


♤ 성훈 : 애린님은 요즘 제일 큰 고민은 뭐에요?


♧ 애린 : 아무래도 이음센터죠. 이음센터가 만들어진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운영의 틀이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어요. 재정을 전담하는 담당자조차 한 명도 없었어요.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된 부분이 많아요. 그래서 하나하나 쇄신하며 만들어 가는 과정이에요. 


♤ 성훈 : 그렇다면 요즘 제일 힘이 되는 것은 뭐예요?


♧ 애린 : 술! 맛있게 동료들과 술 마시는 것이 요즘 저의 낙이에요. 요즘은 소맥에 꽂혔어요. 매일 야근하는 소수 정예가 있어요. 그 동지들과 어제도 마셨어요. 하하. 성훈님은 요즘 힘이 되는 게 뭐에요?


♤ 성훈 : 전 드라마요. 혹시 ‘그해 우리는’ 보세요? 사랑 이야기에요. 그 드라마에서 김다미 배우가 그렇게 매력적이더라고요. 선배로서 애린님이 후배들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신가요?


♧ 애린 : 딱히 별다른 건 없고요. 쉬엄쉬엄 하세요.


♤ 성훈 : 넵, 애린님도 너무 힘들지 않게 몸과 마음을 챙기면서 활동을 이어나가셨으면 합니다. 앞으로 현장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 나눠요. 저도 패기 넘치게 휠체어에서 내려와 길거리를 점거할 수 있을 때까지 잘 배우고 운동할게요.


♧ 애린 :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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