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 성북아리는 성북 + 아리아리를 합친 말입니다.
아리아리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자, 그래도 없으면 길을 만들자”라는 우리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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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 열사 특집] 장애해방열사 ① 김순석 열사, 우동민 열사 편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1-12-29 조회수 :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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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아리로 기억하는 장애해방열사 ⓵] 


김순석 열사 (1952~1984) 

[중증 지체장애. 1984. 9. 19. 사망 당시 34세. 묘소 위치_모름]


시장님,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또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 합니까.


▶ 당시 열사의 자결 소식을 보도한 1984년 9월 22일 조선일보 기사 


■ 편의시설 미비, 장애인 차별 등에 항의, 유서 남기고 자결


-. 동지의 삶 


김순석 열사는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5살부터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절었다. 18살 때인 1970년 서울로 올라온 열사는 조그만 금은세공 공장에 다녔으며, 남다른 손재주로 9년 만에 공장장이 되었다. 28살 때인 1980년 10월 교통사고로 두 다리에 철심을 박고 양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중증장애인이 되었다. 3년간의 투병 생활을 마치고 1983년 4월에 휠체어를 탄 채 퇴원한 열사는 송파구 마천동에 월세방을 얻었다. 그리고 '같은 처지의 불구자들끼리 모여 일하는 어엿한 공장을 차려보겠다는 꿈'을 꾸며 셋방 옆 추녀 밑에 3평 남짓한 작업장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머리핀, 브로치, 반지, 목걸이 등 각종 액세서리를 만들어 남대문시장 상가에 납품하는 일을 시작했다. 


납품을 위해 4~5일에 한 번꼴로 수동휠체어를 타고 남대문시장 상가를 방문한 열사는 이때마다 거리 곳곳의 턱에 가로막혔다. 또한 리어카와 좌판으로 가득한 시장 골목에서 상인들과 지나가는 시민들의 모멸적인 냉대에 시달려야 했다. 어떤 날은 횡단보도의 턱 때문에 무단횡단을 하다가 경찰 단속에 걸려 하룻밤을 유치장에서 보내기도 했다. 당시 상인들은 장애인이 만들었다는 이유로 액세서리를 구매할 때 다른 생산자들보다 10~20% 정도 싼 값을 요구했으며, 대금을 지급할 때에도 다음번 계약을 빌미로 가격을 낮추거나 지연시키는 일이 다반사였다. 


1984년 8월 말, 열사는 액세서리 단가 문제로 상인과 다툰 뒤 거래가 끊겨 보름여 동안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후 9월 15일 다른 거래처를 알아보겠다며 집을 나섰다. 결혼 예물인 금목걸이를 전당포에 담보로 맡기고 받은 10만 원을 들고 나간 열사는 9월 17일 지친 몸을 이끌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까짓 신경질과 욕설이야 차라리 살아보려는 저의 의지를 다시 한번 다져보게 해주었읍니다. 하지만 도대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는 서울의 거리는 저의 마지막 발버둥조차 꺾어놓았읍니다. … 시내 어느 곳을 다녀도 그놈의 턱과 부딪혀 씨름을 해야합니다. 또 저 같은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화장실은 어디 한군데라도 마련해 주셨읍니까.”


“장애자들은 사람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대우를 받아도 끝내는 이용당합니다. 조그마한 꿈이라도 이뤄보려고 애써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는 저를 약해지게만 만듭니다.”

 

“택시를 잡으려고 온종일을 발버둥 치다 눈물을 흘린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읍니다. 휠체어만 눈에 들어오면 그냥 지나치고 마는 빈 택시들과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저렸읍니다.”

(김순석 열사의 유서 중) 


열사는 한 맺힌 유서 5장을 당시 염보현 서울시장 앞으로 남기고 음독자살로서 이 사회에 항거했다. 당시 열사의 죽음은 한 일간지에 보도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대학정립단 등 장애인 당사자 조직 첫 저항의 단초가 되었다. 


-. 역사적 의의 


김순석 열사의 죽음은 장애의 문제가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사회적 차원에서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항거로 기록된다. 당시 장애대학생들로 구성된 대학정립단은 장애인체전에서 위령제를 치르고 행사에 참석한 문교부장관의 분향을 요구하는 등 열사의 죽음은 정권의 부당함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을 시작하는 불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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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민 열사 (1968~2011)

[중증 뇌병변장애. 2011. 1. 2. 사망 당시 43세.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고

그렇게 

함께 갑시다




▶ 우동민 열사가 보치아대회에서 딴 메달을 들고 기뻐하는 모습 등. 


■ 장애인운동에 헌신하다 국가인권위 점거농성 중 인권위의 인권침해 행위로 얻은 폐렴으로 사망


-. 동지의 삶


우동민 열사는 1968년 10월 24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심한 고열로 뇌성마비 장애를 입었다. 20대 중반까지 집에서 지내던 열사는 지인의 권유로 경기도 안산에 있는 장애인시설 명휘원에 입소해 5년 동안 생활했다. 이후 명휘원에서 나와 그룹홈에서 지내며 자립생활을 준비했다. 열사는 2005년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창립에 함께하고 성북센터의 대외협력 간사를 맡아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열사는 2005년 정립회관 민주화 투쟁, 2006년 활동보조인 제도화 투쟁, 2008년 성람. 석암 재단 시설비리 척결 투쟁,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투쟁 등 수많은 현장을 지켰다. 또한 장애인 문제 이외에도 경기도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투쟁 등에도 스쿠터를 타고 참여했다. 열사는 2010년 12월 3일 '장애인활동지원법의 올바른 제정과 국가인권위원회 현병철 위원장 사퇴 촉구' 인권위 13층 점거 농성에 참여했다. 당시 인권위 측은 초겨울임에도 난방을 꺼버리고 승강기 운행을 수시로 중단했으며, 활동지원사의 출입마저 통제하는 등 중증장애인들의 농성에 반인권적 행태를 보였다. 결국 열사는 폐렴 증세를 보이며 농성 중 응급실로 후송되었다. 병세가 지속하는 중에도 열사는 12월 8일 한나라당이 장애인 활동지원법 개악안을 날치기 통과하자 여의도에서 열린 '한나라당 규탄 기자회견' 항의방문 투쟁에 앞장서기도 했다. 결국 병세가 악화해 열사는 2011년 1월 2일 오전 10시에 급성폐렴으로 운명했다. 


열사는 심한 언어장애로 평소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호탕한 웃음과 푸근한 모습으로 동료들을 대했다. 또한 보이지 않게 주위 사람들을 챙기며, 때로는 엉뚱한 행동과 농담으로 지친 활동가들에게 작은 웃음을 주곤 했다. 무엇보다 심화하는 신자유주의하에서 사회적인 차별과 양극화의 심화 속에 장애인을 비롯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더욱더 비참한 질곡의 구렁텅이로 내몰리는 현실에서 열사는 묵묵하고 우직한 실천으로 현장을 지켰고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 쟁취와 장애인 차별 철폐를 위해 앞장서서 투쟁했다. 열사는 사망한 해에 으뜸 장애인활동가에게 주는 '정태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역사적 의의 


우동민 열사는 활동보조서비스제도화 투쟁 및 시설 비리 척결 투쟁 등에 앞장섰으며, 평택 대 추리 미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 등 장애인 차별철폐 투쟁 이외에 다른 대정부 투쟁에도 활발히 연대했다. 열사는 무능한 현병철 위원장 퇴진을 요구하며 국가인권위 점거 농성에 함께했으며, 이 과정에서 얻은 폐렴이 악화해 결국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은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에서 수차례 한국 인권위의 등급을 보류한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이후 국가인권위는 당시 반인권적 행태에 대해 2018년 이성호 위원장, 2019년 최영애 위원장이 마석 모란공원 열사 묘역을 찾아 공식사과했다. 또한 현 국가인권위 건물 내 벽면과 옛 인권위 건물(금세기빌딩) 앞 도로에는 우동민 열사를 기리는 동판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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