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리

* 성북아리는 성북 + 아리아리를 합친 말입니다.
아리아리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자, 그래도 없으면 길을 만들자”라는 우리말입니다.

성북아리

[6호 - 서평] 『집으로 가는, 길』
작성자 : 관리자(ilcenter50@hanmail.net) 작성일 : 2022-07-15 조회수 : 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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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시설의 좌표를 찍다

-『집 으로 가는, 길-시설사회를 멈추다』 서평

홍성훈


● 향유의 집을 방문하다

 

   작년 무렵 향유의 집을 방문했다. 프로젝트 공연 팀 ‘제로셋 프로젝트’의 <관람모드: 있는 방식>(2021) 공연 무대가 그곳이었다. 리프트가 장착된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좀 긴장했다. 말로만 듣던 장애인 거주 시설을 직접 마주하는 일이 처음이었다. 이제 향유의 집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상기하면 할수록 오히려 가슴이 더욱 쿵쿵거렸다. 

   버스에서 내려 얼마 안 가 향유의 집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표지판이 보였고, 그 뒤로 건물 한 채가 있었다. 만약 표지판이 없었다면 어느 공장처럼 보일 만큼 단순한 건물이었다. 공연에 출연하는 배우이자, 향유의 집에서 탈시설한 당사자인 김동림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리저리 살피는 관객들의 옆에 있었다. 그는 관객들에 앞서 마치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집주인처럼 담담하게 입장했다.

    1층에 들어서자 복도를 중심으로 양옆에 방들이 즐비했다. 문이 활짝 열린 방도 있었고 닫힌 방도 있었다. 바닥과 천장에는 어떤 문장들이 쓰여 있었다. 향유의 집에서 생활했던 장애인 당사자들과 시설 종사자들이 남긴 말이었다. 공연은 관객들이 각자 향유의 집을 돌아다니며 방에 머물거나 곳곳에 붙여진 말들을 읽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각각의 방은 단촐한 구조였다. 옷장 하나, 서랍장 하나, 낡은 매트리스가 전부였다. 사람 한 명이 생활한다고 해도 부족한 공간이었다. 오래 눈을 뗄 수 없었던 건 방 두 개 사이에 놓인 화장실이었다. 그곳은 양 옆으로 입구가 뚫려 있어 어느 쪽에서 열어도 사생활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절로 ‘치욕’이라는 단어가 연상되는, 아찔한 공간이었다. 나는 방들을 돌아다니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수 천, 수 만 번을 응시했을 풍경에 나의 시선도 포갰다. 간간이 공연팀이 사전에 녹음한 당사자들과 종사자들의 말이 나긋나긋하게 흘러나왔다. 그 말들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 조심스럽게 호흡하며 귀를 기울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향유의 집은 ‘공간’으로써 쓸모가 사라졌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기 의미를 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워냄으로써 자기 존재를 다하는 어떤 아이러니의 공간이 있다면 바로 여기일 것이다. 수많은 장애인들이 여기에서 살았고, 어떤 이들은 안타깝게도 죽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지역사회로 나가 자립생활을 실천하고 있다. 비극과 희극을 함께 품은 공간. 이러한 지점에서 향유의 집에 대한 기록은 탈시설 운동사에서나 장애인 운동사에서나 중요한 시좌를 제공할 것이다. 2022년 상반기 그 기록집이 나왔다.

   제목은 『집으로 가는, 길─시설사회를 멈추다』(홍은전 외, 오월의 봄, 2022, 이하 『집으로 가는, 길』).


● 직원과 당사자들이 함께 말하는 향유의 집

   탈시설 장애인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은 앞서도 출간된 바 있다(『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2013), 『나, 함께 산다』(2018)). 거기에 담긴 당사자들의 증언은 하나하나 소중하고 자주 소환될 가치가 충분히 있다. 이러한 책들과 『집으로 가는, 길』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면 이 기록들에는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그곳에 적을 두고 짧게는 2-3년, 길게는 20년간 일을 해 온 직원들의 구술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직원들의 구술은 향유의 집에서 일어난 폭력과 학대와 같은 비윤리적인 행태를 고발할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탈시설의 진원지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직원들과 당사자들 간의 구술은 저마다 차이가 있는데 이들은 향유의 집에 대하여 각각 다르게 진술하지만 조금만 시야를 넓게 바라보면 결국 같은 방향성을 갖고 움직여 왔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탈시설의 ‘모범사례’로 워낙 많이 회자되어 탈시설 운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향유의 집 이야기를 자주 들었을 법하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향유의 집의 구 명칭인 석암베데스 요양원은 석암재단에서 운영한 장애인 거주시설의 명칭이다. 석암재단은 요양원뿐 아니라 여러 시설을 만들고 관리하는 주체였는데, 여기에 관여한 사람들은 이부일이라는 인물과 그 직계 가족, 친척들이다. 안에서 고인 물은 필히 썩을 수밖에 없는지라 내부 비리와 횡령은 비일비재했다. 정부 보조금을 사적으로 유용하거나 입소자들에게 지급되는 장애 연금이나 수급비를 횡령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규선이라는 당사자가 자신의 장애 수당이 이부일 일가에게 전부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 이상 비인간적으로 살 수 없음을 깨닫고, 같은 입소자들, 그리고‘가족’이라고 부르며 동고동락한 시설 종사자들과 힘을 모아 맞서 싸운다. 치열한 싸움의 끝에 민주 이사진으로 교체되고 시설의 운영진이 시설을 스스로 문을 닫는 전무후무한 선언을 이끌어낸다. 마침내는 2021년 4월 30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거주인 76명이 지원주택으로 떠나면서 공식적으로 향유의 집은 폐쇄된다.


    문장이 거칠고 사건의 경과 위주로 쓰다 보니 그 과정이 단순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책에 등장하는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따라가보면 탈시설은 더 이상 인간 이하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주변을 바꾸는 ‘혁명’적인 순간이다. 책을 보면서 인상 깊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그러니 장애인만 탈시설하는 게 아니에요. 종사자도 탈시설해야 돼요. 새로운 일에 걸맞은 직무 역량이 형성돼야죠. 지원주택 종사자들도 그런 고민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어요. 지원주택은 주택만 공급하면 된다? 그럴 것 같았으면 옛날에 다 바뀌었죠. 한 사람 한 사람 인생이 그렇게 쉽게 얘기되는 대로 되지 않잖아요. 다 다른데. 그래서 맞춤형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고요. 개개인에 맞춰 삶을 설계하도록 지원해야 해요. 저는 ‘사람 중심 계획’이라는 단어도 쓰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뭘 계획할 수 있겠어요. 타인의 삶에 대해. 계획은 당사자가 하는 거고 사회복지사는 그 설계를 지원하고 지지해야 하는 거죠.(정재원 구술, 207-208쪽)


   시설은 장애인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 그 인식을 토대로 누군가의 삶을 ‘시설화’하는 경향들에 저항하는 것. 어쩌면 이것은 향유의 집을 박차고 나온 이들이 몸소 보여준 지향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난 6월 21일 서울시의회에서 ‘서울시 탈시설 지원조례’가 통과되었다. 비록 서울시의회 통과 과정에서 몇몇 부분이 수정되었지만 장애인이 탈시설해야 하는 강력한 무기가 하나 생긴 것이다. 향유의 집 거주인들이 모두 자신의 집을 찾아 지역사회로 돌아온 것처럼 다른 시설 거주인들도 나왔으면 한다. 나 또한 집으로 가는, 길은 좀 험난할 수도 있지만 함께 힘을 합쳐 가보자고 손을 내밀 수 있는 활동가가 되고 싶다고 향유의 집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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