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 성북아리는 성북 + 아리아리를 합친 말입니다.
아리아리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자, 그래도 없으면 길을 만들자”라는 우리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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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 성북아리로 기억하는 장애해방열사 ⓶] 최정환, 이덕인 열사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2-03-30 조회수 : 1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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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아리로 기억하는 장애해방열사 ⓶] 


최정환 열사 (1958~1995) 

[중증 지체장애. 1995. 3. 21. 사망 당시 38세. 용인천주교공원묘원]


4백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내 한목숨 죽어도 좋다. 복수해달라.




■ 극악한 노점단속에 항의, 서초구청 앞에서 분신


-. 동지의 삶 

최정환 열사는 1958년 6월 30일 대전에서 태어났다. 열사는 어려서 부모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자랐다. 1979년 큰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되고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다. 열사는 20대 초반 잠깐 장애인 수용시설에서 생활했으며 곧 사회로 나와 자립생활을 시작했다. 스물일곱 살 때 친아버지를 찾았지만, 친자확인을 거부당해 다시 홀로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주민등록상 아버지가 있다는 이유로 생활보호대상자조차 되지 못했다. 


열사는 서울 마천동 근처에 월셋집에서 생활했다. 삼륜 오토바이에 카세트와 배터리를 싣고 양재역 근처에서 대중가요 카세트테이프를 팔며 노점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열사는 서른여섯 살 때(1994년) 서초구청 노점단속반에 떠밀려 그나마 몸을 지탱하던 왼쪽다리마저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다. 하지만 열사는 먹고살아야 했기에 채 치료를 마치지도 못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이듬해 초봄 다시 노점을 시작했다.


1995년 3월 8일 저녁 서초구청 단속반의 살인적인 단속에 스피커와 배터리를 빼앗겼다. 열사는 이날 밤 9시 30분경 서초구청에 찾아가 노점에 필요한 물품을 돌려줄 것을 애원했으나, 싸늘한 냉대와 무시에 심한 모멸감만 받고 좌절했다. 이에 분노한 열사는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했다. 이른바 문민정부라 외치던 김영삼 정권의 노점상 탄압에 대한 항거였다. 


최정환 열사는 얼굴에 3도, 신체 2도, 전신 88%의 화상을 입고 강남시립병원 중환자실에서 14일간 사경을 헤맸다. 열사는 동료들에게 “400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복수해달라.”라고 절규하고 3월 21일 생을 마감했다. 

  


-. 역사적 의의 

최정환 열사의 죽음은 이른바 ‘문민정부’를 내걸고 개혁을 표방한다던 김영삼 정권의 장애인, 빈민에 대한 반민중적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열사의 분신은 당시 소련의 해체 등으로 이념적 혼란을 겪던 운동권이 재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전장협)와 전국노점상연합(전노련) 등 당사자 단체와 노동, 시민, 학생 운동 단체가 힘을 모아 수개월간 장례투쟁을 진행했다. 3월 25일 연세대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3천여 명의 대오가 집결해 가두 진출을 시도했다. 전장협과 전노련은 장례투쟁 이후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해 빈민장애인의 생존권 투쟁을 이어갔다. 




이덕인 열사 (1967~1995)

경증 지체장애. 1995. 11. 28. 사망 당시 29세.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혁명, 혁명하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그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고


오늘이 없는 과거가 있을 수 없다. 





■ 공권력의 노점단속에 항의해 망루 투쟁 중 의문사  


-. 동지의 삶

이덕인 열사는 1967년 12월 14일 전남 신안군에서 다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장애를 입었다. 고등학교 때 가족들과 함께 인천으로 올라온 열사는 1995년 6월부터 인천 아암도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최정환 열사 투쟁 이후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와 전국노점상연합이 구성한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에서 이덕인 열사는 총무의 역할을 맡아 활동했다. 또한 같은 해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 투쟁, 서울대에서 열린 범민족대회 등 연대투쟁에도 활발하게 참가했다. 


이덕인 열사는 아암도 노점상 철거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인천시와 연수구의 무자비한 노점 단속에 항의해 1995년 11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아암도에서 망루 농성을 시작했다. 열사는 이튿날인 11월 25일 망루 탈출을 시도했으나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열사는 11월 28일 포승줄에 묶여 온몸에 멍이 든 의문의 사체로 아암도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경찰은 길병원 장례식장 콘크리트 벽을 해머로 뚫고 들어와 시신을 탈취해 강제부검하고 서둘러 사인을 익사로 발표했다. 전장협과 전노련 등 의문사대책위의 진실 규명을 위한 장례투쟁은 5개월 동안 지속했다. 


이후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열사의 부모는 25년간 투쟁했다. 2002년 김대중 정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덕인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민주화운동 관련 명예회복, 배‧보상심의신청은 모두 기각되었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는 ‘위법한 공권력으로 인한 사망인지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조사개시 결정을 내렸으나 진실규명을 위한 조사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2020년 5월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12월 10일부터 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활동이 재개되게 되었지만, 이덕인 열사 의문사는 지금도 조사 개시조차 하지 않고 있다. 


-. 역사적 의의 

1995년 3월 분신한 최정환 열사에 이어 11월 의문의 사체로 발견된 이덕인 열사의 죽음은 김영삼 정권의 반민중적 폭력성에 저항을 이어가는 구심점이 되었다. 이덕인 열사 의문사는 노점 강제 철거와 장례 과정에서 소위 문민정부의 부도덕성과 폭력성의 민낯이 드러났다. 또한 장애인의 생존권 문제가 얼마나 절박한지 사회에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당시 이덕인 열사 장례 투쟁을 계기로 ‘민중운동탄압분쇄와 민중기본권쟁취를 위한 범국민대책회의’가 결성되어 이후 민중 운동 세력의 공동행동을 끌어냈다. 그러나 2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열사의 부모님과 가족들은 진실규명을 위해 투쟁했음에도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인정’ 이외에 명예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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