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 성북아리는 성북 + 아리아리를 합친 말입니다.
아리아리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자, 그래도 없으면 길을 만들자”라는 우리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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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 연재2]공공시민노동과 노동의 혁신(2)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2-03-26 조회수 : 1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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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시민노동과 노동의 혁신(2)

김도현|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무엇이 노동으로 인정되는가

 

우리는 앞서 인간이 수행하는 동일한 형태의 활동(예컨대, 밥 짓기, 보고서 쓰기, 상담하기)이 어떤 경우에는 노동으로 인정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불합리한 현실을 해명하는 방식은 일단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활동가치대가가 아니라 활동대가가치였다. , 우리는 어떤 활동이 가치가 있으면 대가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 어떤 활동이 대가를 받고 있으면 그것이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돈 못 버는 일은 가치 없는 일, 조금 버는 일은 조금 가치 있는 일, 억대 연봉 받는 일은 엄청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소위 말하는 화폐의 물신화(物神化, fetishization) 현상으로, 화폐가 가치를 표상하고 매개하는 수단에서 가치 자체 혹은 지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둘째, ‘활동가치대가가 아니라 활동이윤대가라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었다. 즉 어떤 활동에 대가가 제공되도록 하는 매개 항은 가치가 아니라 이윤 창출에 대한 기여였다. 혹은 가치라는 것이 이윤이라고만 해석되어왔다. ?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고, 자본이 추구하는 것은 이윤이니까.

그러나 첫 번째 해명은 말이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활동에 대한 대가를 무엇을 기준으로 제공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 제시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규범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두 번째 해명은 많은 사례에 적용될 수는 있지만, 정치인의 정치활동, 종교인의 종교활동, 교사들의 교육활동, 돌봄노동자들의 돌봄활동 등 이로써 직접 설명되지 않는 사례 또한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반화될 수 없고 따라서 이 역시 우리 사회의 규범이 될 수는 없다. 결국 노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규범은 활동가치대가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러할 경우 여기서의 가치란 다른 사회구성원의 물질적·정신적·정서적 삶에 대한 기여로 해석되어야 한다. 아니 우리 사회는 이미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왔고,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대로라면 내가 해왔던 활동도 공인된 노동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장애인의 활동 역시 설령 이윤 창출의 과정에 효과적으로 투입될 수 없다 하더라도 앞서 설명되었던 것처럼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삶에 기여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것도 노동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불일치, 혹은 실재와 현실의 괴리

 

이런 모순이 발생하는 기본적인 구조는 상품의 사용가치(실제로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유용하고 도움이 되는가)와 교환가치(현실적으로 시장에서 얼마의 돈을 받고 교환될 수 있는가)의 분리/불일치라는 차원과 관련된다. 즉 상당한 사용가치가 있는 상품이라 하더라도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아무런 교환가치를 갖지 못할 수 있으며, 별다른 사용가치가 없는 어떤 것이 매우 높은 교환가치를 실현할 수도 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에서 전자의 예로 물을, 후자의 예로 다이아몬드를 든다. 다른 모든 체제와 구분되는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간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존재하는 사회라는 점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노동()도 충분한 가치를 갖지만(사용가치의 존재) 대가를 받지 못하고(교환가치의 부정) 불인정 노동으로 격하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혹은 그러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간에 심각한 불일치가 나타나거나. 예컨대 영국 신경제재단(New Economics Foundation, NEF) 소속 연구원들의 분석에 따르면, 시급 6.25파운드를 받는 병원 청소노동자는 임금 1파운드당 10파운드의 사회적 가치를 창출했고 1~13,000파운드의 월급을 받는 보육노동자는 임금 1파운드당 7~9.50파운드의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 반면, 연간 소득이 50~1,000만 파운드나 되는 투자은행가는 1파운드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때마다 7파운드의 사회적 가치를 파괴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 이러한 모순은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용어를 빌려와 설명하자면 실재’(the real)현실’(reality), 혹은 본질현상의 괴리라는 측면에서 파악할 수도 있다. 여기서 실재와 현실의 괴리란 축구 경기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실재적으로는 골이지만 현실에서는 골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2010년 남아공월드컵의 독일과 잉글랜드 16강전에서 벌어진 일인데, 독일이 21로 앞선 상황에서 잉글랜드의 한 선수가 찬 공이 크로스바 위쪽을 맞고 골대의 경계선 안쪽으로 떨어졌다가 튀어 올랐다. 독일 팀의 골키퍼는 재빨리 공을 잡아챈 뒤 그라운드로 날렸고 주심은 노골을 선언하게 된다. 이런 경우 축구에서는 다른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가 그렇듯 심판의 판단을 따르게 되어있다.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오심도 경기의 일부이니까. 즉 잉글랜드의 선수가 찬 공은 실재적으로는 골이었지만 현실에서는 골이 아니었던 것이다.

축구 경기에서 종종 벌어지는 이러한 현실은 사람들이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지나가면 계속 유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정세와 조건 속에서, 예컨대 유럽 A나라와 아프리카 B나라의 월드컵 결승전이라는 중요한 경기였고, B나라에 대한 심판의 계속적인 편파 판정이 있었으며, 이것이 FIFA 측에 의한 압력으로 의심되는 상황 속에서 관중들 대부분이 들고 일어선다면 어떻게 될까? 대다수 축구 팬들이 골에 대한 정의를 곧이곧대로 내세우며 심판의 오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현실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싸움을 시작한다면, 현실은 새롭게 재편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사회에서는 장애인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노동이 실재(본질)적으로는 노동이지만 현실(현상)에서는 노동이 아닌채로 존재했다는 것이고, 이는 노동에 대한 정의정의(定義)와 정의(正義)라는 이중적 의미에서를 근거로 한 인정투쟁이 광범위하게 벌어진다면 새롭게 재편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댄스팀 에스쁘아 멤버와 관객들이 함께 어우려져 춤을 추고 있다. (사진 출처 : 비마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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