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 성북아리는 성북 + 아리아리를 합친 말입니다.
아리아리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자, 그래도 없으면 길을 만들자”라는 우리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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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 20주기 열사 특집 카드뉴스] 최옥란 열사 편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2-04-13 조회수 : 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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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기 열사 특집 카드뉴스] 최옥란 열사 편 


 


 


 


 


 


 


 


 


 


 





 


[그림 속 글자]


1. 최옥란, 그녀의 용기로부터 출발한 우리의 싸움


2. 최옥란, 1966년에 태어난 그녀에게 어릴 적 뇌성마비 장애가 찾아왔습니다. 배움에 대한 열의가 컸지만, 장애와 가난은 그녀의 꿈을 가로막았습니다. 18세에 독립해 성린직업재활원에 입소한 후 작은예수회, 명휘원을 거쳐 성장했습니다.


3. “곧바로 학력고사(준비)를 시작하였다. 하루에 4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장애인 모임(울림터)에 나갔다. 그 모임은 이 땅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장애인을 위해 토론도 하고 그것을 위해 행동을 했다. 이 모임에 나가면서 우리나라 복지가 열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옥란, 재판장님께, 1999년


4. 80년대 불어닥친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사회변화의 물결은 최옥란에게도 비껴가지 않았습니다. 87년 장애인문제연구회 울림터에 가입한 최옥란은 88년 동생과 연신내 시장 인근 자취방을 얻어 생활하며, 본격적으로 운동에 뛰어듭니다. 


5. “뇌성인의 아픔을 어떻게 표현할까” -1990년 1월 11일, 최옥란의 일기


6. 울림터에서 장애인운동 활동가로 의식을 깨친 최옥란은 ‘뇌성마비연구회 바롬’의 창립멤버로 함께합니다. 뇌성마비 장애인이 겪는 고유한 문제를 풀어내야겠다는 그녀의 다짐은 결혼과 출산으로 잠시 유보됩니다.


7. 98년 이혼 후 최옥란은 본격적으로 생계를 찾아 나섭니다. 노점상 최정환 열사의 분신 항거 후 꾸려진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회원으로 청계천8가 삼일아파트 17동 근처에서 최옥란은 노점을 시작합니다. 노점상으로 살아가는 것은 매일 단속과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주변 노점상들은 그녀를 악바리로 기억합니다.


8. 2000년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된 후 최옥란은 수급자가 되었습니다. 몸이 안 좋아져서 노점을 포기하고 했던 선택이었지만 2001년 그녀가 받는 한 달 수급비는 단돈 28만 원, 인간답게 살 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그녀는 한 달 수급비를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반납하고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에 들어갑니다.


9. “김대중정부의 선전과 달리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빈곤계층 단 한 명의 최저생계도 보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생존권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농성단’ 기자회견, 2001년 12월 3일


10. ‘건강하고 문화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라는 최저생계비는 그녀를 건강하고 문화적으로 살 수 없게 했습니다. 주변 수급자들 역시 같은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사실과 이를 함께 바꿔나가고자 하는 용기가 그녀를 명동성당 농성에 나서도록 이끌었습니다.


11. “제가 이렇게 명동성당에서 그것도 추운 겨울에 텐트 농성을 결심한 이유는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비단 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부터입니다. 많은 수급자가 그리고 차상위계층이 말도 안 되는 제도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현실은 저에게 한편으로 힘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최옥란, 명동성당 농성에 들어가며, 2001년 12월 3일


12. 농성을 마친 이듬해 봄, 음독자살을 기도한 그녀는 결국 2002년 3월 26일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가 시작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개정 투쟁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기만성을 폭로했고,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투쟁을 비롯한 기초법 개정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13. 최옥란은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제2, 제3의 최옥란들은 그녀의 투쟁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글 : 김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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